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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좌담] 전환? 전환!
2017-02-01 12:13:00

[좌담]

전환? 전환!

 

정리: 편집부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볼 때 큰 틀의 차원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런 마음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말이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는 최근 ‘전환’을 키워드로 책을 발간한 세 분의 저자를 모시고 북콘서트를 진행했습니다. 다음은 ‘전환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참 석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정의로운 전환』 저자)

김성균 (지역사회연구원 소장, 『분명한 전환』 저자)

주요섭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전환 이야기』 저자)

 

진 행

김신양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전환의 ‘정체’

 

사회 > 크게 보면 ‘전환’이지만 각각의 책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쓰인 것 같다. 한 분씩 자신이 생각하는 전환의 의미를 이야기해 달라.

 

김현우 > 전환은 바꾼다는 것인데, 결국 이대로는 안 되니까 바꾸는 것이다. 

 

의미를 조금 좁히면, 책 제목이기도 한 ‘정의로운 전환’은 미국의 노동운동가 토니 마조치가 얘기한 바대로 ‘유해한 작업환경, 환경을 오염시키는 생산물을 만드는 노동과 생산에서, 노동 과정이 노동자에게 안전하고 지역사회에게도 좋으며 결과도 환경과 생명을 함께 살리는 것으로 가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러려면 더욱 많은 것들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한 공장이나 한 업종에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생산사슬도 해결해야 하고. 기존의 시장으로 그냥 내던져져서는 안 되니 협동조합을 비롯한 공동체 경제까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문명적 전환까지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적색의 소비자집단과 녹색의 노동계급도 나와야 하고, 그러다보니 굉장히 여러 가지로 응용할 수 있는 전환이 되어 버린 면도 있다. 농업의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주요섭 님은 책에서 엑소더스나 개벽에 비유하셨는데, 거기에 공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굉장히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어렵고 큰 이야기 또는 당장은 엄두를 못 내는 얘기가 아니라, ‘리얼 유토피아’처럼 지금 당장 써먹거나 싸우는 동기가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김성균 님이 생태적 재지역화를 강조하신 것도 그런 점에서 같이 모색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전환이라는 대안이 메시아가 해답을 주듯이 어느 날 갑자기 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위기로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기온이 한순간에 오르는 게 아니고 석유정점도 갑자기 오는 게 아니다. 여러 방편으로 위기의 시점을 연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파국이 오고 그 다음에 개벽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전환의 대안이나 욕구들이 주변에 흘러서 차고 넘칠 때 그런 것들이 밀고 당기면서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렇게 싸우고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도둑처럼 오는 게 전환이 아닌가 한다.

 

김성균 > 개인적으로 전환이라는 건 지금 시대적 상황에서는 싹 다 갈아치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놓은 독특한 콘텐츠가 있다. 넓은 도로와 이것을 꽉 메운 자동차, 높은 빌딩. 쉬운 예로 일산, 분당, 평촌이 다 그렇다. 여기서부터 공간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안양시 인구가 약 62~3만 정도인데, 안양에는 안양사람과 평촌사람이라는 두 부류 사람들이 존재한다. 개발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보여준 천박한 자본주의 모습이다. 요즘은 젊은 친구들한테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LG 자이’, ‘푸르지오’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 삶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하나도 없고 다 개발을 주도한 자본이 만들어준 것이다. 버스정류장 이름도 그렇게 바뀐다. 안양에 포도원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지금은 포도원이라는 안내방송 대신 거기에 들어가 있는 다섯 개 아파트 건설사 이름이 전부 다 나온다.

도시관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항상 고민은 ‘대한민국에서 얘기하는 공간사회학이 도대체 뭔가’였다. 지역사회개발론, 도시계획론 등에서 공간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사람’에 대한 고민은 없다. 길을 어떻게 넓히고 도로를 어떻게 할지, 이를테면 토건을 중심으로 한 개발주의가 만들어 낸 구조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모 연예인이 광고한 양문형 냉장고가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전환적으로 살려면 텃밭 운영하는 것도 좋지만 집 냉장고 크기부터 줄여야 한다. 대형마트형 생활 방식이 지속될 수 있는 데는 집의 대형 냉장고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동네빵집이 문을 닫고 프랜차이즈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역사회의 공간과 삶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와 자본의 권력구조를 정확히 보고 바꿔내는 노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발 디디고 살아가고 있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가 토지를 바라보는 눈은 그 출발점이다. 여전히 팔고 사는 부동산 개념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관점으로 볼 것인가.

 

주요섭 > ‘전환’을 우리말로 옮겼을 때 중심이동, 탈바꿈, 이행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주목하는 것은 탈바꿈 (transformation) 이다. 사회 전체의 탈바꿈도 필요하지만 출발점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다른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 출발점이기도 하고 어쩌면 종착점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바꿈이라는 건 언젠가 먼 훗날 이루어질 일이 아니고 지금 그 속도가 늦는 것처럼 보이고 잘 못 느낀다 하더라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즉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행(transition)으로서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탈바꿈에는 사람의 탈바꿈도 있고 사회의 탈바꿈도 있다. 다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탈바꿈의 출발점으로서의 ‘인식론적 전환’이다. 사고방식, 세계관, 관점의 전환이 없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어렵고 다른 변화를 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인식론적 전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고 알고 듣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보려고 하면 다 볼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실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보거나 듣고 싶은것만 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책에서 얘기한 세 가지 전환 가운데 의식의 전환을 먼저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의식이 바뀌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기존에 ‘그러하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물음표다. 우리가 전제하고 있던 모든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것. 이게 전환의 출발점이고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회 > 여러 개념 가운데 ‘전환’을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주요섭 > 사회적 불연속성이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혁명은 불연속적인 것이긴 하지만 앞의 걸 폐허로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하겠다는 것이다. 전환은 앞의 걸 인정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존재, 새로운 생명이 있어야만 새로운 메타 생명체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새로움의 하나, 그게 중요하다고 본다.

 

 

전환의 ‘싹수’

 

사회 > 전환의 징조는 무엇이고,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세 분은 전환이 ‘중요하다’거나 ‘필요하다’고, 또는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전환의 ‘싹’을 더 키우고 계속 자라도록 물을 주어야 할 텐데, 과연 어디서 그런 가능성이 보이는지 말씀해 달라.

 

주요섭 > 앞에서 인식론적 전환을 이야기했는데, 잘 보려고 하면 보인다. 반면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안 보인다. 제 나름으로 조금 보였던 것 중 하나는, 최근에 여성들이 쓰는 동학 소설 모임에서 1년간 작업 끝에 책을 출간하게 된 점이다. 지난해 동학혁명 120주년이 된 해에 전국에서 모인 10여 분이 동학을 다시 읽는 학습회를 해오면서 지역마다 한 명씩 동학혁명 과정에서의 인물을 선정해 여성의 눈으로 쓰는 작업을 했다.

또 몇 년 전에 이런 고민들을 좀 더 구체화시킬 수 있었던 경험이 거창에 있는 여성들의 자기치유 모임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끼리 모여서 소모임으로 마음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모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같이 단식을 하면서 몸 치유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인천에는 그동안 사회운동을 하면서 마음이 아프고 힘든 분들께 예술치료를 통해 위로하고 치유와 돌봄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매개해주는 모임이 있다. 이렇게 눈을 뜨고 보니 대전이나 정읍 등 곳곳에서 비슷한 움직임들이 보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자본이나 국가가 마음을 어루만져주거나 아픔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지금은 자기 치유의 시대다. 내가 나를 치유하고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되었다. 이게 ‘전환의 싹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혁명을 얘기할 때는 다른 누군가, 정부나 시장, 복지기관 등이 대신해줄 것을 기대하고 요구했는데, 이제는 내가 나를 치유하고 구원해야 하는 시대이고 그것을 열망하는 사람들, 나아가 이것을 실제로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들이 많아지고 있다.

 

김성균 > 마찬가지로 전환의 싹수는 굉장히 많다고 본다. 2000년대 초반에 생태공동체연구모임에서 공모사업 지원을 받아 북유럽 10여 군데 생태공동체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게 인연이 돼서 책에 나와 있는 글로벌 에코빌리지 네트워크 (GEN)를 사례로 정리했다. 주요섭 님이 얘기하신 ‘자기 스스로’ 같은 것인데, 그런 방식으로 지역에서 운동하고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그룹들을 보면서 정말 고민할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지인 한 분이 “생태공동체나 생태마을은 농촌에선 되는데 도시에서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명확히 답을 못한 적이 있다. 이후 그 답을 덴마크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덴마크는 주거와 거주 문제를 고민하면서 도시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터를 만드는 방법으로 코하우징을 선택했다. 덴마크에는 코하우징 조합이 3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2007년에는 영국 출장을 기회로 슈마허칼리지를 들렀는데, 동네를 둘러보니 편의점도 없고, 어떤 작은 서점에서 1962년판 『오즈의 마법사』 책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동네가 트랜지션 타운으로 유명한 토트네스이다.

그 이후로 토트네스 관련 자료를 모으고 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토트네스 사람들은 < 교외도시의 종말 > 이라는 영상을 본 후 자신들이 직면하게 될 전환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 어디에서든 만들어진 도시는 에너지를 밖에서 가져오게 되는데 , 지구온난화나 지속가능성을 고려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 그래서 2009 년부터 2 년 반 동안 매번 모여서 토론하고 학습하면서 아젠다를 만들었다 . 2013 년에 나온 주민들이 만든 보고서가 책의 부록으로 소개된 <에너지감축행동기본계획 매뉴얼 > 이다.

분명히 이런 전환의 싹들은 국내외적으로 있다고 본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에서도 이런 움직임들이 마을이나 사회적경제 단위,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 어려운 점도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김현우 > 싹수가 있다. 특히나 광우병 촛불과 세월호를 경험한 젊은이들은 그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밥상과 연대를 몸과 마음으로 느꼈기 때문에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의미를 알아채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반면 비관적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국가와 자본은 압축성장으로 계속 달려 나가고, 대응을 해보려고 하면 일을 더 크게 저질러 놓고 있는 것이다. 4대강 파괴나 제2롯데월드 같은 것들을 저렇게 해 놓으면 뒷감당을 누가 할 것인가. 뉴타운으로 그마저 있었던 공동체들이 다 파괴되고 이웃이 없어진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젊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배달앱도 굉장히 많이 쓰는데, 배달노동자들과의 관계나 연대가 앱에서 터치하는 과정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결국 긍정과 부정의 측면들이 있는데, 어차피 해야 될 과제나 요구가 있다면 어떻게 빨리 잘 할 것인가(빨리라는 말도 조심해야겠지만)를 얘기해야 한다. 탈핵만 해도 그렇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한국의 탈핵운동이 굉장히 진전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행사 하나 만들어내기 쉽지 않다. 핵발전소 재가동이나 수명 연장, 신규 부지, 수출 등 정신이 없다. 이렇게 보면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2040~50년 안에 한국도 탈핵이 될 것으로 본다. 재생가능에너지의 비용이 낮아지고, 폐기물부터 관리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게 빤한데 아무리 어리석은 정부라도 지금 같은 방식을 계속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떤’ 탈핵을 할 것인가인데, 풍력이든 태양광이든 대기업이 금융자본과 결합해서 계속 독점하면서 시민들은 단지 전기 코드 꽂아쓰고 매달 고지서 받아보는 에너지 소비자로 머물러 있는다면 ‘탈핵’은 했으되 ‘전환’은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긍정성, 부정성을 모두 보고 어떻게 빨리 안전하게 좋은 탈핵을 할 것인가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싹수의 주체에 관해서라면, 책에서 적색과 녹색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점에서는 솔직히 비관적이다. 녹색이든 적색이든 보수성이 굉장히 있다고 본다. 녹색도 자기와 가족의 안위를 넘어서기 쉽지 않다. 적색은 더 심각하다. 한 노동조합이 갖고 있는 계약관계와 관행을 넘어서기 쉽지 않고, 이런 에너지 문제나 전환의 필요성을 노동조합 간부들과 개인적으로 얘기해보면 잘 통하는데 노동조합에서 사업으로 하라고 하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비유를 한다. 정의로운 전환 또는 삶의 전환의 문제가 노동자 개인의 선택으로 맡겨지면 0과 1밖에 안 남는 거다. 도저히 혼자로는 이 체제를 바로 넘어설 수 없고 ‘엑소더스’ 할 수 없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순응하고 살거나, 아니면 혼자 탈출하는 거다. 개인적인 선택으로 국한되면 의미는 제한되고 여전히 남은 사람들은 0과 1의 선택 속에 놓이기 때문에, 0과 1이 아닌 0.01부터 0.99까지 여러 가지 모색이 가능하고, 그것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해야 된다는 것을 같이 얘기하는 게 정의로운 전환이지 않을까 한다. 0과 1이 아닌 0.01부터 0.99까지 여러 가지 모색이 가능하고, 그것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해야 된다는 것을 같이 얘기하는 게 정의로운 전환이지 않을까.

 

 

전환의 ‘친구’ 그리고 ‘방법’

 

사회 > 굉장히 많은 변화와 시도가 있지만 그런 것들은 또한 굉장히 쉽게 파괴되거나 없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 전환이 지금 이 사회의 대안으로 얘기되는 다른 개념, 지속가능한 개발이나 사회적경제, 그 외 여러 가지 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무엇을 같이 할 수 있을까.

 

김성균 > 공간사회학 입장에서 지역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거기에 지속가능성을 얹을 것인가 했을 때 나온 개념이 ‘생태적 재지역화’이다. 글로벌 스탠더드 기준에서 세계화를 얘기하고 지역이 세계적인 거라고 얘기했는데 정작 지역적인 건 없고 지역의 자원을 유출시키는 구조 속에서 진정한 ‘지역화 ’ 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표현한 게 ‘ 재지역화 (relocalization)’였고, 여기에 생태적 의미를 더해 만든 개념이다.

알도 레오폴드의 『모래군의 열두달 』이라는 책에 근본생태론과 생명지역주의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토지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고 한국 사회의 현실을 의사소통, 네트워크, 지역문화, 지역공동체의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도시계획 방식이 아니라 분권, 제3섹터, 상향식 개발, 거버넌스, 마을만들기, 생협 등 새로운 흐름을 묶어서 지역사회 내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고, 개발과 계획 과정에서 코하우징, 뉴어바니즘 , 생태마을, 트랜지션 타운 같은 구체적 전략들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생명지역주의자들이 카테고리화한 것을 한국적 상황에 맞춰서 정치·경제·사회·기술·문화로 묶어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정치다. 한국 사회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 속에서 남북이 분단되고 군사독재 정권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지역사회와 생활정치는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4~50년 동안 토건과 개발사업을 주도하는 기득권 집단이 카르텔을 형성해 지역사회를 지배하면서 풀뿌리 보수주의를 공고히 해 왔다. 중앙의 행정과 정치가 지역사회를 이끌어 오면서 시민이 참여해서 아래로부터 지역 발전을 모색하는 기회 또한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 마을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반가운 일이나, 행정이 적극 개입하면서 이 분야의 거버넌스 영역이 주로 민간 위탁이나 보조금을 통해 운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마을공동체, 사회적경제,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해 생활정치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담론 수준을 넘어서 구체적으로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요섭 > 사회적기업법이나 사회적경제기본법, 협동조합기본법도 마찬가지인데, 제도화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시스템을 그대로 놓아두고 새로운 움직임을 그 안으로 포섭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려는 작업이다. 거듭남이라는 것이 어떤 ‘질적’ 변화를 뜻한다면, 전환 네트워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할 때 (기계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제도와 법 밖에 있는 사회적경제 영역이 중요하다고 본다. 모든 중간지원조직들은 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만 지탱하고 있다. 민이 주도하는 중간지원조직을 만들어본 사례가 없다. 새로운 싹이 자라나는 것들을 제도 안으로 포섭해서 싹을 고사시켜 버리는 게 현재의 사회적경제, 협동조합들이 당면한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게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중심이동이 이루어지려면 새로운 존재의 네트워킹을 통해서 메타 시스템을 새로 만드는 중심점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엄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 전환 이니셔티브라는 단체에서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대안으로 이야기하면서 new-sustainability라고 하는데, 그 ‘new’의 의미가 뭘까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현우 > 전환 담론은 지속가능 개발이나 대안경제 프로그램과 열심히 만나야 한다. ‘리얼한’ 매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사람들이 모이고 재정과 사업이 도는 곳들, 조금이라도 전환 담론을 구현하거나 테스트할 수 있는 곳들과 만나야 하고 자연스럽게 만날 수밖에 없다. 전환이라고 할 때, 누구의 어떤 프로그램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다양하게 서로 배우고 경합하고 확산되면서 전체적으로 전환이라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노선이 맞다고 하고 갈라치기 하기보다는 ‘묶어내기’가 더 중요한 단계라고 본다. 세 저자도 전환의 강조점이나 맥락의 차이도 있지만, ‘전환동맹’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다음 얘기는 주요섭 님 말씀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데, 전환 담론을 통해서 오히려 지속가능한 개발이나 사회적경제가 점검되어야 된다. 정말 지속가능개발이 지속가능하게 가고 있는지, 사회적경제가 국가가 하기 싫거나 애매한 것들을 좋은 미사여구로 대신 시행하게 하는 데에 결과적으로 공모하고 자족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수량적으로 일자리 창출이나 지역 소득이 얼마나 늘었는지 얘기하지만 거기에서 노동과 생산의 문제,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점검이 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10년~30년 뒤에 그 지역과 지역을 포함하는 경제 ·분배체계가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청사진이 있는지, 그런 것들이 점검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운동 속에서 과감히 탈성장 얘기를 하고 있는가. 대안경제가 탈성장을 염두에 두거나 거기에 우호적이긴 하지만, 탈성장을 지금은 본격적으로 할 얘기가 아니라고 하고 만다면 문제가 있다. 전환의 친구가 많이 만들어지는 것도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한 발짝 더 나간 긴장과 문제제기도 필요하다고 본다.

 

주요섭 > 탈성장도 중요한 담론이지만, 흔히 탈성장을 얘기하면 자꾸 시스템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탈성장적인 삶을 살면 그게 출발이 될 수 있다. 내가 탈성장적 삶과 태도를 가질 수 있는가, 나와 우리 몇 사람들의 공동체, 혹은 어느 지역의 사람들이 탈성장적 지역 경제 모델, 공동체경제 모델을 서로 만들어가겠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시스템 전체, 국민경제 전체를 두고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자꾸 거기에 매어 있기 때문에 탈성장 얘기를 책에서는 하지만 현실에서 말로 꺼내기 어려운 것인데 그 지점이 아쉽다.

 

김성균 >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난 40년 동안 일명 풀뿌리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지역을 장악했는데 , 최근 도시재생 , 사회적경제 , 마을만들기, 농어촌 관련된 활동들, 생협, 도시문화 등 관련 부처들이 다 있다. 그런데 그 맥락을 잘 따져보면 이들이 얘기하는 것은 커뮤니티 중심으로 중간지원조직 만들고 보조금 주는 구조이다. 사회적경제, 마을만들기 하는 사람들도 그 구조에 들어오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국가계획과 정책이 다 하다 보니까 자치단체장이 실질적으로 지역경제에서 할 수 있는 정책이 별로 없다. 그래서 너나없이 마을만들기나 사회적경제를 들고 나오는 현실인데, 이를 재지역화 차원에서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고민이 있다. 내년 총선, 지방선거 때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장이 사회적경제, 마을만들기 제도로 편입하는 상황이 불 보듯 뻔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런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사회적경제나 마을만들기는 다른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전환 , 탈, 재, 연 하기

 

김현우 > 주요섭 님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탈성장할 수 있다고 하셨고, 책에서도 인구의 루트 1%가 바뀐다면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하셨다. 수긍은 하지만, 700명의 간디가 있다 하더라도 이건희 씨가 병상에서 일어나야 삼성반도체 주가가 오르고 국제경쟁력을 회복한다고 생각하는 국민들과 또 그것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국가기구와 관료들을 극복하거나 허물 수 있을 것인가. 한 사람부터 탈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고약하게 얘기하자면 자족적인 게토로 머무는 결과를 만들 우려는 없을지 질문을 드린다.

‘엑소더스’라는 말도 통쾌하게 읽었다. 탈도시 탈학교 탈노동 탈정당 탈종교를 말씀하셨는데, 다만 탈정당에 대해서는 정당정치의 영역을 무조건 ‘탈’ 할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 개념이나 관행까지도 전환하면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닐지. 탈정당이라고 못 박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율배반일 수도 있고 현실적 효과도 반감시키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주요섭 > ‘탈’도 일종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해답이 아니라 수많은 해답이 있고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효모균이 있어야 술을 담글 수 있듯이 그런 ‘촉매’ 역할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위해서는 한 사람, 한 그룹, 마을이나 모임이 중요하다.

탈학교를 얘기했는데, 제 딸들도 학교를 다니고 있다. 그런데 정말 다니기 싫어한다. 안 다니고 싶다는 건 몸은 거기에 있지만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른들이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밖에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나오고 싶은 아이들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탈정당도 마찬가지다. 국민국가를 지탱하고 있는 정치적 의사결정 틀이 정당이고, 정당은 헌법 기관이다. 우리 정치를 만들어 놓은 법적 구조물의 핵심이 정당인 것이다. 긴 호흡으로 보고 국민국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다면 정당이라는 근대적인 정치적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를 안 할 수 없다. 물론 지금 당장 없앨 수는 없고 그게 잘 돼야 하지만 또한 냉정하게 볼 건 봐야 한다. 현재 있는 제도 정치 안에서 해결하려면 들어가서 해야 하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정치질서를 구축하는 효모균을 만드는 역할은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 그런 점들을 구분해서 보았으면 좋겠다.

 

김성균 > ‘탈’은 없애는 게 아니다. 이반 일리치의 탈학교 또한 학교를 없애자는 게 아니라 학교가 갖는 시스템을 없애자는 것이다. 탈성장도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서 ‘세계화’가 등장했고 대한민국의 모든 학자들이 다 세계화를 얘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globalization이 아니라 glocalization이 나왔다. 세계+지역이다. 그런데 그 지역이 천박한 자본주의에 끌려가는 지금 현실에서, 진정하게 아래로부터 형성될 수 있는 지역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서 주체가 누구인가. 제가 결론 부분에 「지역, 국가 넘어서기」라고 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문구를 인용했다. 시민이 운영하는 정치체제를 선택한 게 대한민국이고 민주공화국이다. 그 선택의 주체가 시민이라면, 어떤 시민인가. 풀어서 얘기하면 온전한 시민성이고 그것이 발현되는 것이 커뮤니티다. 그런 관점에서 재지역화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주요섭 > 김현우 님의 ‘정의로운 생태적 전환’이라는 것에 대해서 100% 공감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일반적으로 프랑스혁명의 3대 이념과 가치로 자유 평등 박애를 이야기하는데 ‘정의로운’이라는 게 저에게는 평등으로 읽힌다. 자유의 가치나 박애의 가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그런 관점에서 조명할 수는 없는지 궁금하다.

 

김현우 > 정의가 평등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평등을 하기 위해서도 기계적으로 주어지는 평등이 아니라 질적으로, 연대성과 성찰성에 기반한 평등이라 한다면 자유와 박애도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관계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지속가능성이 무어냐를 점검하고 되물어야 하듯이 정의로운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거꾸로 묻는 성찰이 요구된다.

 

사회 > 김현우 님은 적록연대라고 함으로써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주체 영역으로 조금 구체화시켜서 좁혀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여성운동과 문화운동은 전환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생물학적 남성·여성을 넘어서서 여성성과 남성성이라고 할 때 서구의 생태주의나 동양의 개벽 사상 쪽에서는 공격과 지배, 억압의 남성적 패러다임으로부터 돌봄, 살림, 생명의 여성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주요섭 > 책에서도 음개벽 陰開闢 얘기를 했다. 양의 시대에서 음의 시대로, 무게중심의 이동이라고 생각한다. 성 역할이 짧게는 수백, 길게는 수천 년간 고정되어 온 것인데 그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90:10이거나 99:1인 경우도 있다. 그 균형을 회복하는 데 있어 여성들이 그동안 남성들이 해왔던 몫을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여성들의 고유 영역으로 떠맡겨둔 살림노동, 생활노동 부분, 아이를 키우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부모를 모시는 것들을 남성들이 더 많이 해서 균형을 맞춰가는 게 더 필요하다. 여전히 남성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라든가 질서, 문화, 시스템들이 아주 압도적이지만 거시적으로 흐름이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고, 여성들 입장에서도 그것을 어떻게 고양하고 격려하고 북돋을 것인가의 관점에서 보았으면 좋겠다. 노동도 여성도 마찬가지로 한때 ‘해방’ 자를 붙였다. 해방됨으로써 주체성을 얻을 수 있었다. 노동으로부터, 가부장적 질서로부터 벗어나기를 열망했고, 벗어나야만 내가 설 수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다음 단계로 가려면 노동창조, 여성창조 같은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 단계의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어떤 노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인가,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인가. 여성성을 늘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해방의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이 갖는 고유한 성질, 긍정적인 부분들을 어떻게 살려내고 더욱 진화하게 도와줄 것인가, 이런 관점의 이야기들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

 

김현우 > 큰 차원에서 당연히 적록보연대로 가야 한다. 주요섭 님 책에서 좋았던 것은 노동해방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정작 노동운동은 노동해방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게 제 문제의식 중 하나인데, 노동의 불평등은 성별 분업과도 연관되어 있고, 노동해방은 성별 노동분업의 해방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저런 인식 전환 전에도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보장만 되면 많은 게 해결되거나 잠재된 주제들이 떠오를 것이라고 본다. 기존에 적색/녹색 운동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에 외부적 충격이나 도발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 누구든 자기 안에 적/녹/청/흑색이 다 있다. 그런 욕구는 어떤 양심의 가책일 수도 있겠고, 보수적인 사람이라도 핵 발전 안 하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정몽준 의원도, 핵무기는 필요하지만 울산 가까이 핵발전소는 위험하고 없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것들이 관계성의 인식 속에서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매력적인 적록보 연대의 그림과 활동을 보여주는 게 우리가 가장 주력해야 할 일들이 아닌가 한다. 물론 좋은 말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충격과 강제가 필요하다. 정의로운 전환 프로그램도 하나의 대안일 뿐인데, 그런 여러 다양한 대안들이 차고 넘쳤을 때 어떤 계기들이 주어지면서 더 큰 변화가 도모되는 것이라 본다.

 

사회 > 한편으로 ‘전환은 ‘선’인가?’라는 질문도 하게 된다. 또한 국가와 시장이라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이는 것에서도 전환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끊임없이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상황 속에 전환을 어떻게 이끌어내야 할까. 그 과정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김현우 님 책에서는 그 과정에서 사회적/생태적/미래세대 약자에게 피해와 충격과 부담을 최소화하는 전환이 정의롭다고 이해했다. 기득권을 스스로 내려놓으면서 전환이 이루어지면 가장 좋겠지만, 가능하지 않다면 전환의 이행 과정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지.

 

김현우 > 예컨대 생태파시즘이라는 얘기도 있고, 기후변화 문제도 생태적 감수성을 가진 독재자가 에너지 절약하고 산업을 바꾸면 해결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최근 중국 같은 경우에는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동원 위주의 조직과도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최선이거나 유일하게 선호할 만한 답인가? 우리는 중국식으로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조건이 있고. 미국의 경우 월마트에서 뜯지도 않은 음식을 버리고 그 음식만 거두어도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생활방식을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하는데 그것까지 인정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나 수단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에서 어떤 주체들이 형성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한국의 전력 정책을 전환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정부와 열심히 싸우고 또 로비해서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잘 바꿔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너지 시민’도 중요하다. 송전선로 문제도, 전기가 만들어져서 우리한테 오는 데까지 어떤 노동과 산업과 관계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설계하고 만드는 과정의 민주노총 조합원들, 원자력 연료 노동자들, 송배전하는 한전 노동자들, 그걸 관리하고 고지서 발행하는 공무원들, 사회복지사들, 플러그 꽂아서 전기를 쓰는 우리들까지 다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가상의 테이블에 모일 수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전력을 핵발전 의존으로 중앙집중적으로 하는 게 유일한 답인가 하는 것을 얘기 나눌 수 있다면, 안 그럴 수 있고 안 그랬으면 좋겠다는 애기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정치권의 누군가 더 좋은 전력 정책으로 바꾼다 하더라도, 이런 시민들의 관계가 있어서 바뀌는 것과 없는 채로 바뀌는 것은 의미가 다를 것이다. 이것은 전력뿐 아니라 먹거리, 주택, 교통 정책 등 어떤 것이든 바꾸어내는 징검다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주요섭 > 전환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다. 지금 여기서 내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내 삶이 피폐하고 내 영혼이 갈증을 느낄 때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맹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컨대 귀농 ·귀촌을 결정하는 순간에 거기서 살고 싶은 사람들과의 관계망이 만들어진다. 오래 전에 송희식 변호사라는 분이 연대사회라는 개념으로 대안적 사회의 틀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데, 각자가 주체, 주인공이 돼서 각자의 열망에 의해서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공동의 목적을 서로 알고 같이 만나는 그런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겠다. 그것을 ‘새로운 공동체’로 표현하고 싶다. ‘재再’에도 again과 new의 의미가 같이 있다. 옛날 것을 복원(회복)해야 하는 측면과 함께 새로운 차원으로 만들어야 하는 측면이다. 단, 그것을 먼 훗날 따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 자체에서 즐겁고 행복하면 이미 새로움은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사회 전체의 시스템으로 만들고 국민국가에서 더 나아가 세계공화국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만으로 안 될 것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런 과정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가면 좋겠단 생각이다.

 

김성균 > <transition 2.0>이라는 영상을 보면 두 분 말씀하신 로드맵이 있다. 전체 16개의 전환운동을 하는 마을 사례를 소개하면서 크게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친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신뢰, 그 다음부터는 외부 자원을 끌고 들어오는 것, 마지막에는 그것으로 이 동네에서 어떻게 뿌리박고 살 것인지의 프로세스로 정리했다. 이 하나의 결을 저는 ‘사회화’ (socialization)로 표현한다. 한국 사회는 제도부터 만들고 사회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학계에서도 의제를 정해놓고 제도와 정책을 얘기한다. 그런데 그 전에 기반이 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꿰뚫어 보고 나서 제도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

 

사회 > 전환이라는 말 자체가 워낙 거시적이고 차원이 다양한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전환의 실마리는 말을 거는 데서부터라고 보인다. 오늘 이 자리가 그 시작이라고 보인다. ‘전환’이 다른 선택이라고 했을 때, 우리 삶의 선택으로부터 전환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세 분 말씀 감사드린다.

 

 

* 『모심과 살림』 5호(2015년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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