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모심의눈 모심과 살림 읽기

모심과 살림 읽기

게시글 검색
[6호] 전환도시를 꿈꾸다
2017-02-01 15:53:00

전환도시를 꿈꾸다

- 살림과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회적 기획으로서의 문화

 

임정희 (문화연대 공동대표, 연세대 인문예술대 겸임교수)

 

 

 

 

‘디지털 현대’에 요구되는 예술과 삶의 결합

 

최근에 ‘예술이 그 자체의 목적, 전문성, 그리고 논리가 있는 자율적인 문화의 한 분야 또는 제도라는 생각은 서양 근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비판과 함께, ‘삶의 예술’,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서의 문화’, ‘자기 배려의 테크놀로지로서의 예술’, ‘자기실현의 잠재력’, 또는 ‘자기표현’, ‘존재미학’ 등과 같은 개념어들이 예술 담론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의 결합을 이야기하는 이런 개념들은 전통적으로 구별되어 온 학문적(진, 진리 규명), 도덕적(선, 행동 원리), 미적(미, 표현과 만족) 가치 영역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윤리적이면서도 미적인 이상’, 즉 즐겁거나 아름다운 것이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알맞거나 적절한 것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한 관심은 근대미학이 분리시킨 미적 감정과 공동선의 관계를 애초에 그것들이 맺은 비분리적 관계로 회복하려는 다양한 문화실천들(살림문화) 속에서 확실히 증폭되고 있다.

 

‘삶을 위한 예술’이 행해지던 전통사회와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예술의 전문화와 삶과의 무관계성이 주장되어 ‘예술을 위한 예술’이 당연시되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 무관해진 예술, 예술의 특별함만이 예술의 존재 이유가 된 예술, 초월적 의미의 언어적 기호라는 특정 범주가 된 예술, 미적 탐구와 미적 경험을 위한 독자적인 세계가 된 예술작품 등. 이러한 생각들은 예술가와 저자에 몰두했던 19세기, 작품과 텍스트에 열중했던 모더니즘의 20세기, 비평가와 독자에 집중해 온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더욱 강고해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예술에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분리와 개별성의 강조로부터 삶과 직접 관계가 있는 쟁점에 대한 소통과 대화, 공동체의 강조로 눈을 돌리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예술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이고 선천적 욕구라는 이야기, 그리고 모든 사회, 모든 계층에 존재하는 예술적 행위들이 개인의 삶과 공동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왔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리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무엇을 의미할까? 디지털현대의 우리 현실이 ‘삶과 예술의 결합’을 통해 파편화되고 훼손되고 결핍된 삶과 예술로부터 보다 인간적인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인가? 즉 공동체의 중요한 믿음과 진리를 감정적으로 깊숙이 침투시켜 결속을 강화하는 미적 경험의 중요한 기회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졌다는 것일까? 아니면 예술의 전통적인 후광을 뒷배 삼아 예술품 경매장에서 탐나는 투자상품으로 전락한 고급예술에게 내민 강요된 화해에 불과한 것일까?

 

‘디지털현대’의 시기에 예술을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하여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 난해하고 복잡한 것 못지않게 사소하고 단순한 것을 진지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예술과의 아주 오래된 친밀성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현저히 늘고 있다. 많은 시민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와의 관계 또한 변화되고 있다. 예술가들이 관계변화를 먼저 경험하고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추정일 것이다. 도시적 공간에 대한 지각력을 높이고, 한시성의 매력에 대해 주목하도록 하고, 스스로 행동하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프로젝트, 이벤트, 혁신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었고 현재에도 진행 중이지만, 그것들이 예술가들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속단이다. 오히려 오래된 삶을 재발견하고 재구축하려는 문화행동(cultural action) 또는 예술행동-이들은 대부분 대문자 R로 쓰여지는 리사이클링Recycling, 재연(Reenactment), 재생산(Reproduction), 그리고 회복(Reprise), 리믹스Remix, 추출(Ripping), 리메이크Remake에 기초하여 예술을 업데이트의 한 방식으로 이해한다-은 전체적인 사회적 가치의 전환에 따른 단면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술을 인간이 자신의 삶의 질에 마음과 생각을 기울이며 살 수 있는 권리와 정당성을 행사하는 행위로서 폭넓게 이해하고, 예술을 삶과 분리시키지 않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펼쳐 보이면서 삶 디자인, 커뮤니티 예술, 공공예술, 거리예술, 생태예술, 일상예술, 치유예술 등으로도 불리는 문화현장들을 들여다보고, ‘삶과 예술의 결합’, ‘사회적 공통성의 형성’ 이라는 요구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보자.

 

 

‘도시’로 귀환하는 삶 : 공공성과 개방성의 욕구를 드러낸 도시문화

 

대체 주차미터기는 왜 갑자기 뜨개 모자를 쓰게 되었을까? 옥외 광고기둥을 두른 목도리는 무엇에 필요한 것일까? 버스정거장에 매달려 왔다갔다 흔들거리는 저 빨간색 그네도 수상쩍다. 자동차소음이 가득한 로터리 한복판의 교통섬에 놓인 나무팔레트로 만들어진 소파 두 개도 마찬가지다. 조만간 그 옆에는 버려진 타이어들이 자리를 잡을지도 모른다. 건너편의 보도에는 이미 타이어 몇 개가 부엽토로 채워진 채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배추가 순진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이 강한 의구심을 불러오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하게 그 옆을 지나칠 수도 있고, 다음날이면 환경미화원들에 의해 치워져 소파며 그네도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가능성도 크다. 기둥을 감싼 목도리와 주차미터기의 뜨개 모자도 사라지고, 배추도 뽑혀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대로일 것이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완벽할 만큼 금욕적으로 지어진 철과 돌의 도시는 겉으로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보도 옆 채소 텃밭이나 손으로 직접 만든 도시 가구들, 그리고 초현실주의적 느낌이 드는 사족 같은 것들에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어서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이것을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표식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들은 활기가 사라진 도시 공간에 어떤 전환을, 도시성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다.

 

도시 안에서 쫓겨난 지 오래되었다고들 하는 ‘삶’이 힘차게 돌아오고 있다. 보행로, 광장, 사거리, 주차장 위로, 심지어 고가도로 아래까지 점령하고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귀환이기도 하고, 이 모든 것이 착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어 온 도시문화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사회는 더 이상 이전 모습의 사회가 아니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시는 살아있으며,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도시에서의 삶, 도시생활은 너무 경직되고 기능화되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는 오래 전에 포기되었다. 최소한 1960년대부터 서구에서는 단물 빠지고 너덜너덜해져 비참하게 버려진 도시로만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렸다. 영향력 있는 도시계획이론가였던 존 프리드먼John Friedmann은 2002년 “도시는 죽었다(The city is dead)”라고 함으로써 그동안의 수많은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들이 행한 도시의 쇠퇴에 대한 연구들을 단 한 번에 정리해 버렸다. 연구보고서들은 도심의 황폐화를 고발하고 빈곤화를 경고했으며, 분절과 파편화, 복합성의 해체, 그리고 공공공간의 사유화에 대해 경고했다. 리처드 세넷이나 렘 콜하스와 같은 저명한 인사들이 써나간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은 단지 사회적이고 미적인 차원에서의 침식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거대한 이상의 종말, 즉 자유의 땅으로서의 도시, 그 도시의 종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시에서야말로 인간은 자연에 종속되어 있던 상태를 넘어서서 오늘날의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들 한다. 모든 사회적 혁신과 변화들도 도시 공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모든 유행, 스타일, 삶의 방식들. 도시 없이는 ‘근대’를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한다. 도시에서 비로소 자유로운 ‘주체’가 세상을 발견했으며, 마침내 개인의 가치가 전체만큼이나 높게 인정되는, 새로운 민주적 형태의 공공성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많은 이론가들에게 사고와 경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도시가 위기를 맞았다는 것은 마치 문명의 위기와도 같았다.

 

물론 그들의 종말론적 경고에는 탄탄한 근거들이 있었고, 그것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러 도시에서는 권력을 잡은 쇼핑몰 업체들이 한때는 모두의 공공장소였던 땅을 차지하고서 그 땅을 그들의 룰에 따라 움직이는 소비 공간들로 탈바꿈시킨다. 지자체들도 똑같이 그 모델을 따라 도로와 광장들을 반사유적인 사무지역으로 운영되도록 하거나, 공공건물들을 최고낙찰가에 팔아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밖에도 늘어나는 감시용 카메라의 수, 게이티드커뮤니티Gated Community(출입이 제한된 폐쇄적인 주거-생활구역)에 대한 선호도 증가를 의심스런 눈초리로 지켜보아야 한다. 공공장소들이 이전보다 점점 더 조직적으로 통제되고 엄격하게 제한되며 사적인 의도에 지배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급속히 늘고 있는 초대형 광고판들도 중요한 도시 위기의 증표들 중 하나이다.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이 급부상할 것으로 예측하였던 포스트어바니즘Posturbanism1)도 들어맞지 않았다. 이미 2008년부터 전 지구적 규모에서 도시 인구는 그 외 지역에 사는 인구를 추월해버렸으니 말이다. 북반구에 위치하고 있는 다수의 선진국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19세기 산업화에 의해 대도시로 몸집을 불린 고밀도 도시들은 20세기에 들어서 도시의 형태와 윤곽, 의사결정 체계며 공유상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점에서 실패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산업시대가 점점 끝을 향해 가고 디지털모던 사회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지만 포스트어바니즘의 예상과는 달리, 도시의 치열함과 집약적 밀도에 대한 갈망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커져만 가는 듯하다.

 

21세기에 도시성, 도시의 매력은 다시 열망할 만한 가치로 부상하고 있다. 사실 정확히 어떤 것을 열망하는 것인가 정의되지 않은 경우들이 많기는 하지만, 모호하게 정의하자면 현재의 시점을 사는 삶, 가능성으로 가득하며 흥미로운 삶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예를 들어 닥치는 대로 손을 뻗으려는 사유화의 움직임에 맞서는 공공성과 개방성의 욕구가 그러하다.

 

열려 있는, 정의되지 않은 도시 안의 공간들은 이전과는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에는 자아실현을 하는 데 도시의 체계가 아주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던 디지털모더니즘의 ‘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도시적 공공 공간을 요구하고 개방된 도로와 광장에서 만들어지고 결집될 수 있는 집합적인 자아인 ‘우리’가 있다.

 

현대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는 도시 공간을 두 그룹으로 구분했는데, ‘외곬 공간’과 ‘열린 공간’이 그것이다. ‘외곬 공간’은 교외주거지, 주택단지, 업무지구, 공장지구, 주차구역, 지하도, 쇼핑몰, 환상도로, 자동차처럼 단일 기능으로 채워진 공간 개념을 일컫는데, 주로 도시계획가나 개발업자들의 결정에 따르는 공간이다. 반면 ‘열린 공간’은 분주한 광장, 활기찬 거리, 전통시장, 공원, 노상 카페, 쌈지 공원처럼 다기능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외곬 공간’이 사적인 소비와 자율성의 욕구를 효율적으로 채워준다면, ‘열린 공간’은 공동의 가치를 제공하면서 다양한 사회 계층을 하나로 묶어 관용, 자각, 동일성, 상호존중의 감각을 키워준다고 한다. ‘외곬 공간’이 디지털 모더니즘의 ‘나’를 자라게 한다면, ‘열린 공간’은 집합적인 자아인 ‘우리’를 자라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최근까지 ‘외곬 공간’이 ‘열린 공간’을 잠식해 들어가, 타인들의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참여와 개입을 허용하는 ‘열린 공간’이 무시되거나 사라져 왔다. 21세기 여러 도시에서는 바로 이 ‘열린 공간’, 또는 공공 공간을 함께 만들어 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우리’의 공통성(commonality)이 열망할 가치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도시의 활력을 깨우는 ‘아래로부터의 어바니즘’의 한 예로서 문화행동(cultural action) 또는 예술행동에 주목하려고 한다. 시민들이 어떻게 공공공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 그 공간들을 변화시켜 나가는지, 극도의 개인주의 시대에 공공공간들은 어떻게 개인들의 경험이 공유되고 함께 공감각력을 키우는 장소로 변모되고 있는지, 그리고 다중적 관심사들이 결집하고 새로운 무게감을 갖는 포럼이 되고 있는지. 어떻게 그 공공공간, 공유 장소에서 분리와 개별성 대신에 소통과 공동체의 감각을 키우게 되는지.

 

 

도시 공공공간에서의 문화행동 :

‘나’의 무력감을 넘어 ‘우리’의 공동감을 열망하다

 

아래로부터의 어바니즘을 특히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는 2010년과 2011년 북아프리카의 시민들이 저항과 정권 교체를 외치고, 동시다발적으로 혁명을 시도하고,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같은 장소들이 인터넷 사회 연결망의 열띤 조력을 받아 평화로운 재시작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던 일이다. 이와 거의 동시에 뉴욕, 마드리드,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여러 다른 대도시들에서도 포괄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최근의 대규모 홍콩 시위까지. 그중 많은 집회는 ‘오큐파이Occupy(점거하라)’라는 기치 아래 결성되었으며 공공장소는 필수적인 요소로 대두되었다. 시위참여자들은 추상적이고 비물리적인 금융경제에 맞서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시위임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안락한 고립을 취한 1%에 대항하여 가려지고 무시되는 99%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공원의 딱딱한 보도블록 위에 텐트를 쳤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오큐파이 운동 자체도 바로 그 정보자본주의와 컴퓨터를 기본으로 하여 주식시장의 투기를 가능하게 만든 시스템과 데이터망 덕을 보고 있다. 인터넷 없이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처럼 공유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플랫폼 없이는, 시위들이 그렇게 급속도로 강화되고 서로를 연대하고 지지해주며 공고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세계화가 경제에 이어 대중문화비평에도 진입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가이포크스 가면’이나 ‘이글루 텐트’와 같이 각각의 떨어진 시위 장소에서 공유되는 문화적 상징체계까지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모든 시위참여자들이 하나같이 공공장소가 집회에 필수적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많은 사회학자들이나 도시연구자들은 오랫동안 그 어떤 형태의 공공적인 시위나 토론이 모두 온라인상의 포럼이나 채팅방, 블로그 들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사이버마을과 스마트시티, 텔레토피아 같은 개념들이 약속되는 시대에는 더 이상 개별적인 장소들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혹자들이 확고하게 믿었던 이 같은 미래 비전 중에서 현재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인터넷은 강력해졌지만 결코 전능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도시 공간들은 여전히 대체될 수 없는 가치들을 보유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오큐파이와 같은 대규모 운동들, ‘아랍의 봄’과 같은 변혁, 그리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기차역 건설에 반대한 시민운동과 터키 이스탄불의 탁심 게지 공원을 쇼핑몰로 재개발하려는 계획에 반대해 대대적으로 일어난 시민운동처럼, 도시 내 거대 프로젝트에 반발하는 시민운동들을 위해서는 광장, 공원 같은 도시 공간이 필수적이었다. 아마도 저항운동은 땅에 발을 디딘 현실성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불꽃이 일고 미디어적 효과로 드러나며, 그곳에서야 비로소 인터넷상에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개개인이 피부로 느끼게 된다.

 

도시는 그렇게 경제적인 세계화와 문화적인 세계화의 혜택을 누린다. 국가의 의미가 19세기에 생겨났을 때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동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에서 굽어볼 수 있고 개입해 디자인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들을 모아 로컬한 자기 지역에서 기후변화와 같은 글로벌한 이슈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도모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팽배한 거대 자본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무기력감을 이겨내려고 한다. 많은 이들은 2005년 영국의 롭 홉킨스에 의해 시작된 전환마을 운동에 합류해 다른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자신들의 도시를 석유로부터 독립시키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공유지에 호두나무를 심고 도시정원을 만들어 공동 경작하고, 어떤 이들은 근거리 교통수단을 다양화시키는 자전거 릭샤를 제작하며, 또 다른 이들은 흙과 짚을 이용한 건축을 실험하거나 시민태양발전소를 설치할 수 있는 지붕을 설계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터넷을 통해 참여자들 간에 교류되어 참여자들은 서로 이어져있음을 확인하고 새로운 자극들을 상호 지원한다. 공동체들도 풍부한 창조력과 문화행동에 힘입어 전환마을로서 자신들을 공표하는 데 이미 450곳이 참여하고 있다.

 

도시가 분노, 반발, 이견 그리고 변화 의지가 표출되고 표현되는 자리를 제공하는 한에서, 도시는 아직도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위대한 이상향을 믿지는 않더라도 현재를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도시 공간은 실험실과 연구소가 되고 있다. 주거 문제든, 이타주의, 교통 문제, 일자리, 미의식 혹은 집합적 기억이든 모든 사회적 관심사와 질문들이 도시의 이름 아래 다루어질 수 있다. 도시는 중요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사고해 볼 수 있는 장소로서도 유효해 보인다. 도시의 매력은 갈망하는 새로운 시작점을 위한 논란의 중심에 있다는 점이고, 다양하게 분화된 활동과 기능들(예컨대 전시회와 시위, 술집과 학술토론장, 오페라하우스와 벼룩시장 등)을 배제와 격리 대신에 뒤섞어서 공동성과 익명성, 익숙함과 놀라움, 안전함과 위험스러운 흥미, 일터와 상점과 집의 공존을 도시 생활의 풍부한 다양성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점이다. 치장된 전문 공간과 꾸밈없는 노천카페의 일상공간이, 그리고 분화된 장르예술과 통합적인 생활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문화에서야 비로소 ‘도시’와 ‘삶의 질’을 양립시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의 복원 : 관계의 생성과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기

 

도시의 공공 공간이 저항과 정치적 재편을 위한 장소가 되어줄 수 있으며, 여러 미디어에 의해 이용당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은, 한 측면에 불과하다. 사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도시가 풍요로운 일상을 상상하게 하고,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장소로 드러남으로써 일상생활이 새로운 의미로 재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쇼핑이야말로 최후로 남아있는 공공활동이 될 것”이라고 했던 건축가 렘 콜하스, “이미지와 기호로 주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모든 가치의 구별은 사라지고 우리는 실재에 도달하거나 들어갈 수 없다”는 철학자 보들리야르와 같은 이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쇼핑에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놀이방식에 매료되고 있으며, 무한 복제에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소비로 충족되는 삶 대신에 생활기술을 공유하면서 협력과 협동에 기댄 제작활동을 공동 작업장(도시농업, 도시정원, 리싸이클링 또는 업싸이클링 작업장, 수리 작업장, 공유기술 랩, 야외공원 등)에서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베를린 공항공원

 

플래시몹이나 스마트몹 같은 경우, 인터넷이나 메신저로 연락해 요상한 짧은 이벤트를 도모한다. 뮌헨 중국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폴카댄스, 쾰른의 광장에서 깃털 휘날리도록 벌어진 베개싸움이 그러하다. 게릴라뜨개질(‘양털폭격’으로도 불리운다)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주차미터기, 다리난간, 교통표지판과 같은 거칠고 차가운 도시의 형체에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두 번째 외피를 제공한다. 직접 제작한 의자와 벤치를 공공공간에 배치하는 행위는 미국에서 체어봄빙(‘의자폭격’)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플랭킹도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는데, 다리 위 난간이나 지하철계단 같은 곳에서 아슬아슬하게 규형을 잡고 길게 누운 모습의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이다. 대체로 도시의 공공공간들은 모험의 장소로서 경험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애드버스팅Adbusting(소비를 유혹하는 광고플랭카드들을 훼손하는 활동)이든, 덤스터-다이빙Dumpster-Diving(유통기한이 지나 마트에서 버려졌지만 아직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는 활동)이든, 도시의 공공공간을 모두에게 공유되고, 모두가 참여해 만들어나가는 ‘사회적 일상 공간’으로서 인식하고 있는 문화행동들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도로 위에 흰색 페인트로 횡단보도를 그리는 게릴라횡단보도(Guerilla-Crosswalks), 인터넷에 띄워진 표지판을 가로등에 박스테이프로 부착시키는 게릴라길찾기(Guerilla-Wayfinding), 버스정거장이나 그 외의 장소에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겨냥해 그네를 매달아놓는 게릴라그네(Guerilla-Swings),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여러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특정 지하철 한 칸을 점거해 그곳에 파티를 열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는 공간납치범(Space-Hijackers), 낙후된 지역의 야생 잡초들을 스프레이로 색칠해 미적인 효과를 내거나 방치되는 현상을 고발하는 잡초폭격(Weed-Bombing), 허가되지 않은 포스터나 스티커를 통해 저항하도록 종용하는 그래픽전투(Graphic-Warfare), 그리고 씨앗폭탄을 투척해 차가운 도로변에 한두 개의 꽃이 피어나도록 하는 게릴라가드닝(Guerilla-Gardening)의 문화행동은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 ‘게릴라’라는 군사적 어휘는 실제로 습격이나 점거 의도로 사용한다기보다 위장술로 이용한다는 데에 가깝다. 특히 문화적이거나 사회적인 목적을 가지는 이들에게 ‘게릴라’라는 단어는 그들 행위의 자립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인다. 그들은 정부와 관계되어 조종되지 않으며, 재정적인 이해관계에 의해서 휘둘리지 않고, 열린 공간에서 행동하는 데 있어 자유롭다. 물론 형법적으로 고소당할 만한 일들을 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금지된 일을 한다는 스릴감도 어느 정도는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간혹 70, 80년대의 비어있는 건물 또는 공간을 점거하는 스쾃운동이나 즉흥적인 성격을 강조했던 슈폰티운동의 전통을 따라 기존 시스템에 이데올로기적으로, 혹은 폭력적이기도 한 방식으로 대항하려는 정치적 운동가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어바니즘에 환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호기심과 견문으로 바라보며, 도시의 공간을 확정되고 형태가 고정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도시에 놀이적이고 구축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며 자신들에게 맞추어 도시 공간을 변형시키고, 더 발전시켜나가고, 새로 정의하려고 한다. 도시를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도록 제공하기 위해서.

 

양털폭탄으로 씌워진 전쟁무기 (드레스덴, 독일)

 

베를린 시내 시민들이 만든 도시정원

 

독일, 브라운슈바익의 공공벽화

 

이 변화되는 협력적 공간관의 성격을 정의하기 위한 여러 서로 다른 개념들이 통용되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전략적인 어바니즘(tactical urbanism)을, 다른 이들은 DIY-어바니즘(Do-It-Yourself-urbanism)을 사용한다. 팝업-어바니즘Pop-up-urbanism이나 LQC-어바니즘(‘더 가벼운(Lighter), 빠른(Quicker), 저렴한(Cheaper)’의 약자)과 같은 개념들은 새로운 문화의 특성이 근본적인 전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영향력을 미치고자 함을 짚어낸다. 어느 것도 지속적이지 않고, 모든 것은 유동적이라는 교의가 여기서도 보인다. 어떤 것을 확정짓거나 교착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한 해 여름 동안 마대자루나 쓰임이 없어져버린 통에 텃밭을 일구고는 다음 해 다시금 이동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런 형태의 공간사용은 일부 중산층 젊은이들의 유행현상이나 취미생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비전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인 변화가 뒷받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측불가능하고 외부적인 제약이 없는 개방성과 자유로운 공간점유의 원칙은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새로운 도시 계획의 비전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조용한 무정부주의가 사람들, 특히 젊은 층을 사로잡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흉물스럽다고들 하는 주차장 건물을 신체적 기예를 실행하는 장소로 활용하고(파쿠르Parcour), 포장된 도로 가장자리를 작은 화단으로 꾸며놓으며(게릴라가드닝Guerilla-Gardening), 거리의 배전박스를 예술작품으로 둔갑시키고(거리예술, Streetart), 버려진 도시공터를 새로운 파티장소로 불러낸다(아웃도어 클러빙Outdoor-clubbing). 그리고 여기서도 또 다시 인터넷과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촉매제 역할을 한다. 온라인상에는 필요한 정보들이 주어지며, 그동안 우려되었던 도시의 익명성을 탈피한다. 참여적 어바니즘의 문화라고 할 수 있고, 창의적 어바니즘, 혹은 웰빙 어바니즘의 문화라고도 일컬을 수 있다.

 

마치 사회가 다양화된 것처럼 거리와 광장에는 굉장히 다양한 형태와 기능의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도시가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도시는 서로 상충되는 요구에 개방되어 있는 가능성의 공간인 것이다. 무수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도시성에 열광하는 이유는 공동의 필요에서 생겨난다. 관계의 생성 혹은 재생성, 그리고 새로운 방식의 관계맺기를 공통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공유공간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대한 유일하게 적합한 대답인지 모른다. 그곳에서 대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정신이 자라나고 서로간의 상호의존성이 모두에게 와 닿는다. 공간은 개인의 지각을 요구하지만, 실질적인 상호관계에 의해서만이 도시성의 특징인 긴장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도시를 도시로 만드는 것은 바로 개방된, 그리고 공유되는 공간에서의 관계적 경험이다.

 

전환의 흐름 속에서 만나게 되는 ‘우리 시민이 도시다!’, ‘삶이 예술이다’라는 구호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인식을 표현한다. 디지털의 한시적이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현재 시점에서, 인터넷과는 다른 방식으로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있는 특별한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은 바람일 뿐이다. 현실공간은 보통 가상공간의 반대 극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모니터 너머의 세상에서 스쳐 지나갈 뿐인 것들이더라도 현실공간에서는 만지고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디지털기술이 없었다면 도시 생활의 새로운 활력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의 섬을 꿈꾸고 그 섬을 도시 안에서 발견하고 싶어 하는 바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사실 이미 예전에 디지털 세계와 아날로그 세계 간의 이분화는 사라졌다.

 

대부분 사람들의 일상적 삶은 양단에 걸쳐 있다. 스마트폰이 모두에게 인터넷을 호주머니에 들고 다닐 수 있게 해준 이후, 가상은 공공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사고 혹은 행동방식에도 경계가 없어졌다. 인터넷은 공공공간에서의 태도를 지배하고 있다. 남의 일에 참견하려고 하고, 남들과 짧은 시간 안에 교류하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려는 의지, 여기서 무언가 변화시키고 저기서 무언가를 고쳐나갈 수 있다는 경험, 자신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이고자 하는 욕구, 그 모든 것이 상호교류적인 인터넷 문화를 반영한다. 그리고 도시의 증가하는 다양성은 디지털모던의 그런 점들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집안을 나서지 않고도 단추 하나만 누르고 데이터를 전송하는 것만으로 모든 욕구를 해결할 수 있어 모든 도시적인 것을 흡수해 버릴 것이라던 바로 그 기술이 또 다른 차원에서는 시민들의 문화적 역량이 되어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도시적 삶을 강화해준다.

 

앞서 말한 변화들이 얼마나 깊이 침투하고 영향을 미칠 것인지, 도시의 조건을 지속적으로 형성할 수 있을 것인지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도시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음에도 계속해서 사람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것은 도시가 가지는 수수께끼이다. 도시-기계를 막힘없이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규제와 규칙, 계획이 존재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어떤 동네가 얼마나 활기차고 매력적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기능적인 부분이 아니다. 도시의 활력은 강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건축이 얼마나 정성들여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많은 벤치와 잔디밭, 야외공연장과 전시장이 계획가들에 의해 세련되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조명디자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와는 관계가 없다.

 

도시의 활력은 규정되어지지 않은 것으로부터 자라나며, 긴장과 이완의 어지러운 상호작용으로부터, 익숙한 것과 비일상적인 것의 긴장으로부터, 통제되는 공간들과 통제되지 않는 공간들, 자유로운 광장과 쓰임이 설계된 광장, 부자이기도 가난하기도 하고 이주해오기도 하고 토박이이기도 한 주민들의 뒤섞임으로부터 생겨난다. 바로 그런 미리 계획되지 못하는 균형에 의해 도시는 단지 여러 건물과 시설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도시의 매력과 활력, 도시의 공동성이라고 부르는 ‘사회적인 팀워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관료적인 눈으로는 또는 전문가의 눈으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로 그곳에서 생각보다 자주, 새로운 것이 태동하곤 한다.

 

‘디지털현대’의 도시가 개념적이고 논증적이며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공공성을 재생시키는 ‘전환도시’로의 구조적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너무나 많은 것이 아직 생겨나고 변화해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결론적인 명제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어떤 것은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은 호기심에 가득 찬 즐거운 탐구정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여러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환도시를 향한 문화행동, 또는 문화적 행동주의의 실천 사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방식의 참여를 실험하기 위해, 새로운 사회 영역에 진입하고 타성에 젖은 익숙함에 균열을 낼 의지를 키우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 모심과 살림 6호(2015)에 실린 글입니다.

 

 

댓글[0]

열기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