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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새로운 미래를 위한 한살림 30년을 돌아보며
2017-02-01 18:32:00

새로운 미래를 위한 한살림 30년을 돌아보며

 

김성희 (한살림연합 기획홍보부문 상무)

 

 

 

결혼 연령이 늦춰지고 비혼자도 늘고 있지만 대개 서른 살 전후면 부모로부터 독립해 자기 살림을 꾸려나간다. 한살림이 올해 서른 살이다. 이제까지 익숙했던 것들과는 사뭇 다른 미래를 향해 또 다시 낯선 길로 나서야 할 것이다. 3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들이 준비되고 있고, 미래를 향한 새 비전을 수립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30년을 진단하고 새 비전을 제시하는 본격적인 글들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정체성을 토론한다?

 

나는 다른 시민단체에서 일하다가 2004년 9월 모심과살림연구소에 출근하면서 한살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첫 출근 다음날, ‘정체성 토론’을 한다고 해 영문도 모르고 북한산 아래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로 갔다. 이제는 돌아가신 박재일 회장님, 당시 직책으로 한살림서울 이상국 전무와 이남선 상무 등 주로 실무자들이 참석해 관련 정세와 시장동향을 분석하고 한살림운동의 이념과 사업을 진단하며 대응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새로운 단체에 출근해 긴장해 있던 나에게는 한살림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한 에너지를 쏟으며 토론하는 풍경이 조금 의외였다. 정체성, 남과 구분되는 나만의 고유한 성질을 말할 텐데, ‘전략기획회의’ 같은 실용적인 내용이 아니라 ‘정체성 토론이라니’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시민단체들은 운영경비를 마련하고 조직을 안정시키는 일에 늘 숨이 가빴다. 언론의 조명을 받아도 집회나 행사에 단 몇백 명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한살림은 생산자 회원들의 물품으로 매일의 밥상을 차릴 수 있을 만큼 자립적이고 생활에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날도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제철이라 충북 영동에서 온 포도와 청암농산에서 온 사과즙, 우리밀제과의 빵 같은 간식들이 준비돼 있었다. 2kg들이 포도를 상자째 테이블 위에 놓고 아무 경계심 없이 씻지도 않은 포도를 꺼내 먹던 광경, 이 모두가 한살림이 다른 사회운동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한살림의 리더들은 스스로의 정체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2004년 당시, 조직과 사업규모가 급격하게 팽창하는 시점이었기에 그런 논의가 절실했던 것 같다. 사실 요즘도 한살림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하는 일이 분명하고 추구하는 바가 분명한데도 무엇인가 스스로에 대한 정돈과 합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살림은 가치지향이 분명한 운동을 하고 있지만 때로는 시장에서 경쟁하며 사업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한쪽에서는 ‘운동단체다운 철학이 조직운영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기업들에 비하면 너무 순진하고 미숙하다’는 지적도 한다.

 

그날 ‘정체성 토론’에서 박재일 선생이 “한살림은 상호이면서 지향이었다”고 한 말씀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한살림이 가치 실현을 위한 (생명)운동을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직거래)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였으리라.

 

한살림농산이 문을 연 1986년 12월은 1987년 6월 항쟁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 19 70년대에 정농회 등 유기농운동이 있었지만 , 한살림은 보다 큰 포부와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차원의 운동을 시작했다.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연 박재일 선생은 4.19혁명을 뒤엎고 등장한 군부독재에 치열하게 맞섰던 학생운동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1968년 원주로 이주해 근 20년 가까이 지학순 주교, 장일순 선생 등과 함께 ‘사회개발위원회’ 등을 통해 민중들의 삶과 사회를 바꾸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의 경험이 한살림에 자양이 된 것은 물론이다.

 

원주의 운동가들은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섰지만, 독재 권력을 쓰러뜨린다고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모순이 해결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치권력이 우리 사회를 좌지우지 하는 것 같아도 세상의 주인은 민중들이며 사회를 지탱하는 것 역시 우리 개인들이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선배운동가들이 주인 된 자세로 미래를 모색한 점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며 동서양의 새로운 사회 이론과 철학, 사회운동의 흐름을 섭렵하고, 일본과 대만의 생협, 유기농업운동단체들을 방문하기도 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늘 반복되는 자잘한 일상의 일들을 가리키는 ‘살림’이란 말을 장일순 선생과 그 제자들은 낯설게 조명해 철학적인 개념으로 제시했다. 살림은 자연을 수탈하며 이기심을 채우는 데 급급하던 현대 문명을 성찰하는 어휘가 되었고, 누구나 하는 보잘 것 없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온 세상과 어우러지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 앞에 ‘한’이라는 말이 붙으면서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었다. 제기동에 문을 연 한살림농산 간판에 처음으로 한살림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돌아가신 박재일 선생이 쌀가게를 준비하며 분주하던 그즈음 전철 1호선 안에서 그 표현을 떠올렸다고 했다.

 

 

한살림의 등장과 성장,

원칙을 지키며 변화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업의 규모나 조직의 팽창 속도만 놓고 본다면 한살림은 여느 성공한 기업의 성장신화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회원(조합원)은 19 86년 40 0여 명으로 시작해 5년 만에 1만 세대가 넘었고, 다시 5년이 지난 1997년 2만 세대, 2005년 10만 세대, 2012년 30만 세대, 2015년 50만 세대, 2016년 5월 현재 58만 세대가 넘었다. 조합원 가입 증가세가 둔화되었다고 하나 한 달에 5천 세대 가까이씩 늘고 있으니 곧 60만 세대가 된다. 올해 안에 전국 세대 수의 3%를 넘어서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전국 22개 지역 회원생협의 매장도 205개나 된다. 2006년, 『스무살 한살림 세상을 껴안다』가 발행되던 때와 비교해도 조합원(13만2,787세대→58만 세대), 공급액(932억 원→3,620억 원), 매장(71개→205개) 모두 크게 늘었다. 농민 생산자들도 112개 공동체 2,159세대에 달한다. 한살림에 상근하는 실무자와 활동가, 가공생산지 인력까지 모두 합치면 상시적 일자리에 5,194명이 일하고 있다. 규모만 놓고 보아도 상당한 수준이다.

 

한살림이 이렇게 성장한 데에는 일반적인 마케팅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한살림은 유료광고를 하지 않았지만 진정성을 이해한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입소문이 한살림을 사회에 널리 알려왔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투박하고 거친 물품과 포장디자인, 미숙한 사업운영조차도 진정성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불친절하다거나 물품이 다양하지 않고 이용시간에 제약이 있어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주부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의 여론을 보면 여전히 한살림에 대해서 ‘가장 믿을 수 있다’는 평가가 견고하다.

 

한살림의 성장을 이끈 가장 큰 동력은 강한 가치지향과 시대변화를 꿰뚫어 본 앞선 시대정신이었다. 공해문제나 식품안전, 우리 농업의 가치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 않던 시대에 한살림은 돈보다 생명, 도시와 농촌 및 이웃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함께 사는 길을 제시했다. 이것이 사람들을 설레게 했다. 매사에 적과 아를 구분하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용어가 일반화 돼 있던 사회적 분위기와 비교해 한살림의 언어와 문화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신념을 공유한 초창기 생산자들과 헌신적인 소비자, 실무자들의 끓어오르던 열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살림을 어떤 신흥종교 집단처럼 오해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살림은 한편으로는 꾸준히 사업과 조직을 변화시키며 현실에 조응했다.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물류체계 등 사업방식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왔다. 처음 한살림농산 시절에는 전화 주문을 받아 개별공급을 했으나 회원이 늘어나면서 공동체공급 방식으로 전환했다. 물론 비용과 효율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개인화되고 고립되어 가는 도시 소비자들 사이에 마을을 복원하자는 생각도 담겨 있었다. 공동체공급 원칙을 고수하다가 1992년 무렵 논쟁을 거쳐 개별 가구 공급을 허용했고, 1996년 과천, 1997년 사당 직판장을 개설하면서 매장을 통한 공급이 본격화되었다. 현재는 매장 공급이 80%를 넘어섰다.

 

1996년 경기도 광주 문형리에 물류센터를 준공하고, 2002년 ㈜한살림사업연합을 설립해 당시 20개 지역 생협 중 17개 회원조직이 참여한 가운데 공동물류사업을 시작했다. 이전까지 개별 생협들이 분산 운영하고 있던 주문, 발주, 검수, 입고, 집품, 배송, 반송 등의 업무와 생산관리, 품질관리, 구매 관련 업무가 통합 운영되면서 전문성과 효율이 높아졌고, 지역 생협들의 경영도 안정화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이제는 다시 ‘가까이愛’ 같은 지역 물품 브랜드를 개발하고 지역 물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용 편의성도 꾸준히 개선해왔다. 한살림은 2000년 인터넷 장보기 사이트를 개설했다. 초고속 인터넷통신망이 보급되면서 인터넷쇼핑이 막 확대되던 시점이었으니 무척 빨랐던 셈이다. 최근 모바일 장보기서비스를 시작한 ‘모바일 앱’도 마찬가지다. 한살림이 모바일 앱을 처음 도입한 것은 2010년이었다. 3G 아이폰이 우리 사회에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뒤 홈페이지를 반응형으로 개편하고 모바일 시대를 대비했으며, 가장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장보기 사이트에 대한 모바일 서비스를 올 3월부터 시작했다. 흔히들 한살림이 시대변화에 둔감하고 변화에 더디다고 여기지만 원칙과 정신을 유지하면서 나름대로 조합원·시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채널을 꾸준히 개발해왔다.

 

 

조직의 변화, 하나의 가게에서 생산과 소비의 연합체로

 

1986년 12월 문을 열 당시 한살림농산은 개인이 운영하는 쌀가게 형태였다. 그러나 1년 남짓 뒤인 1988년 4월, 이내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을 결성했다. 1980년대 사회적 분위기 속에 ‘공동체’를 내건 한살림의 이미지는 사회운동 진영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당시의 사회운동은 대개 계급의 관점으로 사회 모순을 바라보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한살림이 말하는 ‘생명’과 ‘공동체’는 낯선 어휘였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한살림을 ‘한살림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당시에는 법인격을 갖추고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소비자협동조합’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 ‘한살림공동체’를 붙인 까닭은 ‘소비자협동조합’에서 ‘소비’라는 말이 가지는 한계 때문이었다. 그것은 절제 없이 ‘쓰고 버리는’ 이미지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나(소비자)의 소비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협동조합을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꼭 들어맞지 않았다. 당장에 활용할 수 있는 조직의 형식은 소비자협동조합일지라도 한살림은 농산물을 길러내는 자연, 그것을 땀 흘려 생산하는 농민생산자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중심에 두는 협동조합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연과 환경 등 거창한 공익을 앞세워 마케팅을 하면서도 농민생산자들을 납품업자로 취급하며 대상화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한살림의 초창기 소비자 조합원들은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농민들을 후원하고 연대하는 또 하나의 주인으로 초창기 한살림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 1993년 2월, 한살림은 소비자라는 말을 빼고 ‘한살림생활협동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4년에는 각 지역 생협과 생산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전국 연합조직으로 ‘사단법인한살림’을 결성했다. 2002년에는 물류사업을 전문화 한 ㈜한살림사업연합 설립과 함께 생산자모임(2007년 생산자연합회로 변경)도 따로 조직하고, 한살림모임을 계승·확대한 모심과살림연구소를 설립해 생명사상 연구, 한살림운동에 대한 장기적 비전 모색, 일부 실무자·조합원·임원들에 대한 교육연수, 도서출판 기능까지 담당하게 했다.

 

지역에서는 1985년 설립한 원주소협이 1990년 원주한살림으로, 1986년 설립된 경남소협이 1991년 한살림경남으로 변경했고, 한살림광주(1988), 한살림청주와 한살림대구 (1989) 등이 속속 한살림에 참여했다. 다른 한편, 한살림농산으로부터 시작해 수도권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사업을 담당하고 있던 사단법인한살림은 2003년 1월 한살림고양파주, 11월에 한살림서울을 분화시키고 200 6년 과천생협(현 경기남부)과 200 7년 분당지부를 한살림성남용인으로 독립시켰다.

 

2010년 생협법이 개정돼 생협들이 설립한 연합조직도 생협조직의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면서 한살림도 2011년, 사업과 활동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연합 조직으로 ‘한살림연합’을 결성했다.

 

<그림> 한살림 조직변천사

 

 

한살림은 이상한 협동조합 ?

 

한살림은 운동의 취지에 부합하면서 법제도상으로 용인되는 법인격으로 생활협동조합의 틀을 선택했지만 애초부터 생협의 완결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다. 한살림운동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앞선 경험을 지닌 일본 생활협동조합들의 사례가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유기농업의 원칙을 강조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중시하는 한살림의 관점은 소비자들의 편익을 강조하는 일본 생협들과도 차별성이 있었다. 이렇듯 한살림이 정립한 새로운 생협운동 모델은 이후에 등장한 다른 생협 조직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된다.

 

소비자협동조합만이 아닌 ,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모델이 한살림인데, 전통적인 협동조합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한살림의 모델은 낯설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한살림의 조직과 운영의 특성을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아 때로는 오해를 사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 운영하는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예컨대 2015년 7월 초, 협동조합주간을 맞아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가 주최한 ‘협동조합 사이의 협동의 방도를 찾아’라는 토론회에서 주 발제자가 한살림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들어보자. 그는 한살림이 생산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되려 소비자의 권리를 무시하는 측면이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살림은 소비자생협인지 농민단체인지 정체성이 모호하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 모호한 성격이 한살림의 특성이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살림은 처음부터 생산과 소비를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농민들에게 정당한 생산비를 보장해줌으로써 우리 농업을 지탱시키는 데 소비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한살림이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였기에 한살림의 이사회 구성이나 물품가격 결정체계 등 조직운영 원리에 이러한 가치지향이 녹아 있다. 다음해에 수확할 주요 농산물 가격과 생산량을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모여 결정하며, 물품가격에서 75% 내외를 농민 생산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점도 그렇다.

 

한살림 모델에 영향을 받아 한국의 생협운동이 시작되고, 직거래방식이나 물품의 외양이 비슷하다 해도 운영원리나 방식은 생협마다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당면한 소비자 편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데 집중할 수도 있고, 소비자의 삶이 생산자 농민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조직을 만든 사람들의 가치와 판단에 따라 달라지기에 다양한 시도로 인해 다양한 모델이 발전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지난 토론회 때 다소 아쉬웠던 것은 한살림을 한살림으로 인정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왜 한살림이 소비자를 위한 협동조합이 아니냐?’라며 하나의 상을 두고 한살림을 판단했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각이 다 다르고 조직의 역사가 다른데, 꼭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이러한 오해와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생협이 처한 조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15년 이후 사업이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표 1> 주요 생협 현황 (2015년말 기준)

 

생협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생산자들과의 연대, 환경과 농업에 기여하고 있는 점 등 고유의 가치를 홍보하고, 이용편의성을 높이는 한편 단체급식 등을 통해 사업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협동조합답게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일반 자본기업의 경영기법을 도입하기도 하며, 과다한 경쟁의식을 부추기기도 해 심히 우려가 된다. 조합원들이 스스로 공동출자하고 운영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지향에 부합하는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생협운동의 근간이라 볼 때, 생협의 사업과 운영의 근간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야말로 생협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오히려 저성장의 시기, 위기의 시기에 이러한 토론과 모색이 더욱 필요할 것이라 여겨진다.

 

 

농업살림의 긴 여정

 

한살림은 자기 사업에만 골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친환경농업 관련 생산기반과 법제도를 갖추는 일에 앞장섰다. 한살림이 성장하면서 소비가 확대되고 생산기반과 관련 사회인프라도 갖춰지게 된 것이다. 1991년 한살림이 출자해 괴산미생물연구소(현 흙살림)를 설립하고, 1993년 처음으로 미생물 농자재 ‘생명토’를 생산한 것을 시작으로 친환경농자재와 기술개발이 촉발되었다. 1994년 11월 8일에는 한살림이 앞장서 10개 생산자·소비자 단체가 모여 ‘환경보전형농업생산 ·소비단체협의회’를 창립했다. 이런 움직임과 연동해 농림부에 친환경농업과가 설치되고, 1995년부터 ‘중소농 고품질농산물 생산지원사업’이 시작되었으며 1997년 환경농업육성법이 제정되었다. 박재일 회장과 한살림이 직간접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친환경농업의 생산과 재배 면적은 감소하고 있다. 2011년~14년 사이에 친환경농산물의 농가 수는 19.1%, 경지면적은 평균 16.6%씩 감소해 왔다고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저농약인증이 친환경인증에서 제외된 이유도 있겠지만 사람과 자연, 소비자와 생산자의 유기적인 관계에 기반한 유기농업의 원칙보다는 허술한 인증체계를 통해 실적을 부풀려온 거품이 빠지고 있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표 2> 친환경농업의 위축

 

한살림의 첫 간판은 ‘한살림농산’이었다. 당시에 흔히 쓰던 무슨 상회 같은 게 아니고 ‘농산’이었던 데에도 한살림의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 그 무렵 우리 농업은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희생양으로 이중곡가제 폐지, 추곡수매 동결, 밀 수매제도 폐지 등으로 시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3저 호황’으로 무역흑자가 늘고 경제 사정은 나아졌을지 몰라도 농산물 시장 개방이 본격화되면서 농업·농촌은 급격히 붕괴되고 있었다. 1987년에 발간한 첫 소식지 ‘한살림을 시작하면서’는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표 3> 농가인구 비율 및 경지면적 변화

 

‘쌀 ,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 새겨진 생명의 원형질’. 이 문구는 지난해 한살림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이 다음해 쌀농사의 규모와 쌀값을 정하는 ‘쌀생산관련회의(쌀값결정회의)’에 등장한 것이다 . 매년 소비자 ·생산자 대표들이 모여 다음해 쌀값과 재배면적과 생산량을 정한 뒤 , 책임소비를 위해 전 조직이 함께 노력한다. 매월 이사회에 쌀 소비 실적이 공유되고, 한살림 소식지에는 쌀 소비를 늘리기 위한 캠페인이 연중 진행된다 . 벼의 생육과정을 연중 지면 중계하거나, 쌀과 관련된 요리 사진, 레시피 공모전 등도 지속된다.

 

잡곡은 친환경인증뿐만 아니라 ‘ 국내산 ’ 까지 취급한다 . 친환경인증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국내산을 보존하는 게 급선무라 그렇다 . 1983 년 정부가 밀 수매제도를 폐지한 뒤 밀은 멸종 직전까지 갔었다 . 1988 년, 한살림은 경남 고성 두호마을에서 우리 종자를 구해 ‘우리밀살리기운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가톨릭단체 등이 결합해 ‘우리밀살리기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노력으로 2010 년에 와서야 우리밀 자급률 1% 를 넘어섰다. 보리도 마찬가지다. 곡물 소비는 줄어드는데 육류 소비가 증가하는 추세이니 수입곡물의 절반가량이 가축사료로 소비되고 있어 곡물자급률이 급격히 감소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2012 년 보리 수매제도마저 폐지했다. 사료 원료 대부분이 수입옥수수( 미국산은 대부분 GMO 일 가능성이 크다 )인 점에 대응해 한살림은 2012 년부터 수입옥수수를 발아보리로 대체하는 ‘우리보리살림사료’ 사업을 시작했다. 작년(2015년) 한 해 동안 ‘우리보리살림돼지’ 등으로 1,844 톤의 곡물 수입을 줄이고 290만㎡(약 88만 평) 규모의 국내 보리생산면적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최근에는 토종종자 보전과 농지보전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몬산토 등 외래 자본이 장악한 종자 시장에 대한 대안으로 ‘ 토박이씨앗살림 ’운동을 벌여, 2015년 한 해 동안 앉은뱅이밀, 선비콩 등 토박이씨앗작물 46종, 52만 톤, 47억7348 만 원어치를 공급했다. 2016에는 ‘농지살림주식회사’ 를 설립하고 농지 소유를 공공화함으로써 영구히 보전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살림은 농산물 가공사업 역시 1차 농산물 소비를 확대하고 농가 소득을 높이는 방편으로 여겨왔다. 두부 등 콩 가공식품을 생산하는 아산 푸른들영농조합법인의 경우처럼 1차 농산물 산지에 농민들이 공동출자해 가공생산을 하게 함으로써 농가소득을 높이는 정책을 추구해왔다. 생협 중에는 가공산지를 한 곳으로 모으고 소유를 일원화 해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도 있지만 한살림은 농민 생산자들이 직접 출자해 산지 가까이에 설립한 사업체들을 통해 ‘분산형 네트워크’를 추구해왔다. 기존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중복으로 산지를 개발하지는 않지만 공급액이 일정 규모를 넘어서는 물품에 대해서는 제2, 제3의 생산지를 설립함으로써 더 많은 농민들이 혜택을 나눌 수 있게 하고 있다.

 

생산수단을 공유화하고 매출과 이익의 한계선을 설정해 적정한 살림의 양식을 만들어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며 시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거대한 도전. 여기에 한살림의 꿈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30년을 향해

 

30년 전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마다 컴퓨터를 손에 들고 실시간으로 소통을 하고, 머잖아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 대부분을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가족의 개념이나 개인의 삶의 양태도 예기치 못한 속도로 변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한살림은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먹을거리 직거래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 전체 식품시장 규모 157조 원(2013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2%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다. 그리고 출발 당시 스스로 진단한 문명의 위기, 농업과 농촌의 어려움, 소비자들의 불안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더 고단해졌다. 심지어 우리 농업은 위기 정도가 아니라 절멸의 지경까지 내몰렸다. 끝없이 성장하고 팽창할 것만 같던 경제는 성장을 멈추고 쪼그라들고 있다. 젊은이들은 현실에 희망이 없다며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고 있다. 한살림의 새로운 30년은 이렇게 암담한 현실이 출발점이 되어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정체성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자. 내가 누구인지, 어떤 점에서 남과 구분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주변의 이웃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심층의 의식과 미세한 느낌, 현상에 대한 반응양태까지 … 어찌 보면 한 권의 책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모여 나의 ‘정체성’을 이룬다. 한살림은 사람처럼 단일한 인격을 지닌 존재도 아니다 .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공통의 경험일지라도 각자의 처지와 입장에 따라 다양한 수준으로 한살림을 해석한다. 정관과 규약·규칙, 생산·출하기준, 가급적 수입물품을 취급하지 않고 인위적인 첨가물을 극도로 제한하는 물품취급기준, 생산자 농민들에게 75% 내외의 수취가를 돌려드리려 하고 , 쌀 등 주요 물품 가격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생산량과 가격을 정하고 생산과 소비를 함께 책임지려고 하며, 사적 소유에 대한 집착과 이기심을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기업에 비하면 한없이 더디고 느리지만 합의를 이루려 애쓰는 의사결정과정, 한살림 생산자 / 소비자와 실무자 / 활동가들의 유형화된 행동양식, 발행하는 매체, 심볼과 로고타입, 이 모든 것이 형성하고 있는 이미지 등 수많은 요소들이 한살림을 한살림다운 이미지로 느끼게 할 것이다.

 

10여 년 전처럼 ‘정체성 토론’을 전면에 걸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살림은 여전히 매순간 스스로의 정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토론을 벌인다. 지난 몇 달 동안 한살림의 각 단위 이사회에서는 매실이 공급되는 6월 전후로 공정무역 유기농설탕을 취급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진통을 앓으며 토론을 벌였다. 결론적으로, ’한시적 특별품‘ 이라는 단서를 달고 민중교역, 공정무역의 원칙을 적용해 유기농 설탕을 취급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여전히 몇 개 회원생협은 취급하지 않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일반기업의 30년 생존율은 5% 남짓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는 것도, 서른에 비로소 독립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30년가량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마침 세대가 바뀌는 즈음인 2015년 사업 성장세가 위축되면서 회원생협들의 경영부담이 커졌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하자는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사업 성장이 둔화되는 추이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실무적인 논의가 진행되고 대책이 마련되고 있다 . 매장과 가정공급 이용 편의를 개선하고, 유통 체계를 개선해 물품의 신선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 4인 가족의 가정 취사를 기본으로 하던 사업패턴에서 1~2 인 가구 및 고령자들을 배려해 소포장과 간편조리식 등을 늘리는 쪽으로 변화가 일고 있다. 어린이집뿐만 아니라 학교와 직장 단체급식에 한살림 물품(또는 한살림과 같은 기준과 방식으로 생산되고 직거래 취지에 맞게 농민생산자들에게 적정 생산비를 보전해주는 물품)을 공급하고, 가정 취사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대안적인 외식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의 사업 방식을 단기간에 급격하게 변경하지는 않더라도 시대변화에 조응하면서 사업을 합리화하는 노력을 부단하게 진행할 것이다. 또한, 생협운영이나 사회변화 추이가 우리보다 20 년쯤 앞선 일본이 지금 경험하고 있듯이 고령화, 가속화되는 가족해체에 대응해 돌봄사업 등 지역 기반 복지사업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정부의 인증체계에 의존하면서 관행화되고 있는 친환경농업을 개선하기 위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주체가 되는 ‘한살림자주인증체계’를 확대·심화하고 독자적인 인증체계 비중을 높여가는 노력, 토박이씨앗과 농지보전운동을 통해 한살림이 추구하는 농업기반을 지키고 확대하는 일, 기존 한살림 틀 외에도 협동사회경제영역을 한살림에 참여시키기 위한 노력, 청년들의 창업 지원을 후원하고 미래 사업기반을 함께 모색하는 일 등을 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렇듯 사업의 활력을 찾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최근에는 커진 사업규모로 인하여 약화될 수 있는 관계성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커가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사회변화를 위해 노력해온 것처럼 한살림 스스로의 조직틀, 문화, 일하는 사람들의 관계방식은 과연 한살림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최근 부쩍 높아지고 있다. 한살림 조직 자체를 한살림운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개선하자는 데 공감이 확대되고 있다. 사회변화를 외치면서 스스로가 정체되어 있다면 새로운 30년은 성숙해지는 길이 아닌 그냥 나이만 먹는 쇠락의 길이 될 뿐이다.

 

그래서 지난 2015 년 한 해 동안 ‘조직개편 TFT’를 운영해 현재의 조직틀을 진단하고 미래지향적인 틀을 만들기 위한 방향을 모색했다. 단위생협의 규모와 사업범주를 생활단위 중심으로 재설정하기, 단위생협과 권역별 연합 조직 등으로 분화 ·독립하기 , 연합틀의 재구성을 통해 조직체계를 정비하기, 생협과 생산자조직이 권역별로 연대를 강화하기, 의사결정 구조를 합리화하고 단위 조직들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사업과 인재양성을 도모할 수 있는 방안 마련하기 등을 과제로 정리하고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1980년대에, 생명을 존중하고 욕망을 절제하며 더불어 살자는 한살림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살림이 성장해온 것은 이악스런 장삿속과 영악한 처신이 아니라 시장에서 만날 수 없는 진정성을 이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살림이 살아남고 성장한 비결도 바로 이 남다른 점 때문이었다. 공동체공급을 받은 판 두부를 나눈 뒤 서로 작은 것을 가져가려 실랑이하고, 도시 소비자들의 형편을 염려하며 스스로 쌀값을 내리자고 호소해 참석자들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던 일화에서 보듯 한살림이 한살림으로 존재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그 간판을 단 매장이 늘어나고 사업규모가 확대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황량한 욕망의 경연장에서 다들 목말라하는 함께 사는 길, 자본과 시장의 욕망을 넘어서려는 그 원대한 꿈을 유지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 『모심과 살림』 7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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