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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생명이란 생성과 소멸의 흐름이다
2017-02-01 19:02:00

생명이란 생성과 소멸의 흐름이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씀, 김소연 옮김, 은행나무 , 2008

 

황도근 (상지대 교수, 물리학,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생명이란 무엇일까?”

 

몇 년 전부터 나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십여 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생명운동’, ‘생명평화’란 말도 느낌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질문하면 매우 애매한 개념에서만 머물고 있는 듯하다. 학문적으로도 생명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으며, 단지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여러 분야에서 각자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는 대로 말을 풀어가고 있다.

 

이런 모호함에도 ‘생명’이란 용어는 요즘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21세기 들어와서 물질문명에 지쳐가는 우리에게 ‘생명’이란 화두는 삭막한 모래사막에서 만난 신선한 샘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인 지구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있다. 단순히 물질로 이루어진 행성에서 살아있는 지구, 즉 푸른 생명체 지구별로 인식이 변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생명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정은 더욱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다.

 

내가 물리학으로 30년 가까이 밥을 먹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단순히 수학을 잘했다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어린 시절 더운 여름날에 시끄러운 목공소 공장의 옥상에서 매일 별을 보며 개와 함께 잠들면서 ‘왜 저 별들은 저기에 있을까?’ 궁금해 했던 그 질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리학자에게 가장 큰 매력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에 대한 근원적 질문, 즉 ‘무엇일까?’에 대한 해답을 얻었을 때의 희열이다.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었을 때 혼자서 빙그레 웃었던 아이처럼 말이다.

 

나는 30년 가까이 자석을 연구했다. 과학원 박사과정 중에 철의 자기적 성질을 연구했으며, 그 이후 자석테이프, 컴퓨터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 등 자기기록 기술에 20여 년의 시간을 보내왔다. 해외 논문 발표도 꽤 많이 했고 한때는 잘나갔지만 이 첨단기술도 스마트폰의 출범으로 막을 내렸고, 나도 연구 방향을 바꿔 지금은 생체자기장 치료기기를 연구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내 실험실에서는 백혈구세포, 유방암세포, 간암세포 등을 배양하고 있다. 작년에도 하와이 학회에서 자기장이 적혈구에 미치는 영향을 발표했고, 지금은 자기장이 유방암 세포의 증식을 억제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

 

이런 학문적 인연으로 생물학에 가까이 가게 됐으며, 더욱이 원주에서 무위당 장일순의 생명사상과 한살림운동을 주제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생명’에 대한 의미를 인문학적으로도 접근하게 되었다.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

 

“생명이란 무엇일까? (what is life?) ”에 대해 처음으로 질문을 시도한 사람은 생물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자이다. 1933년 수소원자의 구조를 완벽하게 해석하여 아이슈타인과 함께 세계적인 천재로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1887-1961)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1943년 더블린 고등학술연구소 주최로 열린 연속 공개강좌에서 이 화두를 처음 꺼냈고 다음해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간했다.

 

서론에서 그는 “물리학은 앞으로 가장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현상을 규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에서 생명현상은 신비하지 않고, 모든 생명현상은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원자의 구조를 완벽히 설명한 그는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분자의 운동에 초점을 맞춰 통계적인 설명을 이어가지만 지금 와서 보면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은 “유전자의 본체는 혹시 비주기성 결정이 아닐까?”라는 것과 “원자는 왜 그렇게 작을까?”였다. 이 질문에 대한 논의는 다음에 이어가기로 하자.

 

“생명은 무엇일까?”에 대한 생명과학의 첫 번째 답은 슈뢰딩거의 강연으로부터 10년 뒤에 발표된다. 1953년 『네이처』에 겨우 천 개의 단어로 쓰인 짧은 논문,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핵산의 분자구조: 디옥시리보 핵산(DNA)의 구조」이다. 이 논문에서는 DNA가 역방향으로 꼬인 두 개의 리본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의 본질이 완벽한 대칭성의 이중나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칭적 구조에 의해 생명은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 DNA구조를 밝힘으로써 분자생물학의 화려한 시대가 열렸고, 지금은 거의 모든 생명과학 기술이 유전자조작 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문제가 증폭되고 있는 유전자재조합식품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과 유전자변형동물 역시 이런 발견의 결과물이다.

 

분자생물학적 생명관으로 보면 , 생물체란 마이크로 부품으로 이루어진 조립식 장난감처럼 분자기계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생명체를 아주 정교하게 조작함으로써 고장 난 것을 개량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유전자를 결합하여 변형된 분자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이 유전공학이다. 참으로 대단한 인간 승리이다. 물리학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발견은 ‘전자’의 존재를 인간이 알아냈다는 것이다. 지금도 크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작은 전자를 발견하고 그들의 운동을 완벽하게 해석한 슈뢰딩거의 이론을 볼 때마다 참으로 인간이 대단하다는 감탄을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대칭성을 가진 DNA의 발견은 신이 인간에게 무엇인가 특별함을 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세기적인 발견만으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데 한계를 느끼게 된다.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린 시절 집 앞에서 흙놀이를 하다가 개미를 잡아 나무로 꾹 눌러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금방 살아있던 놈이 움직이질 않는다. 약간 당황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곧 깨닫는다. ‘아! 생명체는 쉽게 죽을 수 있구나.’ 그렇다면 생명은 갑자기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가? 여러 가지 의문이 있어도 생명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의문이 아직 과학계에 남아 있는 과제였다. 그나마 이런 의문에 답을 찾아가는 책이 분자생물학자인 후쿠오카 신이치가 쓴 『생물과 무생물 사이』이다.

 

 

“생명은 생성과 소멸의 흐름이다 ”

- 동적평형 (dynamic equilibrium)

 

그는 교토대학을 나와 분자생물학의 산실인 뉴욕의 록펠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의학부에서 연구한 후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 있다. 그도 유전자변형동물인 ‘녹아웃 생쥐 (knock-out mouse)’의 특정 유전자를 바꿔놓아 그 유전자가 작용 못하게 하는 조작기술로 동물의 활동을 조사하는 연구를 했다. 특히 췌장세포를 주목하고 소화효소와 인슐린의 분비에 관여하는 DNA 일부 부품정보를 제거한 녹아웃된 조작동물인 쥐를 키워서 상태를 조사했는데, 결론은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결과에 연구 발표도 못한 그는 여러 가지 조사를 통해 이런 현상이 많은 연구실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알아냈다. 결국 그는 유전자 녹아웃기술로 DNA 한 조각의 기능을 제거하더라도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보완이 이뤄져서 새로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결국 생명체는 부품을 끼워 맞춘 조립식 장난감 같은 분자기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흐름이 존재하는 것임을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문점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그가 주목한 연구자가 유태인 천재 생화학자인 루돌프 쇤하이머 (1898~1941)이다. 쇤하이머는 1930년대 방사선 분석이 가능한 무거운 중질소 아미노산이 포함된 사료를 쥐에게 먹여 생체연구를 하였다. 실험예상 단계에서는 사료를 먹이면 필요한 에너지원만 연소하고 나머지 중질소는 모두 배출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투여된 중질소 중에서 43.5%만 배설되었다. 나머지는 장벽, 신장, 비장, 간 등 몸 곳곳에 퍼져 있었다. 절반 이상인 56.5%가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 속으로 흡수되었다. 쥐의 단백질은 겨우 사흘 만에 식사를 통해 섭취한 아미노산으로 약 50퍼센트 바뀌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몸의 세포와 다양한 단백질들은 매우 빠르게 소멸되고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불과 반년 또는 1년 정도 지나면 우리 몸도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이 겉으로 보기에는 평생 고정된 모습으로 변화하지 않고 단지 조금씩 늙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같이 수많은 세포는 새롭게 대치되고 있다. 단단한 뼈나 치아도 불필요한 뼛조각을 파괴하는 파골세포와 뼈를 생성하는 조골세포가 있어서 예외 없이 분해되고 새롭게 합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적흐름이 있는 것이다. 결국 생명이란 쇤하이머의 말대로 “생명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된다”. 궁극적으로 “생명이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이 흐르는 강물과 같다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의 대칭성은 우주생명의 아름다운 순리인 것이다. 별의 생성과 소멸이 늘 공존하며 윤회하듯이, 큰 강물이 늘 같은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그 속에 흐르는 물은 매일 떠내려가고 새로이 들어오듯 이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세포는 흐르는 강물처럼 생성과 소멸의 흐름을 보이는 것이다.

 

신이치는 그의 책에서 “생명을 구성하는 단백질은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는 생명이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생명은 끊임없이 파괴되면서도 어떻게 원래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단백질이 보여주는 상보성에 있다. 생명은 그 내부에 얽히고설킨 형태의 상보성에 의해 지탱되며 그 상보성으로 인해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동적인 평형상태를 유지한다.”라고 설명한다. 즉, 큰 퍼즐그림의 작은 퍼즐조각이 모두 다르게 생겼지만 하나씩 맞춰나가야 하듯이, 우리 몸속 세포는 퍼즐조각 맞추기와 같이 빠져나간 조각의 자리에 새로운 세포 퍼즐조각이 증식되며 만들어질 때 주변의 세포조각들의 모양과 생태에 따라 상호 보완적으로 맞춰나가면서 생성되는 것이다. 몸속 세포의 수는 우주의 별만큼 많다. 그 하나하나의 세포들은 모두 개성과 다름이 있지만 모든 세포들의 상보적인 그물망이자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흐름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생명체 역시 우주의 질서와 순리에 너무 닮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앞에서 애기했던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는 모든 세포들의 생성과 소멸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고, 죽은 생명체는 이 흐름이 막혀서 소멸이 정지되어 고여 썩거나 생성이 사라져서 말라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몸은 한번 만들어지면 그 상태를 유지하며 필요에 따라 축적된 영양분을 사용하는 것이라기보다 몸의 구성체가 끊임없이 교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완결된 구성물이 아니라 요소의 흐름 속에 있는 구성물이며, 생명체는 우연히 밀도가 높고 서로 연결된 분자덩어리이고 존재하는 것은 흐름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도 소멸한다.”

 

부처가 깨달은 연기론도 세상의 모든 것이 불변적·고정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며, 용수보살인 나가르주나가 『중론』을 통해 언어의 고정적 실체를 부정하면서 정립한 공 空사상 역시 모든 실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이치 중에 분명해 보이는 깨달음은, 거대한 우주이건 우리 몸이건 작은 원자이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흐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도 세포도 강물처럼 끝없이 흘러간다. 생명은 그런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생명의 동적 평형 상태이다.

 

 

생명의 속성은 생성을 위한 소멸

 

지금 우리는 물건들에 집착하며 끝없이 쌓아놓느라 정신이 없다. 대형 마트에서 카트에 산더미처럼 사와서 냉장고와 집안에 쌓아놓고 살고 있다. 한쪽에서는 썩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짐에 치여 산다. 물질문명에 물들어 생성과 소멸의 흐름을 막히게 하여 점점 생명력을 잃게 하고 있다.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것이 생명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의 행동이다.

 

또한 요즘 우리 사회에 심각하게 제기되는 문제 중 하나는 ‘고령화 사회’이다. 모두가 늙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식량과 의학의 발달로 조만간에 100세 시대가 다가온다. 모두가 삶의 질보다 양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말하듯 ‘인생은 신이 만든 연극이고, 우리는 그 속의 배우인 것이다.’ 배우는 대사가 끝나면 떠나면 그만인 것이다. 삶의 시간보다 살아가는 동안 주변의 생명공동체를 소중하게 느끼며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과연 영원히 풍요로운 삶을 우리 모두가 영위할 수 있을까? 그런 착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생명의 생성과 소멸의 아름다운 대칭성을 모르는 바보들일 것이다. 미안하지만 자연은 결코 인간을 위해 생성과 소멸의 대칭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이제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그 역할이 끝나면 떠나야 한다. 새로이 생성하는 생명을 위해서는 아름다운 소멸이 먼저인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생명의 속성이다.

 

 

 

* 『모심과 살림』 7호(2016)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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