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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무위당의 리더십 - 모심의 철학, 살림의 기술
2018-02-02 10:03:00

무위당의 리더십

- 모심의 철학, 살림의 기술

 

양세진

소셜이노베이션그룹 대표, 철학(현상학)과 행정학(협력적 거버넌스)을 공부했으며, 실천적 연구자로서 최근에는 한살림의 조합원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ysejin21@hanmail.net

 

 

 

 

리더는 본질적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사람이다

 

리더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리더십은 문제를 해결하는 힘으로서 리더가 가진 힘이다. 한 조직이 위기1)에 직면할 때 조직의 리더는 당연히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하며, 다양한 분석과 방법을 통해 문제를 규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리더는 그 문제를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반면 다른 리더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문제로 인식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으며 문제가 해결된 결과에 대한 방향 또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하는 리더십을 가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선 던져야 하는 물음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어떤 문제인가?’이다. 해결되면 우리에게 효용을 주는 문제인가? 혹은 그것이 잘만 처리되면 우리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는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주고 우리를 압도하는 문제인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본질적인 문제’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를 통찰한 뒤에, 그것을 본래적인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문제해결 방법이 아니라 무엇을 본질적인 문제로 볼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리더란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통찰하는 사람이고, 그를 통해 본질적인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무위당 장일순2)의 사상을 토대로 위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아나감과 동시에 우리 시대 리더가 전면적으로 자기화해야 하는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위당 리더십의 4가지 핵심가치 :

‘모심’, ‘살림’, ‘낮아짐’, ‘더불어 함께함’

 

무위당 장일순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안내는 그동안 많은 문헌과 글을 통해 공유되어 왔기에3), 여기에서는 그의 사상을 리더십의 관점에 초점을 두고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선 무위당과 무위당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무위당 리더십의 핵심 가치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선별해보았다.

 

 

     무위당 리더십의 네 가지 핵심가치 : ‘모심’, ‘살림’, ‘낮아짐’, ‘더불어 함께함’

 

 

첫째, ‘모심의 힘’을 가진 리더

 

모심侍은 ‘받들어 모심’이며, ‘양육하는 모심’이고, ‘기다리는 모심’이다.

 

생명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 중에서도 대단한 경사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생명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이 사실만은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진정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4)

 

이 물 한 컵, 밥 한 사발, 김치 한 보시기. 이것은 제왕이나 다름이 없는 거룩한 밥상이란 말이에요. 모심 그 자세, 그 깨달음이 없으면 문명의 환각에 빠지게 돼요.5)

 

천지자연의 원칙대로 그 돌아감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그것에 맞춰서 생활에 동참하는 것, 그때 모심侍의 틀 속에서 자기도 생활하고 나아가게 됩니다. 생명운동이란 전체를 모시고 가는 하나의 생활 태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 봅니다.6)

 

그렇다면, ‘생명’을 모신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명’은 ‘자연’이고, ‘우주’이며, ‘존재’이고, ‘본질’이며, ‘근원’이고, ‘기원’이며, ‘신’이고, ‘무한’이다. ‘생명’은 닫힌 개념이나 체계가 아니라 열려 있으며,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흐름 그 자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명은 ‘무한’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은 어떤 것의 한계를 넘어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성질이며, 곧 본래적인 것이 그 자신을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힘이다.

 

따라서 생명을 모신다는 것은 ‘무한’을 모시는 것이다. ‘무한’은 그 끝을 한정할 수 없기에, ‘무한’한 생명을 모신다는 것은 정확한 인식과 명석한 앎을 요구하지 않는다. 앎의 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의 힘, 배려의 힘을 요구한다. 무한으로서 생명을 모신다는 것은 자기인식의 힘을 넘어 자기돌봄과 배려의 힘을 필요로 한다. 순간순간 깨어서 지금 여기에서 ‘무한한 생명’을 모시고 있는지 돌보고 배려하는 관심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무위당의 리더십은 우선적으로 ‘무한으로서 생명을 모시는 힘’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지금 우리의 리더십에 적용해본다면, 리더는 ‘무한으로서 생명을 모시는 힘’을 전면적으로 자기화한 사람이며, 그 힘을 자기화하기 위해 모심을 온전하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돌봄과 자기 배려의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자기돌봄과 자기배려의 힘은 곧 타자에 대한 돌봄과 배려로 연결된다. 생명은 전일적 존재이기에 어느 한 주체 안에, 어느 한 장소에 갇혀 있지 않다. 무한으로서 생명을 모신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돌봄이고 배려이다. 우선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삶과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돌보고 배려하는 것이며, 이러한 돌봄과 배려의 힘을 매개로 타자에 대한 돌봄과 배려가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선형적인 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도 타자와의 관계맺음과 타자에 대한 돌봄의 과정을 통해 자기돌봄이 온전하게 성숙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에 열려 있는 관계맺음을 지속하고 지탱하는 힘이 바로 ‘무한한 생명을 모시는 힘’이며, 리더의 본질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살림의 힘’을 가진 리더

 

살림生은 ‘낳아서 살림’이며, ‘길러서 살림’이고, ‘생기있게 살림’이다.

 

예수는 ‘내가 밥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낟 곡식 한 알 한 알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우리 모두는 하늘과 땅이 먹여주고 길러 주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7)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온 것은 일체를 살리고자 오신 것이다. 인간 세상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 공간과 무한한 시간에 걸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을 몽땅 해결하러 오신 것을 알게 된다. 일체 만물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오신 것이다. 근데 우린 오랫동안 인간만을 살린다고 잘못 이해해왔던 것이다. 생명의 존재 모든 것에 대한 살림이 예수의 존재이유였던 것이다.8)

 

‘살림’은 ‘모신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살림은 ‘자연의 생명’을 살리고, ‘우주의 생명’을 살리고, ‘존재로서 생명’을 살리고, ‘무한으로서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살림은 살아 있게, 생동감 있게, 생기 있게, 활력 있게 존재하게 하는 힘이다. 이러한 살림의 힘은 모심의 힘을 통해서 가능하며, 모심은 또한 살림의 힘을 통해서 가능하다. 모심과 살림의 이러한 관계는 상호의존相互依存적 관계라기보다는 상호공속相互共屬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상호의존적 관계는 어느 한쪽이 없어도 힘들게나마 다른 한쪽이 존재할 수 있는 관계이다. 반면 상호공속적 관계는 어느 한쪽이 없이는 다른 한쪽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관계이다.

 

무위당에게 생명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 나와 너의 경계를 넘어, 모든 분리와 분할을 무력화시키는 전일적 존재를 의미한다.9) 생산자와 소비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나와 너, 우리는 생명 그 자체이며 생명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생명살림의 관점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나라는 것이다.10) 생산자는 소비자를 살리고, 소비자는 생산자를 모신다. 생산과 소비가 하나가 되는 것은 모심과 살림의 순환적이고 상호공속적인 관계를 통해 가능하다. 이에 따르면 모든 존재를 모신 무한한 생명을 살리는 힘이 오늘날 리더가 전면적으로 자기화해야 하는 본질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낮아짐의 힘’을 가진 리더

 

낮아짐은 아래로 기어가는 것, 모든 것을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낮아져야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한다.

 

리더는 위에서 시키고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밑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해요.11)

 

한살림운동은 어려워서는 안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덮어 놓고 자꾸 차원을 높이는 건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살림에 동참하게 해야 한다. 유기농을 하는 농부만이 아니라 농약을 쓰고 비료를 쓰고 그러는 농부도 안고 가야 한다. 서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끼리 만나서 함께 이해를 확인해가는 것이 운동이다.12)

 

낮아짐은 곧 모든 차이를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낮아짐의 힘은 곧 받아들임의 힘인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와 다른, 우리와 다른 그 차이를 받아들임을 뜻한다. 아울러, 나의 정성과 최선, 우리의 열심과 열정을 다한 것이 거부당할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명의 받아들임은 자신의 정성과 최선, 열심과 열정이 풍성한 수확과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를 탓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에요.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 혁명은 어루만지는 것이에요. 아직 생명을 모르는 사람들 하고도 만나라 이거에요, 보듬어 안고 가자는 거지요.13)

 

무위당은 노자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말하였다(상선약수上善若水). 낮아짐의 힘을 전면적으로 자기화하기 원하는 리더는 물의 존재방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노자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낮은 곳에 거하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다른 만물과 같이 어울릴 때에는 아주 인자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고, 일에는 매우 능란하고, 움직임이 때를 잘 맞추며,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물의 존재방식은 생명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낮아짐의 힘으로서 받아들임의 힘을 상징하는 물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별함이 없이 다 받아들인다. 호수보다는 바다, 큰 바다일수록 이러한 힘은 더욱 커질 것이다. 물은 무엇을 기대하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받아들임의 힘을 상징한다. 물은 리더이며, 물의 받아들이는 힘은 환대의 리더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낮아짐의 힘은 곧 받아들임의 힘이며, 리더가 전면적으로 자기화해야 할 본질적인 힘인 것이다.

 

넷째, ‘더불어 함께함의 힘’을 가진 리더

 

존재로서의 생명, 무한으로서의 생명을 모시는 힘은 존재로서의 생명을 살리고 무한으로서의 생명을 살리는 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모심과 살림은 상호공속적 관계를 맺고 있다. 모심과 살림의 힘을 갖게 되면, 존재로서의 생명과 무한으로서의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바탕으로 낮아짐의 힘과 받아들임의 힘을 자기화하게 된다. 이러한 힘이 전면적으로 자기화할 때, 모든 존재와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힘을 생성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힘의 관계는 인과론적 관계도, 선형적인 관계도 아니다. 순환적이고 유기적인 관계이다. 각각의 힘은 상호공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생명운동과 협동운동이다. 인간만의 고유성을 살릴 수 있어야 한다. 계산하는 것은 컴퓨터가, 잘 달리는 것은 말이, 잘 싸우는 것은 사자가 잘 할 수 있다. 인간이 집중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우리 시대에 마땅히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 그 의미의 본질을 본질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생명운동이고 협동운동이고 한살림운동인 것이다.14)

 

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래의 모습, 각 생명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각자도생, 자력갱생이 아니라, 협동을 통해서 실천하고 실현해가자는 것이다.15)

 

자연과 인간, 또 인간과 인간 일체가 하나 되는 속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고정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일체의 조건이 나를 있게끔 해 준 것이지 내가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우리는 연대 관계 속에, 유기적인 관계 속에,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화합의 논리로 서로 협동하는 논리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16)

 

2016년에서 2017년의 겨울 대한민국의 수많은 주권적 삶의 주체들이 전국 각 지역의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라는 울분을 토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외치는 함성을 통해 스스로 공공이성의 주체이며 공공존재임을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그래서 혹자들은 사적 개인들이 사회문제에 대한 실천을 통해 공적 존재로 성장하고 공공가치를 창출했다고 분석하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공공이성public-common reason의 주체였으며, 공공존재public-common being였다.17) 생각해보라! 강바닥에 놓여 있는 모래처럼 작은 조각들이 청동이라면, 100만 톤을 모은들 ‘황금바’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조각들이 본래 황금이었기 때문에 그 조각들의 모음이 아름답고 멋진 ‘황금바’를 생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위당에게 나와 너는 자연, 생명, 존재, 본질, 무한을 사유할 수 있는 공공이성의 힘을 가진 주체이며,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에 매몰되지 않고 전일적 존재로서 전체 사회와 연결되고 협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타자와 더불어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공 존재이다.

 

 

무위당의 리더십은 ‘무위의 리더십’이다

 

무위당은 ‘원시반본原始返本’을 강조하였다. 근원적인 데서부터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입장이다. 시원을 살펴서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를 위해서는 우리가 모셔야 할 본질은 무엇이며, 우리가 살려야 할 본질은 무엇이고, 우리가 낮아짐으로 받아들여야 할 본질은 무엇이고 또한 우리가 더불어 함께 해야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캐물음이 더욱 요구된다. 리더가 전면적으로 자기화해야 할 힘은 본질을 본질적으로 캐물을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위의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무위당의 무위無爲는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은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無爲 스스로 그러하듯이 자연自然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일종의 방법론적 부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참다운 행위를 이야기하기 위한 전략적인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無爲’는 ‘없음無’과 ‘행위爲’의 결합어이고, ‘자연自然’은 본래적인 존재방식, 본성에 따른 존재방식을 이야기하며 순수내재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 그러함을 뜻한다. 따라서 무위란 단순히 ‘행위함이 없다’거나, 혹은 ‘없음으로 행위하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물이 흐르고 바람이 흐른다는 것은 어떤 행위함이 이미 존재함을 말하고 있으므로 ‘행위함이 없다’는 말은 모순이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위는 ‘행위함이 없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없음으로 행위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없음’은 무엇인가?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없음’이 ‘공空’의 상태로 전적으로 비어있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음의 ‘무’라면, 이 역시 행위함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무위’와 ‘위’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역시 ‘무위’라는 용어를 선택한 어떤 의미가 상실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무위’는 ‘아무것도 없음’의 ‘공空’, ‘nothing’의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어떤 것’의 없음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럼 없애야 하는, 비워야 하는 ‘어떤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심이 없는 행함’, ‘살림이 없는 행함’, ‘낮아짐과 받아들임이 없는 행함’, ‘더불어 함께하지 않는 행함’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더는 때로 은둔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아. 나가서 적과 싸울 때는 일어나 전쟁터로 뛰어드는 거라. 그런데 그건 뭐냐 하면 무심으로, 아무런 적극적 의지 없이, 맹물처럼 담백하게 처리하고 나아간다 이 말일세. 서산 스님이 국난을 당하자 떨쳐 일어나 적진에 뛰어들지 않는가? 그런 거지.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니까 언제 그랬더냐 싶게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가 앉아 계시는 거라. 그게 바로 의지로 나아감 없이 무심으로 나아가는 것이네.18)

 

무위당 리더십의 본체인 무위의 리더십은 따라서 존재로서의 생명, 무한으로서의 생명,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 생명을 ‘모시고’, ‘살리고’, ‘낮아짐으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함께하는’ 실천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한살림운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각자가 서게 하는 것이고 각자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는 것이지 그것을 소유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지요.19)

 

그렇기에 무위당의 리더십으로 이해한 ‘리더가 된다는 것’은 소수자되기이고, 주변으로 나아가기이다. 가난한 풍요란 바로 이런 삶의 방식, 존재방식을 일컫는 것이다. 리더로 산다는 것은 생성의 삶이고, 되기의 삶이다. 작은 자-되기, 소수자-되기, 생명의 존재자-되기이다. 아울러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살림을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말 건네기이다. 무위당의 사상을 통해 본 리더는, 모든 생명존재는 연결되어 있고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임을 믿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한으로서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으며 또한 우리를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을 통찰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힘을 통해 우리 자신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생성하고 흐르는 생명존재이며, 무한으로서의 생명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설령 그 믿음이 헛되다 할지라도, 그 믿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또한 전일적이고 무한한 생명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위해 싸운다면 그 방법도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20)

 

 

 

1) 위기(crisis)는 ‘크리시스(krisis)’라는 헬라어에서 기원한 용어인데, 본래 ‘구분’, ‘분별’, ‘판단’, ‘선택’, ‘결정’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선택과 판단’이라는 크리시스의 본래 의미와 우리가 지금 ‘위기’라고 정의내리는 의미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왜 ‘선택과 판단’이 ‘위기’로 이야기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올바르게 판단해야 할 것을 온전하게 판단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기에, 선택과 판단이라는 뜻의 ‘크리시스’가 오늘날 ‘위기’라는 의미로 전승된 것이다. 따라서 ‘위기의 본질’은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무엇이 본래적인 것인지에 대한 선택과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직면하는 결과이며, 곧 ‘본질의 위기’인 것이다.

2) 장일순(1928~1994) : 사회운동가. 원주 지역에서 지학순 주교와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전개했으며 1970년대 후반 무렵부터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을 주창하고 한살림운동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난초 그림 등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다.

3) 강수돌, "살림의 지혜를 구하고 싶은 등불 같은 어른의 삶”, 『중등우리교육』, 2008. 160~151. / 김익록,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우리교육』, 2011. 150~157. / 윤형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기억함, 10주기를 맞아 제자가 띄우는 글”, 『한겨레21』, 2004. 510호. / 최종덕, “생명에는 권력이 없다”, 『실천문학』, 2008. 246~261. / 최혜성. “세상 명성에 연연하지 않으신 무위당”, 모심과살림연구소 대담, 2010. / 모심과살림연구소 누리집 http://www.mosim.or.kr / 무위당사람들 누리집 http://www.muwidang.org

4) 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시골생활, 2010. 25쪽.

5) 위의 책, 105쪽.

6) 위의 책, 162쪽.

7) 위의 책, 97쪽.

8) 위의 책, 94쪽.

9) 장일순, 『노자이야기』, 삼인. 2003. 64~65쪽.

10)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2009. 32쪽.

11) 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53쪽.

12)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115쪽.

13) 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70쪽.

14) 장일순,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36~37쪽.

15) 위의 책, 45~46쪽.

16) 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143쪽.

17) ‘‌자기(self)’란 오직 공공이성(public-common reason, 公共思惟)을 통해 사유하는 주체이며, ‘자기(self)’란 오직 공공존재(public-common being, 公共存在)로서 실천하는 주체이다. 자기란, private reason을 가진 주체도 아니며, private being인 주체가 아니다. 자기란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이고 전일적인 존재이다. 타자로서의 자기이며, 자기로서의 타자인 것이다.

18) 장일순, 『노자이야기』, 635쪽.

19) 장일순,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160~161쪽.

20) 위의 책, 201쪽.

 

 

  

모심과 살림 9호(2017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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