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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모심의 눈) 뜨거운 사회, 차가운 사회
2019-01-03 15:43:00

<모심의 눈>

뜨거운 사회, 차가운 사회

임채도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한살림과 남북평화의 시대 

촛불항쟁과 문재인 정부의 출범 이후 우리 사회는 단순한 정권교체 이상의 커다란 구조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 가운데 2018년 상반기 동안 국내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최대 사건은 아무래도 4.27 과 5.26 두 차례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6.12 북미정상회담 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7월 11일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 이후 10여 년간 남북관계는 금강산 관광 등 교류협력사업의 전면 중단, 미국과 UN의 대북제재, 북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 대응, 개성공단 폐쇄 등 바늘 하나 꽂을 틈 없는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런 10 년간의 대립과 갈등이 올해 상반기 북의 지도자 김정은의 신년사를 필두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남북과 북미간 정상회담 등 숨가쁜 상황전개 속에서 한반도 비핵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는 단계로 급진전하고 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지탱해 왔던 모든 결박들이 일순간 테이블 위에서 한꺼번에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올해 가을에는 다시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9월 UN총회에서 한반도 냉전질서의 당사자들이 평화와 공존번영을 선언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가 나올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장애와 우여곡절이 없지 않겠으나 섣부른 낙관도 비관도 멀리하고, 지금부터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이 평화의 흐름을 완전하고도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임을 모두가 각성해야 할 때다.

사실 분단과 통일 문제는 한살림에도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1989년 발표된 <한살림선언>은 민족의 분단을 “산업문명의 비극적 운명이 집약적으로 연출된 무대”로 규정한다. 지난 세기의 단선적 진화론, 기계론적 생명관이 낳은 제국주의적 침략과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이 자연 그대로의 한반도를 기하학적 선으로 끊어놓 음으로써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인 우리 민족을 기계적 구조와 질서 의 반생명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살림선언>은 이 민족의 비극적 운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민족 내부의 생명운동과 이를 둘러싼 외적 환경이 공진화共進化하면서 일정한 분기점을 넘기면 자기한계를 초월하는 새롭고 높은 질서로 나아간다고 본다. 이 새롭고 높은 질서는 우리 민족만의 재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 모든 민족, 전 인류, 전 생태계가 한 형제, 한 동포, 한 생명 이라는 문명적 각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통일운동은 생명운 동, 문명 전환운동으로 합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한살림선언의 기본입장이다.

<모심과 살림>은 우리 사회가 실로 중대한 전환을 맞이하는 이 번호에서 “평화의 시대, 남북 농업협력의 길”이라는 기획특집을 마련했다. 1990년대 중반 북의 연이은 흉작과 ‘대기근 사태’ 이후 이남의 농업, 농민단체를 비롯 각계 시민사회가 발기하여 주도해온 남북 의 농업협력사업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이후 사실상 중단된다. 분단 70년 동안 남북의 산업기반이 많이 바뀌었지만 같은 땅,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조상으로부터 전래된 농업은 민족감정이나 정서, 문화적 동질성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분야이며, 나아가 남북협력의 현실적·기능적 측면에서도 상호 협력의 실효성이 가장 크 게 기대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북의 입장에서는 GDP의 약 25%를 차 지하고 전체 인구의 1/3이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는 농림어업 분야의 발전 없이 “경제와 인민생활의 획기적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북의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영농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남측의 지원만큼 효과가 높은 것은 없다. 남측도 국내 쌀의 수급 불안정과 그에 따 른 정부의 재정지출을 줄이고 농업협력을 포괄적인 경제협력으로 확대하여 평화로운 한반도 상황을 만드는 데 남북농업협력이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기획특집 인터뷰에 응한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은 개성공단이 폐쇄되기 전 공단의 기업지원과 운영실무를 총괄했고 폐쇄된 이후에는 개성공단의 재개를 위해 헌신해 왔던 2세대 북한학자이자 자타가 인정하는 남북경협의 전문가다. 인터뷰에서 흥미롭게도 김진향 이사장은 한살림의 대북협력사업을 적극 권고하고 있다. 남측에서 자본의 논리가 아닌 협동조합의 원리를 가진 단위가 남북 경협에 참여한다면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에서 중요한 기회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북측은 개방형 경제체제로의 전환 국면에서 발생할 충격을 완화하고 북측 경제의 ‘현대화’를 이루는 데 신뢰 할 수 있는 파트너를 얻을 수 있고, 남측의 생협 등 사회적경제 진영 으로서는 시장과 협동운동의 공존모델을 소개하고 개발만능/성장 만능의 실패한 ‘근대화’가 아니라 경제-사회-환경이 공존번영하는 성찰적 현대화를 한반도 전 범위에서 실현해나가는 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남북 농업협력사업을 현장에서 오랫동안 실천해온 장경호 녀름연구소 소장은 남북관계의 단계별 발전에 조응하여 민족 농업 공동체 실현을 위한 농업협력의 단계별 발전전략에 입각한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개성과 금강산지 구에서 있었던 남북 공동영농사업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소개하면서, 화해협력단계에서 남북연합단계로 나아가는 현단계에서 남북 식량교역, 통일 밥상나눔운동 등 상호보완적인 남북 농업구조를 구 축해 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한반도 평화시대가 열리는 이 시점에서 한살림이 펼치고 있는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의 지향도 이제 생산과 소비 의 경계를 넘어 민족의 건강한 밥상을 지키고, 남과 북의 자연과 농 업을 유기적으로 조화시키며, 모든 생명들이 평등하고 존중받는 한 반도와 세계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실천적 과제를 받아 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페미니즘, 그리고 공감과 치유의 힘

촛불항쟁 이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또 하나의 쟁점은 페미니즘이다. 미국에서 유색인종 여성과 청소년 대상 성폭력 피해 고발을 위해 해시태그를 달고 시작된 미투(#Me too)운동이 2018년 1월 한국에서 한 여성 검사의 성폭력 피해 발언을 계기로 문화계, 정 치계, 학계 등 사회 모든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연출가, 영화감독, 시인, 교수, 도지사, 유명 연예인들의 성폭력 가해행위에 대한 폭로와 고발에서 시작해 최근에는 ‘홍익대 누드모델 몰카사건’을 계기로 서울 대학로에서 여성인권 주제의 단일 집회로는 최대 규모의 여성시위가 전개되기도 했다.

최근의 페미니즘 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과거 한국의 ‘여성해방운 동’과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과거 주로 진보진영의 인텔리 여성들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되었다면 지금은 ‘여성일반’으로 대중 화되었다는 점이다. 5월부터 7월까지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를 주최한 ‘불편한 용기’는 인터넷 카페와 SNS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자발적 네트워킹그룹이다. 둘째, 운동의 슬로건은 전통적 페미니즘 이론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신체 노출 차별금지’, ‘임신중지 합법화’, ‘성차별적 수사 반대’, ‘불법촬영 처벌’ 등 여성들이 겪는 구체적 성 차별, 성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거부와 저항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점 차 기업, 언론, 경찰, 청와대 등 성차별적이며 남성중심의 권력 구조 에 대한 분노와 공격으로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셋째, 이 운동은 2016년 촛불항쟁의 연속선상에 놓여있으면서 동시에 촛불항쟁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연속적이라는 의미는 촛불항쟁 승리 속에서 확 인한 공화국의 원리, 평등한 시민권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라는 측면이다. 또한 단절적이라는 의미는 이 운동이 단순히 ‘갑질’ 이나 ‘성폭력’에 대한 피해고발이 아니며, 촛불항쟁의 메커니즘으로 설명되거나 수렴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고착화된 성차별 구조가 낳 은 문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운동은 촛불항쟁의 안내를 받았 지만 그 방향과 목표는 완전히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제 막 출발한 이 새로운 여성운동은 거대한 남성중심의 권력 체계는 물론, 미시적 사회권력, 기득권화되어 체제 내로 포섭된 제도권 페미니즘 과의 구별 짓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미래를 정립해 나갈 것이다. 

물론 그 미래가 저절로 오지는 않는다. 외적으로는 일부 남성 집단의 혐오적 시각에서부터 좌/우, 보수/진보의 기성 권력의 관점이 착종되 면서 좌절을 강요받을 수 있고, 내적으로 운동 목표와 방향을 둘러 싼 갈등,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균열, 운동의 확장성과 순수성 논란, 참여 주체의 피동성 등으로 곡절을 겪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 러나 성차별적 권력 구조가 존재하고 그로 인해 이 땅 절반의 여성이 ‘인격살인’을 당하는 현실이 있는 한, 좌절은 극복되고 곡절은 치유될 것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모심과 살림>은 남북농업협력에 이어 “살림운동과 여성주의”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특색 있는 글을 묶었다. 먼저 “생협운동과 여성 주의” 원고에서 박임성아 선생은 생활협동조합과 여성주의는 활동 과 조직에서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보고, 특히 주부들이 실제 생협 활동 경험을 통해 주체적 여성활동가로 성장하며 여성주의 리더십 을 습득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그는 ‘생협운 동 안에서 여성주의는 진화하고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생협 조직의 특성상 많은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지역사회, 환경, 농업 문제라는 활동 주제만큼이나 여성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려는 의식적 노력은 부족하다고 진단하고 조합원 교육 등을 통해 여성주의를 생협 조직, 문화, 운동에 뿌리내리는 노력을 강조한다.

“미투운동이 불러온 질문 - 한살림 실무자들이 말하는 살림의 조직문화” 좌담회는 한살림연합과 회원생협의 1년~15년차 여성/남 성 실무자 5명이 나누는 대화를 기록했다. 익명의 실무자들은 “한살림에서는 공개적인 미투발언이 없었어. 그런데 그런 발언이 있어야 정상이고 그게 가능한 곳이 더 열려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하고 “(한 살림이) 농업운동, 사회운동으로서의 진보적인 면이 있다면 조직문화에서는 확실히 보수적이고 아직 가부장적인 모습이 남아있는 곳” 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또한 “권한이 있거나 연차 등이 많은 남성들 이 선후배 형동생 관계로 일을 풀어가려는 태도”, “논쟁을 꺼려하는 문화”, “지역경험도 많고 아는 사람이 많은” 남성 선배와 일하는 여성 실무자의 어려움 등을 문제로 지적한다. “수직적이고 고압적인 문화가 없는 반면…(중략)… 평등한 것 같지만 공동체가 주는 무서운 면”이나 “후진적이고 올드”한 느낌(?)까지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았 다. 한편 한살림이 “보수적인 문화에 더해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겠다는 열정이 있고, 다른 조직들에 비하면 대체로 선하고 배려하려 애쓰는 마음”도 많고, “오래된 조직일수록 어떤 고착화된 문화가 있기 마련인데 그런 점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변하고자 할 때 변할 수 있다는 유연함”을 긍정적 요소로 이해하기도 했다. 또 “훌륭한 리더 한 명에게 맡기지 말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여러 모임들을 만들어간 다면 진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살림운동이 중요하게 생각해온 가치들이 여성주의에서 제기하는 변화의 흐름과 잘 만날 때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알려진 바대로, 미투운동은 2006년 미국 여성 인권운동가 타라 나 버크Tarana Burke가 13세의 여아로부터 잔인한 성폭력 경험을 들 었을 때 충격으로 말문이 막힌 후 겨우 “나도 그래Me, too”라고 대답 한 데서 출발했다. 성폭력 피해자나 차별피해 장애인, 고문 피해자 등과 같은 인권침해 피해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과 이 해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폭력과 차별로 인해 받은 가장 큰 피해가 가까운 가족과 이웃 공동체로부터의 격리와 거리두기, 그리고 무엇 보다 자기에 대한 불신과 정체성 파괴이기 때문이다. 인권피해자들 에게는 어떤 전문가보다 같은 피해자들과의 연대와 정서 나누기가 중요한 치유자 역할을 한다(물론 매우 정성 어린 준비와 개입이 필요하다). 거대하고 강력해 보이는 가해자, 가해 권력 앞에서 피해자 들은 사건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사건을 덮음으로써 극단 의 수치심과 죄책감, 고통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물론 그러한 도피는 일회적인 망각에 불과하다. 피해자들은 평생에 걸쳐 수시로 출현하 는 재연과 재경험, 과도한 각성상태, 회피반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미투운동에서 촉발된 새로운 여성주의 운동이 주목할 부분도 치 유의 영역이다. 미투라는 한마디 말은 어떤 수완 좋은 전문가의 백 마디 조언보다 큰 공감과 치유의 울림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차 별, 성폭력은 결코 용기 있는 소수 피해자들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 다. 자기 자신과 내부 조직에 대한 성찰과 경청할 수 있는 열린 자세 가 준비되어야 한다. 공감과 이해를 통한 상처의 치유는 새로운 여 성주의 운동을 더 확장시키고 강하게 단련시킬 것이다.

 

차가운 사회와 뜨거운 사회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변 화보다는 사회를 그대로 유지·지속시키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고 부른다. 이는 사회적 무질서entropy가 거의 생산되지 않는, 역사의 시계가 멈추어버린 듯한, 마치 원시부족사회 처럼 “자신의 초기 상태를 무한히 유지하는 사회”다. 그리고 반대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으로 내부 온도의 차이가 큰 사회”를 ‘뜨거운 사회’로 구분한다. 뜨거운 사회는 사회적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무질 서와 질서의 대립이 격화되는 사회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심리적·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투쟁 속에 고통받게 된다. 사회의 공통분모로서 문화가 설 자리는 점차 축소되고 도덕적·사회적 가치나 조화와 합의 라는 사회적 연결고리는 파괴된다.

차가운 사회는 비록 기술적·경제적 수준이 낮지만 그 속의 인간은 자연세계와의 관계에서 더 편안하고 충만한 감정을 가질 수 있 다. 인간은 문화 아래에 있고, 문화 위에는 초자연성이 존재한다. 인간은 정령이나 토템과 같은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감 속에서 세계를 받아들이고 전일성을 경험하게 된다. 반대로 뜨거운 사회는 막대한 자원과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높은 성장을 달성하지만 그 내부의 인 간은 성과와 경쟁에 지치고 신경증과 불안이 부풀어오르는 상태가 되어간다. 의사결정에서도 차가운 사회는 조화와 합의를 전제로 만 장일치를 추구하고, 뜨거운 사회는 효율성 원칙 아래 다수결이 지배 적이다.

그리 보면 우리 사회는 매우 뜨거운 사회이다. 반공과 안보를 앞 세운 권위주의적 지배질서와 남성중심의 불평등한 성권력 질서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가운데 촛불항쟁과 페미니스트들의 전복의 에너지가 공존하고 있다.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진보할 것이 라는 믿음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소비를 하면서 더 많은 편리 와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과학기술혁명이 이 모든 것 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한편에 있고, 동시에 소득불평등, 양극화, 실업대란 앞에서 적당히 우려하고 적당히 분노할 줄도 안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제도 아래 소수의 복종과 희생은 당연하다는 것도 상식이 된 지 오래다. 그렇게 소득 3만불 시대가 왔고 세계 5위의 경제대국이 눈앞에 열렸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출산율은 세계 최저, 노인빈곤율과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소득불평등이 미국 다음으로 극심한 나라다. 지표상으로 이미 지속가능한 사회라 하기 어 렵다. 상태가 이러함에도 최저임금 1만원에 나라 전체가 망할 듯이 우려하고 반발하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이 뜨거운 사회의 온도를 조금 낮추면 어떨까? 그를 위해서는 첫째, 문화의 힘을 경제와 생산 영역에도 적용해야 한다. 문화는 인간 이 자연을 개조하면서 형성한 정신적·물질적 총화라 한다. 경제와 생산 영역도 당연히 문화의 장에서 합의되고 조절되어야 한다. 생산 과 경제의 영역에서 뜨거운 사회는 필요보다 경쟁과 생존이 더 큰 목표가 되고, 자연의 한계보다 욕망의 무한성에 의존하게 된다. 욕망을 향한 무한경쟁은 무절제한 자원의 동원과 낭비로 이어지고 결 국 지속불가능이라는 반문화적 결과를 낳는다. 지속가능한 경제, 생명을 위한 생산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인간, 인간-자연이 하나의 생명고리라는 총체성의 원리에 기반해야 한다. 경제와 생산이 마치 문 화, 정치, 성적 지배질서와 무관한 듯 특혜를 베풀었던 시대와 단절 하는 것이 우선 시급한 과제다.

둘째, 인간은 문화를 통해 개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만이 가 지는 심리적·사회적 도덕성과 미덕을 길러낼 수 있다. 뜨거운 사회, 경쟁의 문화가 낳은 것 중 하나가 독단성, 아집, 자기중심성이다. 계 몽된 자기이해Enlightened self-interest는 자아와 타자의 균형을 확보 하는 것이 더 나은 자기이익으로 귀결된다는 윤리적 발견이다. 비록 단기적으로 개인 이익을 달성하지만 장기적으로 자기파괴로 이어지 는 것은 자기이해가 아니라 자기분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 간은 경쟁, 승패, 생산, 이윤만으로 동기화되는 것이 아니며 자기와 초월적 존재와의 교감, 타자와의 가까움proximité, 도덕적 만족감, 같 이 하는 노동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크다는 것을 안다. 앞서 언급한 레비 스트로스가 든 사례 중에 뉴기니 한 원주민 부족의 축구 이야기가 있다. 원래 선교사가 와서 부족민에게 가르친 축구는 정해진 시간 동안 승패가 확인될 때까지 시합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부족은 룰을 바꾸어 승패가 균형이 이룰 때까 지 축구경기를 계속했다. 경기하는 두 집단 간에 승패가 같아지고 승자와 패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경기를 마쳤다. 경쟁과 승 패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협동의 즐거움과 미덕은 서늘한 성찰의 그 늘을 제공한다.

셋째, 국가와 관료행정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연대 는 느리지만 공고하다. 국가와 관료행정체제는 다수결 위임민주주의 의 결과인데 다수결 민주주의는 뜨거운 사회를 더욱 뜨겁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현대 국민국가 수준에서 다수결 위임민주주의의 불가 피성을 용인한다고 해서 이를 마치 보편적 당위인 것처럼 여기고 모 든 하위 공동체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책임할뿐더러 민주 주의의 발전에 유해하기까지 하다. 특히 협동조합에서는 - 무임승차 자free-rider를 제외하고 - 공동의 대의를 마련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 이 반드시 필요하다. 협동조합에서 위임과 다수결에 이르기까지 상 호이해와 공동의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만장일치를 위한 차 가운 노력은 조롱받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다수결의 꽃방석 위에 걸 터앉아 국가와 관료행정체계의 효율성에 자기운명을 맡기는 어리석 음이 초래할 위험성을 잘 인식해야 할 것이다. 

 

<모심과살림>12호(2018 하반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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