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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이후의 삶 - 칸노 치카게 모녀의 이야기
2016-03-11 14:05:00

 

칸노 치카게 씨와 딸 칸노 한나 씨는 후쿠시마 현 후쿠시마 시 출생으로, 2011년 3월 11일 원전사고 이후 8월까지 후쿠시마 시에 거주하다 피폭을 피하기 위해 교토로 이주하였고 현재까지 탈핵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출처: 전북환경운동연합)

 

지난 2월 22일에 방한하여 광주 무등공부방과 전주녹색당,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주최 학술대회에서 각각 강연이 있었습니다.

아래는 소개와 강연 원고를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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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노 치카게(菅野 千景, kanno chikage)

후쿠시마 현 후쿠시마 시에서 태어났다. 남편, 두 딸과 함께 2011년 8월까지 후쿠시마시에서 지냈다. 2011년 3월11일에 지진을 겪었다. 살던 집은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약 60km 떨어져 있었는데, 방사선량이 실내에서 0.7-1.2마이크로시버트, 마당에서 2.0-6.0마이크로시버트, 빗물받이 밑에서는 10마이크로시버트 이상 방사선량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방사능의 영향을 피해서, 같은 해 여름방학 때 아이들과 ‘고! 고! 두근두근 캠프’의 보양에 참가하였다. 보양에서 일단 후쿠시마로 돌아와 8월 30일에 남편을 후쿠시마에 남겨두고, 딸과 함께 교토로 피난을 떠났다. 2012년8월에 남편이 교토에 직장을 마련하여 가족 모두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

칸노 한나 (kanno hanna)

후쿠시마 현 후쿠시마 시에서 태어났다. 지진 피해를 겪고, 원전사고의 영향을 피해서 2011년 7살에 교토로 피난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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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칸노 치카게(菅野千景)입니다.

저는 후쿠시마 현 후쿠시마 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후쿠시마에서 결혼하고 두 딸을 얻어, 남편과 넷이서 행복하고 평온하게 지냈었습니다.

 

2011년 3월11일 오후 2시46분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큰 딸은 초등학교 6학년, 작은 딸이 1학년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두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있었습니다. 학년말에 하는 선생님과의 면담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제 순서가 되어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진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여러 번 지진을 경험했지만,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크기의 진동이었습니다. 즉시 선생님과 함께 교정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수영장의 물이 크게 파도치며 교정까지 넘쳐흘렀습니다. 혼자서는 서있을 수가 없어서, 다른 어머니들과 서로 의지하며 어떻게든 서 있었습니다.

큰 진동이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좀처럼 학교건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금 진동이 가라앉았을 때 어머니들과 함께 학교 건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갔습니다. 학교 안에는 꽃병과 책들이 떨어져 있고 천장도 벗겨져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3층 강당에 있었습니다. 그랜드피아노 옆에서 선생님 곁에 모여 마치 부모새의 날개로 감싸 안은 아기새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딸을 찾았는데, 보니 울고 있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과 같이 밖에 갈 수 있겠니?’하고 묻자 딸아이가 ‘응’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기에, ‘엄마는 뒤에 갈 테니까 먼저 선생님이랑 나가렴’하고는 밖으로 대피시키고, 저는 혼자 남아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보자기 대신에 펼쳐서, 남아 있던 아이들의 코트를 전부 모아 품에 안고 교정으로 나갔습니다.

그날은 매우 추운 날이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지축이 흔들려 천둥이 치고 싸락눈이 내리며 눈보라가 쳤습니다. 아이들에게 코트를 입히고 교정의 안전한 장소에 모여서 마중 나온 가정 등, 각자가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근방에 사는 아이들을 제 차에 태워 집에 돌아갔습니다. 마을은 정전이 되어 신호가 모두 꺼져 있었지만, 모두가 신중히 차를 운전하며 서로 양보하여 사고 없이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지진이 나자마자 직장에서 학교로 달려와 준 남편이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거실에 들어서자 식기선반부터 식기와 유리그릇이 떨어져 바닥에 쑤셔 박혀 있고, 사진이 넘어져서, 이미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던 구역은 가스는 끊기지 않았지만, 전기는 3일간, 수도는 8일간 끊겼습니다.

다음날 아이들과 급수차에 줄을 섰습니다. 물을 받는 데 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후에 아이들을 시어머니께 맡기고 집을 정리하러 갔습니다. 그때 이미 후쿠시마에 있는 도쿄전력의 원자력발전소가 큰 사고를 내고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는 현에 원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사고와 고장, 플루토늄 열사용 문제 등은 자주 기사화되었지만, 저희 집은 원전에서 6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별로 관계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무관심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도쿄전력의 원전은 결국 4기의 시설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원전사고가 일어난 직후에는 많은 학자와 전문가, 코멘테이터, 저널리스트들이 나와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시버트, 퀴리, 베크렐 등 지금까지는 들어보지도 못한 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매 시간마다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매번 ‘바로 건강에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문제없다’, ‘사고수습까지 1년 정도 걸린다’와 같은 내용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원폭이 떨어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서 [핵문제를] 잘 아는 사람(有識者)과 자원봉사 할머니들이 후쿠시마에 왔습니다. 그분들은 ‘걱정할 것 없어, 괜찮아’, ‘원폭이 떨어졌어도 할머니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있잖아요’라며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단지 우리들을 안심시키려 하였습니다.

남편의 매제는 미국인입니다. 그는 ‘빨리 후쿠시마를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몇 번이고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휘발유도 없고, 큰 딸의 졸업식을 기다리고 있어서 이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어용학자라는 학자가 있다는 것,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몰랐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과 목숨을 지키지 않고 국가나 일부 권력자 편에 서는 학자가 있다는 것 등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전문가와 국가, 그리고 현에서 하는 말이니까 틀림없어’라며, 어디선지 그들의 말을 믿고 싶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혼란한 와중에 의심이 들며 완전히 믿지는 못하면서도, 그래도 잘 알지 못하니까 걱정되고 불안해서 그들의 말에 의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저는 정부와 행정에 농락당하면서도 누가 진실을 말해주는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은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시간을 내서 방사능과 그에 수반된 건강피해 등에 대한 강연회와 공부모임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학자, 연구자이면서도 자신의 지위나 명예, 금전보다는, 현재 후쿠시마의 상태와 방사능에 대한 것, 방사능 오염 상황과 원전사고 상황[을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방사능으로부터 우선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핵과 원자력이 뛰어난 에너지라고 믿어, 뜻을 품고 연구해 왔지만, 알면 알수록 이것이 인간과는 공존할 수 없으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것임을 알아채고, 바로 원전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원전을 멈추지 못한 것을 매우 원통해 했습니다.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말하기 전에 사죄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분들이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우리들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사고 후에 연간 피폭량이 변경되었습니다. 안전기준을 1밀리시버트에서 20밀리시버트로 올리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위원을 맡고 있던 도쿄대학의 교수가 4월에 ‘아이들을 그런 기준에 맞춰 생활하라고 하는 일은, 저는 할 수 없습니다’며 울며 회견을 가졌습니다. 그 회견을 보고 비로소 우리 부부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이들을 키울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사능 오염이 적은 곳으로 피난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일본의 끝에서 끝까지 찾아보았습니다. 쉬는 날에는 차를 몰고 임대주택을 보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난 가기 전에 여름방학 동안 오염이 적은 장소로 보양(保養)을 가기로 하였습니다.

교토의 세이카 대학교(精華大学) 졸업생과 재학생이 시작한 ‘고! 고! 두근두근 캠프’라는 보양캠프가 있습니다. 보양(保養)이란 방사선량이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방사선량이 적은 곳에서 일정기간을 보내는 것으로, 방사선으로 상처받은 몸이 회복되는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체르노빌 사고 후, 벨라루스에서는 국가정책으로 사고 후 30년간 계속 실시되고 있습니다.

 

교토는 저희 집에서 70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후쿠시마에서는 한여름의 더운 시기에도 피폭을 피하려고 긴 팔에 긴 양말, 마스크를 한 모습으로 등하교 등의 외출을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창문도 열지 못하고 에어컨도 없어서 교육위원회에서 한 교실에 네 대의 선풍기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더운 교실 안에서 단지 뜨거운 바람을 돌릴 뿐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밖에서 놀 수도 없었습니다. 유월이 되자 방사선 오염이 심한 학교부터 순서대로 학교 건물 외벽을 세정하고 교정의 표토를 제거하는, 이른바 ‘제염(除染)’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염작업을 해도 아직 창문을 열 수 있는 시간이나 밖에서 노는 것은 제한되었습니다.

딸아이들이 보양 차 교토에 오고부터는 마스크도 벗고 여름에 걸맞는 복장으로 마음껏 밖에서 놀았습니다. 풀과 잎사귀, 나무를 만지고, 물장난을 하며 보양에 참가한 아이들은 모두 너무나 활기가 넘쳤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이게 당연한 아이들의 본래 모습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도 후쿠시마에 있을 때에는 원산지를 속이는 경우도 있는 가운데, 매일 식사를 만드는 데에도 오염되지 않은 식재료를 찾아야 했는데, 정말 안심하고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안은 채로 식사준비를 하였습니다. 아무리 날씨가 화창해도 세탁물은 집안에 널고, 환기를 시킬 수 없어서 집안도 약간 곰팡내가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활에 너무 숨이 막힌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교토에 와서 저는 원전사고 후 처음으로 심호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후쿠시마의 환경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식재료는 안전농산공급센터에서 보낸 무농약 유기야채 등이어서, 안심할 수 있는 맛있는 식재료로 만든 식사를 하였습니다. 반 달 정도를 교토에서 보내고 캠프 후반에는 남편도 후쿠시마에서 와서 합류하였습니다.

 

보양을 마치고 후쿠시마로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우리는 ‘교토로 피난 가는 것은 좀 멀어서 어렵겠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몇 번이나 여진이 이어지며 원전이 또 폭발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 수습되지 않은 상황에서 후쿠시마에서 사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성장하기 어렵다고 느껴, 역시 교토로 피난을 가기로 결심하고 8월말에 두 딸을 데리고 교토로 왔습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둘 수 없어서 후쿠시마에 남았습니다. 이삿짐을 꾸릴 때도, 아이들을 데리고 후쿠시마를 떠날 때도, 우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피난하고 나서, 매달 남편이 우리를 만나러 교토로 와 주었습니다. 아빠가 만나러 오는 것을 아이들과 함께 너무나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전화로 이야기해도 역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정된 시간과 집안의 경제사정 때문에 남편은 항상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야간버스로 왕복을 했습니다.

그런데 2012년이 되었을 즈음, 남편이 보러 오는 것이 힘들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아이들도 아빠를 보고 싶다며 항상 만나길 기대하는데, 보러 오는 것이 힘들다는 말을 꺼낸 것입니다. 그것은 만날 수 있다는 기쁨보다 헤어지는 외로움이 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피난한 게 잘못된 일은 아니었을까’라든가, ‘후쿠시마에 있었으면 이런 고통은 맛보지 않았을 거 아닌가’라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문자답 했습니다. 일 년 후인 2012년 8월에 남편이 교토에서 직장을 찾아 교토로 올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가족이 모여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집 수입이 절반 이하로 줄었고, 전혀 모르는 땅에서 일하는 것도 남편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올해로 사고가 난 지 6년을 맞이합니다. 후쿠시마 아이들의 건강피해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갑상선암만 해도 150명을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중에서 악성으로 진단받아 수술한 아이들이 100명 이상이 됩니다. 암이 갑상선에서 다른 곳으로 전이된 아이들도 있습니다. 갑상선암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도 어른도 심근경색과 백혈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우리 부부가 아는 사람들과 동급생도 몇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도 작년에 양쪽 눈이 모두 백내장에 걸려 수술을 받았습니다. 후쿠시마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밖에서 놀 수 없어서 운동량이 줄었기 때문에 비만아동도 늘었고, 수업 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금방 불안해하는 아이들도 늘었습니다.

국가와 현에서는 이러한 아이들의 건강피해에 관해서, 사고 후 인과관계 등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조사해 보지도 않고 방사능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기로, 2012년 가을 ‘후쿠시마 현민 건강관리조사위원회’에서 이야기해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원전에서 20km권내의 시쵸무라(市町村: 시군읍)와 이이타테무라(飯舘村)는 강제로 피난해야 하는 ‘피난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알려주지도 않고 피난을 강요받았습니다. 저희 집은 피난구역 밖입니다. 물론 매달 받는 보상도 없고, 국가와 행정으로부터는 ‘살아도 괜찮은데 멋대로 걱정하고 멋대로 밖으로 떠난 거죠’란 소리를 듣는 취급을 받습니다.

작년 워싱턴포스트지는 ‘유일한 피폭국가로써 세계에 핵무기폐기를 호소해 온 일본이 좁은 국토에 55기의 원전을 늘어세운 핵 대국이 되어있었다’며 정상이 아님을 지적하였습니다. ‘스스로가 떨어진 원폭의 몇 천, 몇 만발 분에 맞먹는 핵물질을 원자로에 보유하고 있는데, 위기관리가 되고 있지 않다. 정부가 정보를 계속 은폐해온 결과다’라며 매우 격렬하고 적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원전사고 때문에 가족과 친구, 지역 커뮤니티가 크게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부부가 서로 이야기를 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이혼하고 마는 부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지키려는 생각인데도 반드시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것도 그 부부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5년간 피난을 떠난 사람, 피난가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 피난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들은 ‘후쿠시마를 버렸다’든가 ‘후쿠시마를 버릴 수 없다’든가 ‘도망갔다’ ‘도망가지 않는다’는 말들을 듣습니다. 어떤 말이든 진심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후쿠시마를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후쿠시마에서 도망친 것이 아닙니다. 방사능 오염에서 도망친 것입니다.

서로 상처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고야 마는 것은, 아직까지도 도쿄전력과 국가가 자신들이 저지른 악을 제대로 인식하고, 피해를 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사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전은 국가가 추진하고 있습니다. 원전을 만들기 위해서 가난한 어촌에 돈을 뿌리고, 교묘한 말과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당시에 돈을 받은 사람은 자신들의 마을이 도쿄처럼 번창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빈곤한 마을이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보면, 그다지 풍요롭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음대로 원전입지후보지로 올려버린 것만으로도, 검소하면서도 정말 행복하게 생활하던 사람들을 분단시켜 버렸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 파괴되어 버리는 것. 원전이란, 핵이란 그런 것임을, 전혀 무지했던 제가 부끄럽지만, 이 때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후쿠시마 원전이라는 명칭만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도쿄에서 사용하는 전기로, 도쿄전력 소유입니다. 후쿠시마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원전사고의 2차 피해, 3차 피해를 우리 집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후쿠시마와 교토에 헤어져 있어도 서로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것 등은 생각하지 않고, 기쁜 일은 물론이거니와 슬픈 일도 괴로운 일도 뭐든지 다 이야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약한 인간입니다. 이런 커다란 난관을 다 짊어질 수 있을 리 없습니다. 남편이 없는 가정, 일상이 없는 일상, 떨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라도 가족끼리 무엇이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마음에 여유가 없는 피난생활을 보내기 위해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인 것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도 어려운 생활을 강요받는 아이들의 기분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작년 말을 시점으로, 피난민이 약 십오만 명입니다. 교토에는 많았을 때가 약 팔백 명, 현재는 약 오백 명 있습니다. 정치가 중에는 아직도 ‘원전사고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고 후 피난지시가 내려진 지역에는 혼자 사는 노인도 있었습니다. 장애가 있어 사고를 알지 못한 사람, 움직일 수 없어 도움을 기다리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피난지시가 내려진 지역에는 큰 병원도 있었습니다. 라이프라인이 끊어진 가운데 도움을 받지 못하여, 그 병원의 입원환자만 해도 예순 분이나 그대로 돌아가셨습니다. 츠나미와 가옥이 무너짐으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분들도 그대로 방치되었고, 기동대와 경찰, 소방대원, 자위대등도 철수시켜버렸기 때문에 그냥 보고도 죽게 내버려둔 것입니다. 수색이 재개된 것은 한 달이 지난 사월 중순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절대로 큰 뉴스가 되지 못합니다. 모든 정보가 조작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존귀한 생명이 그렇게 박탈되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알지 못한 채, 올바르게 알려 하지도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병자이니까, 노인이니까, 장애가 있다고 해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생명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도 사고가 일어난 원전에서 피폭되면서도 목숨을 걸고 가혹한 상황 속에서 작업하고 있는 많은 노동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지금도 자살자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 부부, 아이들, 이렇게 4대가 생활하던 가족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난처의 가설주택은 좁기 때문에 가족이 모두 헤어져서 살게 되어,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리고 치매에 걸리거나, 고독한 나머지 죽고 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때 행정에서는 무엇을 해 주었는가 하면, 고민을 가진 사람을 상담할 사람을 몇 백만 엔을 들여 증원하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원래처럼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도록 알아보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동일본에서는 ‘부흥’이라는 두 글자에 들끓고 있습니다. 부흥예산을 사용해서 유명한 가수나 스포츠 선수, 아티스트를 데리고 와서 이벤트를 합니다. 그리고는 활기가 돌아서 부흥의 기폭제가 되었다며 기뻐합니다. 그때만의 불꽃놀이 같은 행사로 부흥이 될 리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원전, 핵, 방사능으로 인해 빼앗겨버린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합니다]. 자유, 꿈, 미래로 이어지는 모든 것, 가족, 동물, 풍부한 자연, 식물, 일, 서로 사랑하는 일, 모든 생명,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습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길고 긴 시간을 들여 계속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더 이상 잃는 분이 없도록, 지키고 키워가는 것. 진정한 부흥은 모든 것을 원래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만큼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쿄전력은 작년까지 2년 연속 5210억 엔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도쿄전력은 사고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5210억 엔이나 벌어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원은 실직하는 일도 없고, 월급도 지급되며 보너스도 받으면서 뭐 하나 변한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집은 보양과 피난, 남편과 헤어져 살던 1년간 들인 교통비와 이중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필요하게 된 생활도구, 집은 재작년에 매각해 버렸지만, 피난해서 살지 않았던 동안에 계속 지불했던 세금과 대출금, 그리고 받을 필요도 없었던 정신적인 고통 등, 실제로 발생한 손실을 인정받기 위해 ADR(원자력손해배상분쟁해결센터)에 청구하였습니다. 청구는 단호히 거부당했습니다.

다음으로 아직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 상황에 있다는 증거를 제출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후쿠시마의 집 안팎과 통학하고 있던 학교 등, 생활권의 오염상황 등 방사선량을 측정해서 제출하였습니다. 하지만 피난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피난한 것이므로 일체 지불할 수가 없다는 답신이 왔습니다. 다음으로 다시 한 번 같은 대답이 왔기에, 잘못된 인식에 대한 설명과 반론을 제출하자, 비로소 도쿄전략은 화해안을 내놨습니다. 그 금액은 청구액의 약 5%였습니다.

후쿠시마도 2012년부터 삼 회에 걸쳐 원전사고가 일어나 생긴 손해를 도쿄전력에 청구하였는데 약 40%정도를 지불받았습니다. 도쿄전력은 이만큼이나 사고를 일으켰는데도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말합니다. 책임 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쿄전력의 원전은 현재 1기도 가동하지 않는데,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형식뿐인 얼마 되지 않는 배상을 하고서도, 그래도 이익이 나온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력회사는 원전을 가동시키지 않으면, 전기가 부족해져서 전기요금도 오른다면서 우리의 불안을 부채질합니다.

 

우리집은 교토에 피난하고 있는 분들 175명과 함께 도쿄전력과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사건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용이 든다며 대책을 몇 년이나 뒤로 미뤘다는 것에 대한 책임. 피난의 정당성과 정신적 고통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국회사고조사위원회는 2012년 7월에 ‘이 사고는 인재다’라고 정식 발표하였습니다. 도쿄전력의 원전사고는 지진과 츠나미로 인해 전원이 상실되어 일어났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막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후쿠시마 현 내에서의 피난, 그리고 전국각지에 피난을 강요받고 있는 분들이 각지에서 재판을 걸고 있습니다. 지금 재판을 건 원고들, 재판을 담당하는 변호단도 모두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 격려하고, 싸우기 위해서 연대해 나갈 움직임을 취하였습니다. 우리집의 경우는 ADR에서 회수할 수 없는 손실은 재판으로 호소하여 배상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변호사에게 들었는데, 개인이 싸우기에는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여 포기하려 했었기 때문에 같은 생각을 가진 피해자가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것은 마음 든든합니다.

 

지금까지도 약으로 인한 피해(薬害), 공해 등 국가와 대기업을 상대로 한 재판은 수십 년이나 싸우고 있는 케이스가 많습니다. 재판을 하려고 결정했을 때, ‘나라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 따위 소용없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엇이 소용없다는 것인지요?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게 하고, 사죄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매번 재판에서는 피고인 도쿄전력과 국가의 변호사 및 대리인이 지루한 듯 앉아서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책임의 표현입니다. 우리들 원고와 변호단은 사고의 책임을 인정하게 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할 것을 요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원전을 없애서 다시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까지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원자력안전위원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사고 후 2012년 9월에 ‘원자력규제위원회’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 사실부터가 원자력의 안전신화가 붕괴되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안전한 원전 같은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2020년에 올림픽이 일본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향해 자신 있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후 즉시 오염수를 바다에 계속 흘려보내고 있던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고 도쿄전력이 발표하였습니다. 규제위원회도 이것에는 기가 막혀 했습니다. 지역에서는 오염수가 더 이상 새어나가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관리를 철저히 할 것, 그리고 정보를 숨기는 체질을 재빨리 개선하라고 항의하며 강하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베 수상은 오염수가 실제로는 새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사죄도 발언 철회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노다 수상은 2011년 12월에 돌연 원전사고 수습선언을 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발표했는지 모르지만, 아니나 다를까 전 세계로부터 수습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과 의견이 쏟아졌습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도 발언에 대한 철회도, 사죄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염의 구체적인 상황이나 건강피해 실태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실제 상황을 말한 사람에 대한 반발이나 비판은 가혹합니다. 입증되지 않았는데 인과관계가 없다, 문제없다, 걱정없다며 우기는 무책임한 말은 정당화되는 불편함은 지금도 쭉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고 직후부터 계속 속고, 거짓말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설령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알아야만 하며,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해서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작년 5월에 후쿠시마에 돌아갔을 때 택시에 탔을 적의 일입니다. 기사님과 날씨와 고향의 산에 관해서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이 살고 있는 곳은 시내에서도 방사선량이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과 손자는 비교적 방사선량이 낮은 지역으로 이사를 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건 다행이었네요, 하지만 이런 말을 좀 더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후쿠시마에 만들어지면 좋을 텐데요’라고 하자, ‘정말 말씀하신 대로예요, 이상하죠’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후쿠시마에는 사고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오염에 대한, 피난에 대한, 원전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 등에 대해 좀처럼 본심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모두가 저마다 안고 있는 어려움에 이미 힘이 부치고, 힘이 부칩니다. 자신의 가족을 지키는 일로 힘들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 밖으로 피난을 갔지만, 피난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사이에, 더 이상의 고랑과 경계를 만들지 않고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도록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지지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좁은 일본에서 또 원전사고가 일어난다면, 틀림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토지와 먹거리도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약 2년간 일본의 모든 원전이 멈춰 있어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국가와 전력회사는 원전의 재가동을 추진하며, 우리들의 반대 목소리도 듣지 않고 작년 8월에 큐수 전력에서 가고시마 원전을 재가동시켜 버렸습니다. 원전사고가 일어나도 왜 아직도 원전을 돌리려는 것인지?

국민의 반 이상이 원전재가동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안전하게 처리하는 기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원자력은 핵입니다. 칸사이전력도 원전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과 같은 것을 취급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사고가 일어나 버렸을 때의 피난계획도 서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용이 끝난 핵연료의 처리에 대해서는 뭐 하나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용한 일본 전체의 핵폐기물을 포함해서 더욱 폐기물을 늘리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간의 방사선량을 줄이기 위해 후쿠시마의 제염작업은 5년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작업으로 발생한 오염물질은 검은 플렉시블 컨테이너 백(flexible container bag)이라는 것에 채워 넣어, 아름다운 산림과 길 옆, 주택지의 공터, 학교와 공원의 한 구역 등에 쌓아두고 있습니다. 임시로 놓았다고 설명은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처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는 방사선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제염을 한다고 해도 산산히 흩어져 버린 방사능을 모아서 제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모든 수목도 벌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후쿠시마에서는 귀환정책이라고 하여 현 밖으로 피난한 사람들을 현 내로 돌아오게 하는 시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임대 주택의 주택지원은 내년 3월로 중단됩니다. 퇴거를 강요당한 사람들은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연히 이사비용이 듭니다. 만일 후쿠시마에 돌아간다면 이사 비용을 일정액 후쿠시마 현이 부담해 줍니다. 하지만 후쿠시마에는 아직 돌아갈 상황이 아니라고 느끼는 가족을 비롯해 아이들의 학교나 부모의 직장 관계상, 그대로 피난처에서 다른 주택으로 옮겨 사는 분도 많습니다. 그런 가정에는 일체 이사비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난구역으로 지정한 곳을 점점 해제하고 있습니다. 방사선량이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연간 피폭량 20밀리시버트로, 사고 후에 올린 수치입니다. 사고 전에는 연간 1밀리시버트였습니다. 20배나 올려놓은 채로 되돌려 보내려는 것입니다. 피난구역에 살고 계신 분은 산간마을에 대대로 집을 가진 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작년 말에 주택은 제염을 했지만, 산림은 제염을 하지 않기로 후쿠시마 현이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아무리 우리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자연재해 같은 것이라면, 재해구조법에 바탕하여 귀환할 목표는 세울 수 있겠지요. 하지만 원자력 재해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방사능의 영향이 없어질 때까지 핵 종류에 따라 몇 백, 몇 천 년이나 되는 연수가 걸립니다.

국가는 2020년까지는 가능한 한 피난자라 불리는 사람들을 없애고 싶고, 원전사고가 완전히 수습되었다고 세계에 발신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올림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일본의 원자력 기술 수준이 높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전을 외국에 팔아서 돈을 벌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베 수상은 큰 기업이 우선 벌어서 그곳이 윤택해지면, 거기서 넘쳐 나온 것이 일반 가정에 흘러가서 일본의 경기가 좋아진다고 하는, 지극히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생각을 가지고 정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자력 기술을 자랑하고 싶다면 원전사고에 좀 더 진지하게 대처해서 높은 기술을 어필하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전사고의 배상재판과 동시에 각지의 원전 재가동을 멈추는 운동과 재판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의 55기 원전 중 원전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피난처인 교토의 옆에 있는 후쿠이 현으로 16기가, 다음으로 후쿠시마 현으로 10기가 있다는 것조차 사고 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원전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피난을 왔으므로 절대로 재가동시키고 싶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다카하마 원전이 재가동 되었습니다.

작년 4월에 같은 후쿠이 현의 오오이 원전 가동중단 가처분이 인정되었습니다. 재판장은 ‘원전이 멈추어 많은 금액의 무역적자가 났다고 해도, 이것을 국부 상실이라고는 할 수 없다. 풍부한 국토와 거기에 국민이 뿌리를 내리고 생활하는 것이 국부라고 할 수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오오이 원전은 앞선 노다 수상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하지도 못할 일을 국민에게 선언하여 재가동을 추진하려던 곳이었습니다.

모든 책임을 질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 한 가족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는데, 한 번 사고가 일어나 버리면, 그 피해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이 일로부터 왜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일까.

 

사고는 일어나 버렸습니다. 지금도 사고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원자로 안이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매일 320톤의 오염수를 배출하면서 원자로를 계속 식히고, 방사성 물질을 다량 포함한 공기를 깨끗한 하늘로 배출하고 있습니다. 현장은 지금도 긴박한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폭발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만두면 또 폭발할 듯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진이 있습니다. 방사선 물질은 콘크리트와 금속도 부식시킵니다. 원자로와 원자로 건물도 언제까지 버틸지 모릅니다. 도쿄전력에서 1년 전에 보내온 자료에는 ‘폐로를 위해서는 먼저, 폐로 방법을 검토하고, 기술개발 준비에 20-30년이 걸립니다. 사용이 끝난 연료를 꺼내는 데 10년 이상이 걸립니다. 녹아서 굳어버린 연료에 관해서는 예상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아직도 예측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수습과 폐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전은 그런 것입니다, 핵은 그런 것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대로 눈앞의 이익에 갇혀 뒤처리를 생각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돈을 벌려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보다는, 목숨을 소중히 하여 좋은 일을 선택할 강인함과 용기를 가지고 사는 것. 부끄럽지 않은, 변명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 5년간 우리 가족은 많은 일을 참고, 포기하고, 헤어지고, 잃었습니다. 지금부터의 인생은 겉모습뿐만이 아닌 희망과 미래를 위해서, 행복하다고 느끼고, 행복하다고 마음으로 말할 수 있는, 우리 서로와 미래의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습니다.

 

[한나의 원고]

우리 가족은 2011년 원전사고의 영향으로 교토로 이사를 왔습니다. 저는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어서, 원전사고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알고 있었던 것은 방사능은 무서운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으며 해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소, 닭, 돼지 등도 방사능으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먹을 수 없다고 해서 죽일 필요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희망의 목장’이라는 한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소를 키우는 사람의 실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소들을 살처분 하는 것에 동의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지만 그 사람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소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소들은 먹으려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들은 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만의 생각으로 죽이지 말고, 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살처분 당한 소들의 주인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척 가슴이 아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사능은 너무나 무서운 것입니다. 소뿐만이 아니라 맛있는 쌀이 나는 논, 물고기가 헤엄치는 바다와 강, 깨끗한 공기 등,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습니다. 방사능이 있어서 모두의 고향이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조금씩 남겨진 소들을 돌보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일본 각지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 먹이와 돈을 기부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목장은 언제부턴가 ‘희망의 목장’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사라진 토지에 몇 백 마리나 되는 소가 살고 있고, 듬뿍 먹이를 먹고 기운차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모습에 ‘희망을 느낀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팔리지 않는 소에게 먹이를 주며 돈을 들인다는 것,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세상을 바꿔가는 것은 우리들입니다. 일부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세상이 지배되고 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움직여서 이러한 일을 모든 이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떠올리는 것도, 말하는 것도 괴롭지만, 원전사고가 있었던 것을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소중한 생명을 지켜갈 수 있도록 저도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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