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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을 통해 본 새로운 세상
2016-06-03 08:37:00

* 무위당22주기 기념 생명평화활동가대회 발제문입니다.

무위당을 통해 본 새로운 세상

요약정리 김용우 (무위당만인회 기획위원장)

 

 

1...........

 

무위당 선생이 어떤 딱 만들어진 유형의 세상을 바랐거나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무한성장주의와 근대국가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에 대해, 문명을 지탱하는 주류철학이 주객분리의 이원론으로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함으로써 감당이 안 되는 경쟁과 투쟁의 삶을 살고 있는 바를 지적하였다. 여기저기 말씀하신 것을 보니, 자연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존재하는 우주적 존재임을 각성하고 상생의 공동체적 삶을 통해 인간성숙을 지향해 나가면서 근대문명을 넘어서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근대문명을 넘어서는 방법도 일관되게 말씀하셨다. 근대철학에 대응하여 생명에 대한 각성과 수행, 경쟁과 투쟁의 운동이 아니라 협동과 공생의 자립과 운동, 시민(또는 주민) 각성을 도모하는 자치운동, 근대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생활문화운동 등 다양한 대안운동의 방향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 덕분이기도 하고 한국사회 활동가들의 노력과 우주기운이 조응하여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는 다양하고도 풍성한 대안운동이 발전하였다.

초창기 한살림운동으로 대변되던 유기농업운동과 생활협동조합운동은 다양한 협동조합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또한 귀농운동, 마을공동체운동, 공동육아와 대안교육운동 등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지역공동체운동이 확장되고 있다. 환경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문제의 생명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문적인 단체들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원불교 100주년 활동가대회에서는 ‘사회운동과 영성’에 대한 주제들이 처음으로 활동가들을 통해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반적인 근대문명의 쇠퇴와 위기 속에서 전통적인 사회운동을 대체할 만큼의 생명(평화)운동의 확장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 중 핵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영역에서 생명운동에 이론과 실천의 응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당장에 우리는 성장 중심적인 근대문명의 토양에서 성장하고 길들여진(?) 생협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현실 생명운동들이 어떻게 자립하고 자치할 수 있는지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할 국면에 와 있다. 즉 성장이 멈춘 또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한 근대문명의 종언과 전환국면에서 생명공동체운동이 지향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또한 국가권력에 대응해 우리시대 생명운동의 공동체적 자치 지향과 과정으로서의 국가권력과의 관계 전략,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체제에 대한 생명운동적 인식과 해소방안 등도 중요한 논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무위당 선생이 원론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 외에는 얼마 안 되는 강연과 생전에 고인과 함께 활동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지하여 유추하거나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말씀의 내용이 혹여 방편가설(方便假說)로 이루어졌다면 진실을 추론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직관력과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그 의견이 꼭 맞는다고 할 수도 없다.

무위당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하여 무위당을 이해한 만큼 각자 각자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다만 이번 자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해결을 위한 이야기마당의 자리이니 만치 그와 관련된 장 선생의 말씀을 몇 구절 선별해 봤다. 이것도 선별자의 눈이다.

 

山不利 水不利 利在挽弓之間

 

제가 해월선생 법설을 접하다 보니까 아주 오래전에는 저걸 보고 감이 잘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근자에는 심각하게 감이 오는 게 있어서 그 점을 말씀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세월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정감록>에서 ‘산에 가도 이롭지 않고 들에 가도 이롭지 않고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데가 좋다’ 그런 이야긴 많이 들어서 첫 번에는 저 글귀를 보고선 그와 비슷한 걸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게 무엇에 해당하는 말씀인가 이랬는데, 근년에 이제 한 십년 안쪽으로 이렇게 접해보면 요샌 가끔 저 생각을 합니다만 ‘山不利 水不利 利在挽弓之間’이라.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이로운 것은 화살을 이렇게 당기고 있는 그 사이에 있나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무심상태, 무욕상태 그래서 단심으로 활을 나꾸고 있는 그런 상태래야, 그러니까 활에다 신경을 쓰지도 않고 과녁에다가도 너무 혼을 뺏기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태, 무심상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단순히 그렇다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사이가 없다 이 말이에요. 무심상태지만 거기에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 없는 그러한 자세, 그렇게 되면 이롭다 그 이야기지요. 그렇게 되면 구원이 있다 그런 말씀이에요. 그렇게 되면 바깥에 나간 서방님이 들어오실 때가 돼서 기름을 미리 준비하는 아낙들과 같다 그 말씀이에요. 딴 데 방심하고 있다가 서방이 돌아올 때를 모르고 기름을 구하려고 할 때에는 기름을 누가 줄 사람이 없어. 다 바삐 제몫만 가지고 있으니까.

『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자애와 무위는 하나」, 83쪽

 

 

2. 우리는 누구인가?

 

우주적 존재로서 인간적 성숙과 사회적 성숙에 대한 신뢰

 

그러니까 제자리를 제대로 찾자면 자연과 인간과 또 인간과 인간일체가 하나 되는 속에서 “너는 뭐냐”. 그렇게 되었을 적에 나라고 하는 존재는 고정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조건이 나를 있게끔 해 준 것이지 내가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다 이 말이야. 따지고 보면 내가 내가 아닌 거지. 그것을 알았을 적에 생명의 전체적인 함께 하심이 어디에 있는 줄 알 것이고 우리가 연대관계 속에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으면서,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면서, 그러면서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화합의 논리요 서로 협동하는 논리라는 그런 시각으로 봤을 때에 비로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 새 시각 속에서 우리 한살림공동체 이야기도 될 수 있겠지

『나락 한알 속에 우주』, 「화합의 논리, 협동하는 삶」, 39쪽

 

수행

我有一卷經 나에게는 한권의 경전이 있네

不因紙墨成 지묵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네

展開無一字 펴보면 글 한자 없으나

常放大光明 늘 상 온 누리를 비춘다네

-채근담

 

그런데 불가에서는 어떤 말씀이 있는고 하니 正念工夫 相續不斷(정념공부 상속부단)이라. 이거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고대(방금) 해월 선생이 말씀한 말씀내용이나 같은 내용이에요. 마음챙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八正道(팔정도) 안의 한 말씀인데 정념공부, 마음챙김이다 이말이에요. 한눈 파는 것, 딴생각 하는 것, 쓸데없는 생각하는 것,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공부, 단심한 공부, 아무 계산이 없는 명경지수 같은 마음의 공부 이것을 계속해라 이거에요. 그렇게 해야 다시 이야기하면 각(覺)의 상태, 잠을 자지 않는 상태에 있다 그 이야기지요. 깨어 있는 상태다 그 말씀이에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자애와 무위는 하나」, 84쪽

 

 

3. 근대문명과 현실

 

근대문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철학과 성장경제, 국가주의로는 인류의 성숙이 어렵다

 

“지금 봐서는 문명 자체가 막을 내려야 할 시기에 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무대의 막이 단시일 내에 딱 끝나고 다른 막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산업문명 기술이라든지 그 속에서의 이윤추구라든지 이런 것에서 맴돌다가는 결정적으로 인류생존의 파국을 가져온다고 봐요. 현 단계에서 공동적인 산업문명 속에서 서구유럽에서 개발했던 하나의 모범과 경험은 굉장히 허무하게 돌아갈 겁니다. 자연에 대한 지나친 착취와 소모, 소위 성장을 주안으로 하는 산업문명은 그만큼 지구자연이라든지 생태계 파괴를 가가속화 시키는 거니까요. 얼마나 더 견뎌낼 거냐.”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민주의 길에서 생명이 길로」, 126쪽

 

그 다음이 검(儉)인데요. 노자에 ‘치인사천막약색(治人事天莫若嗇)’이라는 말이 있어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알뜰함만 한 것이 없다”는 말씀인데요. 그런데 지금은 알뜰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왜 알뜰할 수가 없게 돼 있느냐. 지구 전체가 지금 온통 장삿속으로 돌고 있어요. 죄다 욕심판이예요. 그걸 하면 돈이 얼마나 드느냐, 그거 하면 얼마나 받느냐. 박사 되면 월급을 얼마나 받나. 사장하면 얼마를 받느냐. 전부 이 관계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돈이 기준이 돼 있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아가는 데 적당한가. 알맞나 이러한 문제는 애기도 안 되는 거라. 옷도 유행에 따라서 맞춰 입지 않으면 그 사람은 흰 오리떼 속에 검은 오리모양 끼이지 못하는 거죠. 세상이 그렇게 돼 있잖아요.

이게 이렇게 되니까 지구가 파멸상태로 가고 있어요. 인간의 이 문명이란 게 어느 지경까지 왔느냐. 미국도 그렇고 소련도 그렇고, 영국, 독일, 불란서 같은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심지어는 우리까지도 사람 죽이는 무기를 생산하고 있어요. 그게 지금 이익이 제일 많아요. 전부 무기장사라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문화인이라고 문명인이라고 거들먹거리고 있으니 완전히 넌센스죠. 그것을 받쳐주고 있는 학문, 오늘날의 문화, 오늘날의 문명이 뭐예요. 자원을 누가 많이 차지해서, 누가 많이 만들어서, 누가 많이 팔아먹느냐 하는데 모두 혈안이 되어 있잖아요. 이익을 많이 남기는 놈이 왕인 세상이에요. 그것은 반생명적이고 반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거에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세상일체가 하나의 관계」, 101쪽

 

 

4. 방향1-생명 공동체 협동 자립

 

내가 이제 여러분들에게 중언부언, 이런얘기 저런얘기, 자꾸 얘길 하는데 내가 얘기하는 것은 이제 당면한 과제가 뭐냐는 거야. 두 가지가 있어. 반생명적인 일체의 조건을 갖다가 다시보고 그것에서부터 우리는 탈출해야 돼. 엑소더스. 그것은 주먹을 쥐고 상대를 때려눕히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비협력으로 탈출해야 돼. 비폭력으로 탈출해야 돼. 이 비폭력과 비협력은 간디 선생도 말씀했지만 그 이전에 우리의 사상에 수운이나 해월의 동학사상에도 구구절절 그것이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게 때문에 3.1만세에 민족의 자주를, 민족의 존재를, 거룩한 민족으로서의 입장을 천명하는 속에서도 비협력과 비폭력이라고 하는 정신 정신이 깃들어 있던 거야. 그건 바로 동학의 정신이야. 또 그 동학의 정신은 뭐냐. 아시아에 수천 년을 내려오는 유·불·선의 맥에서 온 거야. 그런데 이러저러한 것이, 모든 종교가 이제는 자기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아집(我執)의 담을 내리고 서로 만나면서 니 지구에 한 삶터, 한 가족, 한 몸, 한 생명 이것을 어떻게 풀어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서로 얘기해야 돼.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사심없이 자기부정을 하고 가면」, 127쪽

 

-선생님의 지론은 모두 협동운동으로 귀착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주의 모든 생태가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갈라놓을 수 없고 갈라놓고 지배하는 형태가 아니라....남북의 분단도 그렇지 않습니까. 갈라놓고, 지배당하고, 지배하는 쪽에 붙어먹는 패거리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의 생명단위로 태양과 지구가 있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협동적으로 존재할 때만이 생명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런 안목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전부 내 소유로 하겠다고 갈라 가졌어요. 그런 자연히 이상에 맞지 않아 함께할 수 없었던 거지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겨레의 가능성은 대중속에」, 154쪽

 

본래 유럽으로부터 온 소비조합이나 신용조합, 생산조합이란 압정에 시달림을 받아오던 사람들이 산업혁명이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것입니다만, 지금은 대기업의 하청업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구가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신용’도 ‘협동’도 다른 개념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는 정해진 답이 없습니다. 무엇이나 그 답이 나와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만, 그것은 환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창조적 진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모두 제각기 진실을 발견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풀 한 포기도 공경으로」, 148쪽

 

그리고 유사단체 있잖아요. 우리 한살림 말고 다른 단체가 또 이렇게 해가는 단체가 있을 거란 말이야. 만나라는 말이야. 문제는 공동의 과제를 밀고 나가야지. 어차피 운동에는 다 각각이지만 각각이라도 연대해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생명세력, 반생명적으로 문제를 끌고 가는 힘에 대항해서 우리가 일을 확산해 갈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다만 한 가지라도 사회를 위해서 밝게 일해가고 있고 좋은 일 해가고 있는 그러한 단체는 연대를 하자고 할 때는 함께하자는 말이에요. 함께하지 않았을 때 어떤 문제가 오느냐. 아까 얘기한대로 보글보글 혼자 우리끼리만 놀다가 끝나게 돼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왜 한살림인가」, 109쪽

 

 

5. 방향2

 

“도대체 너의 나라가 어떤 나라냐?” “아 내 나라! 내 나라는 너희들이 애기하는 그런 나라 아니야.” 남의 것을 힘 있으면 다 빼앗아 갖고, 갖다가 별짓 다하고, 반반한 계집년 있으면 데려다가 종년으로 쓰고 몸 다 버려놓고, 남의 금덩이고 보석이고 있으면 덮어놓고 다 노략질하는 그런 나라 아니란 말이야. 자연 속에 만물 속에 들어가 있는 그 생명의 나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나라, 나눌 수 없는 나라, 그러나 그것이 절대절명으로 지배하는 나라, 그 위대하심이 길가에 피는 작은 꽃 한 송이에도 있는 그 나라! 그걸 얘기 했어요.참 엄청난 말이죠. 그걸 거룩한 사람들, 욕심이 없던 사람들은 일찍이 알아들었지요. 그런 사람들은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한반도에도 많이 있습니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 96쪽

 

나는 해방직후에 원 월드 운동(One World Movement)을 했어요. 그것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세계 과학자들이 먼저 시작했지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뒤로 아인슈타인이 반성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못할 짓을 했다고요. 그러면서 세계를 하나의 연립정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좁쌀한알』, 「원 월드 운동」, 168쪽

 

무위당은 1991년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에 고문자격으로 참여를 하고 발기인대회에서 ‘오늘의 정치 사회현실과 시민운동’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어서 그해 3월에 시사저널에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기자의 질문에 시민운동과 지자제선거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연대회의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사회전반에 걸쳐 누수현상이라고 할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붕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민의 다양한 생활영역에 있어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이제는 통치와 지배 차원으로는 이 복잡한 중층적 사회현상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시민이나 주민이 객석에 앉아서 하는 대로 맡길 수 없는 세상이 됐어요. 시민각자는 자기영역에서 올바르게, 건전하게 자기의 생활을 보호하고 지켜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자제선거를 앞두고 원주는 어떤가요. 개인적으로 이번에 실시될 지자제에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까?

“선거바람이 불고 있는데 그 형태는 구태의연해요. 이번선거는 국민이 각성하는 게기가 돼야 합니다. 우선 서울 등 대도시에서부터라도 시민연대를 통해 건전한 사람을 지자제에 내놓도록 하고 시민연대운동이 각 생활영역에 뿌리내리고, 그것이 발전해 시민주권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당선되는 사람도 생기겠지요. 그러나 시민들의 올바른 의견이 시정에 반영된다면 지자제에 나서선 안 될 사람들은 그다음에는 후퇴하게 되고, 올바른 생활을 구축하려는 대표들이 앞으로 나설 수 있지 않겠는가 봅니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겨레의 가능성은 대중 속에」, 154쪽

 

 

6. 방향 3 -한반도

 

엊그제도 김지하 군이 찾아와서 애기를 했습니다마는 “지방자치에 대한 그간의 모든 법을 검토해서 지방자치를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생활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해서 “좋은 애긴데 그건 바로 통일운동과 직결되는 걸세. 통일이 국가이익만 가지고 밀어붙이고 협상이 된다고 한다면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이 상황에서 그건 효과가 없게 될 걸세. 문제는 이 땅의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어떻게 제대로 꾸려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 지방자치제의 핵이 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북의 통일문제도 그 생명에 대한 생각을 구축하는 속에서 애기가 돼야지. 그러니까 앞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자네는 이런 점을 말하게.”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한 마을의 일이라고 하더라고 그건 전 세계의 일이요, 전 우주의 일 아닙니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민주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118쪽

 

독일의 예를 보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토양이 달라 비록 통일의 형태를 이루어놓고는 있지만 원만하지 못하고 많은 무리가 오고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우리에게 통일을 서두르지 말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우리의 통일도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끼리 살아갈 수 있는 조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문제라고 봐요.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니라 조화의 관계를 이루어가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남과 생활이 소그룹부터 그런 경험이 축적돼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지방자치제라든가 한지역의 조그만 진실한 운동이, 자연과의 상호관계를 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 놓은 그것이, 겉으로 볼 적에 아주 소그룹이지만 그것이 전 우주와 함께 한다고 하는, 우주와 통일한다고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한 안목에서 문제를 다시 정립시키고 확대해 가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뭐냐면 소그룹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제각기 다양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노력이 앞으로 계속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민주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127쪽

 

시간이 좀 갈 거요. 시간과 잘 싸워야지.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거는 결국 생명운동이라는 것은 확신이 있어야 하는 거지. 생명이란 것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만 분명히 있단 말이지. 그 덕에 모든 것이 살아가니까. 유교가 중국에서 일단 참패를 본 게 무엇 때문일까? 영성이 빠졌기 때문에, 공자는 안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거든, 불교가 들어와서 영성을 집어넣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시대라는 게 전부 눈으로 뵈는 것, 있다가 없어지는 것만을 계산하다가 보니까 이 지경으로 되었단 말이지. 우리가 얘기하는 생명운동의 핵은 전일성인데, 전(全)이란 건 보이질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경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같은 서투른 사람한테‘ 생명이 뭐냐’ 하면 ‘몰라’ 하는 게 정답이라구. 어떻게 말로 글로 얘기할 수 있어요. 배 맛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말로 얘기하는 것하고 같은 거지. 각자가 소화 시켜 나가는 수 밖에 도리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생활 있어서 한 단계 한 단계씩 자기의 모습이 있어야 하겠지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한살림 운동과 공생의 논리」, 209쪽

 

 

7. 함께 던지는 질문 몇 가지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근대문명의 종착점이 다가온 것 아닌가? 성장경제의 영향 아래 생명운동이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생명공동체운동의 자립은 지금부터일 것이다. 자립은 검약과 나눔 노동, 돌봄노동에 기반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소비자의 신세를 벗어나 몸으로 하는 노동 특히 손(hand)노동의 전반적 회복 속에 공동체적 생산총량이 늘어나야 기업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20대 총선이 끝났다. 총선과 대선은 근대국가권력을 다루는 정치판이다. 근대국가권력의 영향력이 큰 만큼 대응방안도 여러 가지다. 현실의 권력에 대응도 해야 하지만 본질과 궁극을 보면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민초들의 자발적 자치와 주인공으로서의 각성의 길은 무엇인가? 녹색과 자치가 어떻게 만나고 국가를 점차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남북이 대결이 10년째 지속되고 있다. 현상적이고 평면적인 근대국가와 지역체제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탈근대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로의 전환의 핵심고리는 무엇이고 우리가 실천할 방도는 무엇일까? 통일보다는 평화적 2국가체제를 먼저 구축하는 것이 먼저일 수는 없는가? 통제되지 않는 하나의 국가를 세우는 게 또 꿈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민초들의 자율과 자발성신장의 길이 초점인가? 그래야 민초들의 개입여지가 많은 것 아닌가?

 

영성이 화두다. 그런데 내면을 향하지 않는 영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사회적 영성인가? 통합적 영성인가? 한국사회는 다종교사회이다. 영성에 대한 다른 이름들과 자기종교중심의 언어와 수행법을 넘어 한반도인들의 영적지층들을 꿰뚫고 민초들을 평화로 이끄는 포함삼교(包含三敎)의 영성운동의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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