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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말들 영성에 대해
2014-11-02 16:31:09

 

지금은 영성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영성이란 말이 널리, 그리고 흔하게 쓰입니다. 또 수많은 영성 공동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구의 생태적 위기가 가시화되고 전통시대의 공동체문화가 점차 사라지면서 이런 현상은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영성의 본질에 대해서 혼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영성이라고 하면서도 막상 쓰는 사람들마다 그 의미와 뜻이 다른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 또는 신적인 것과 관련된 것을 영성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회적 영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나 전자의 경우는 신 중심으로 봄으로써 자칫 일상적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 속에 들어있는 영성적 의미를 망각하기 쉽고, 후자의 경우는 자칫 모든 것을 관계의 문제로 풂으로써 ‘신성함’의 문제를 소홀히 다룰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생태적 균형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기도 합니다. 생태적 균형과 조화가 영성 문제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자칫 생태적 근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영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이란 말은 영어로 spirituality입니다. spirit(영)을 의미하는 말의 추상화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이란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영이란 우선 몸(body)과 물질(matter)에 대립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물질이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면, 영이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에 대해서 시베리아나 호주, 아프리카, 북미, 아시아 등지의 샤마니즘을 관찰해 보면 고대인들은 숨결(breath)이나 피를 언급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혼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없던 고대인들에게 생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피나 숨결이야말로 몸과 마음을 살아있게 해주는 그 무엇이라 여겨졌던 것이지요. 실제로 고대의 창조신화들을 보면 하나같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어 인간과 만물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숨결은 바람입니다. 바람은 우리가 호흡을 할 때 우리 몸 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합니다. 그와 함께 다른 존재의 몸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서로의 숨을 섞습니다. 피도 마찬가지지요. 피는 물입니다. 물은 신진대사를 통해 우리 몸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면서 우리를 살아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들락날락거리는 물은 다른 존재들의 몸을 들락거리는 물과 섞입니다. 

따라서 숨결이나 피 모두 관계성, 순환성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대상들 너머에 있는 것이면서 이들 대상들을 살아있게 하는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 관계지우는 것을 영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관계란 무엇인가요? 관계란 개별적인 존재와 대상들을 연결짓고 서로 의존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함축이 많은 말이지요. 

예를 들어보지요. 인디언들의 영성과 관련된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말로 ‘위대한 신령’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칫 서구의 신(god)에 해당하는 말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이 이해하는 위대한 신령은 그런 인격적인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바람이나 물의 활동을 이해하면 이해하기가 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드나들며 모든 존재들의 숨결을 서로 섞습니다. 그렇게 모든 존재들을 연결짓지요. 물 또한 모든 존재들을 넘나들며 서로의 물을 섞습니다. 어디 숨결과 물 뿐인가요. 우리의 행위 또한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은 또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나의 행위는 나를 둘러싼 관계의 관계망을 돌아 결국 내게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지요. 나의 생각은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관계의 관계망을 돌아 다시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게 서로 연결된 모든 존재들의 관계와 그 의미의 총합이 바로 위대한 신령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신령은 서양이나 아시아의 신처럼 인격적인 그런 신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존재의 진상이면서 각각의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인디라망과 같은 궁극적인 그 무엇인 것입니다. 

인디언들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영(혼)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생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모두 영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때 영은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의 주재자를 의미합니다.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을 그들은 영이라 했던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나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나는 나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족적인 존재라면, 굳이 다른 존재가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존재에게 의존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나 이외의 다른 존재들이 같은 시공간에 있을 때에만 생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이중삼중으로 결함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재자로서의 나의 영을 말하려면, 나를 둘러싼 관계망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와 내가 할 일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다못해 음식을 먹고 마시려고 해도 다른 존재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존재의 희생없이는 말이지요. 

따라서 주재자로서의 영은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이 세상의 관계망의 작은 매듭으로서만이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이되 내가 아닌 것이 나의 주재자의 실상이며, 그것을 아는 것이 소위 깨달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소중하면 다른 존재들도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소중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지요. 모두 다 위대한 신령의 한 부분이요 관계의 그물망의 한 축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동식물을 취해야 합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생명만을 먹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딱한 모습입니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선생은 이것을 가리켜 <생명으로 생명을 먹인다(以天食天)>고 했습니다. <예언자>의 작가인 카를 지브란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풉니다. 

네가 대지의 향기를 맡으며 살 수 있기를, 그리고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섰는 나무들처럼 햇빛을 받고 살아가기를 빈다. 

그러나 너는 먹기 위해 생명을 죽여야만 하고, 너의 갈증을 축이기 위해 새로 태어난 생명을 위해 생산해낸 우유를 빼앗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의 식사가 숭배의 행위가 되게 하라. 

그리고 숲과 평원의 순수하고 무구한 존재들이 희생되는 식탁을 너의 제단이 되게 하라. 그들이 사람 안에서 더 순수하고 무구해질 수 있도록. 

동물을 죽일 때 그에게 가슴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라 - 

너를 죽인 똑같은 힘에 의해서 나 역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먹힐 것이다. 너를 나의 손에 가져오게 한 자연의 법칙은 나를 보다 더 강력한 손에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너의 피와 나의 피는 그렇게 사라지지만 우리의 수액은 하늘에 있는 나무들의 목을 적실 것이다. 

그리고 사과를 깨물 때 사과에게 가슴으로 말하라 - 

너의 씨앗들은 내 몸에서 자랄 것이다. 어느 날 네 꽃봉오리가 내 가슴에서 필 것이다. 그리고 너의 향기는 나의 숨결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사계절 내내 기뻐할 것이다. 

그의 말은 우리가 살아있는 생명을 취하는 행위가 숭고한 기도의 행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디 먹는 것뿐입니까. 우리가 입는 것, 또 우리가 거주할 곳을 마련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곡식을 기르기 위해 땅을 파는 문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카를 지브란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기도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디언들 역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꼭 필요한 것만 취하고 불필요한 살생을 금하라고 말이지요. 그들은 일상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들에게는 먹는 것도 기도이고, 일하는 것도 기도이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기도입니다. 내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사의 길을 가는 것도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기도입니다. 가족이 쓸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도, 모카신에 예쁜 꽃이나 기하학 문양을 그리는 것도 기도입니다. 아이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도 기도입니다. 시냇가에 물을 뜨러가는 것도 기도입니다. 

이처럼 북미 인디언들은 그들의 일상적 행위가 살생이 되지 않도록, 폭력이 되지 않도록, 저주가 되지 않도록, 그리하여 나와 다른 존재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언제까지나 그 평화가 계속되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균형과 조화가 유지되도록 위대한 신령께 기도합니다. 그들은 24시간 내내 늘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이러한 지극한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살생과 폭력의 행위를 신성하게 만들어주는 의례가 없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아비귀환의 지옥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지오그래픽 잡지 기자인 스티브 월이 이로쿼이 연합의 의장이었던 레온 쉐난도어 추장에게 인디언들은 왜 그렇게 의례를 많이 하느냐고 물었을 때, 레온 쉐난도어 추장이 만일 인디언들이 그러한 의례를 행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영성이란 관계의 그물망인 동시에 그와 같은 기도를 가능하게 해주는 그 어떤 신성한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만을 말하고 일상의 행위를 소홀히 하는 종교는 형식과 권위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반대로 사회적 영성만을 말하는 것은 자칫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살생과 폭력으로 점철되도록 방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성은 우리가 관계의 그물망 속에 놓여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그 관계망 속에서 우리의 행위가 의미를 갖도록,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주는 근원적인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 문제의 일차적 과제는 잃어버린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동식물과의 관계, 해와 달, 별과의 관계, 공기와의 관계, 바람과의 관계, 산과 강과의 관계 등등 이 세상의 모든 관계성을 말이지요. 그러나 그 관계성은 반드시 평등한 것이어야 합니다. 차별지어지고 계급화된 관계성은 이미 영성을 왜곡하고 차등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중심 내지 특정 집단중심의 관계망을 다른 존재들에게 강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등없이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와 안식이 없는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기도는 영적인 힘을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이기심과 탐욕을 위해 사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영성의 길에는 언제나 평화와 평등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있습니다. 침묵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를 낮추고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공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습니다. 

인디언들이 위대한 신령에게 말하거나 기도할 때, 또는 그와 대화할 때, 위대한 신령은 단순히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신이 아닙니다. 내게 복을 주기를 기원하는 대상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한 마음으로 자식을 돌보는 어머니처럼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그 앞에 자신을 낮추고 섰는 한없이 신성한 그 무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디언 영적 교사들은 말합니다. 그때 비로소 위대한 신령은 그대 안에 있고, 그대는 위대한 신령 안에 있다고. 그대가 바로 신이라고. 

(2004년 1월 이장에 게재된 서정록 검은 호수의 글을 옮깁니다. 검은 호수님은 <백제금동대향로>라는 한국 고대정신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썼고, 최근에는 인디언들의 삶과 사상에 대한 글을 쓰고, 자연적 삶, 생태적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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