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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IMF 이후 한국 사회적경제의 성찰
2018-01-03 17:38:00

 

IMF 이후 한국 사회적경제의 성찰*

 

* 한국사회적경제연구회 2017년 4차 포럼 발제와 토론 내용을 정리한 글. (정리: 편집부)

 

 

우리나라에서 “사회적경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보통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자활기업, 협동조합 등...”이라고 설명한다. 이들 조직은 대부분 정부 제도에 의해 인증 혹은 인정받은 곳이다. 이렇게 보면 사회적경제는 정부가 주체가 되어 만드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이들 조직을 사회적경제로 묶을 수 있는 공통의 원리는 무엇일까?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적경제연구회에서는 올해 초부터 사회적경제의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사회적경제헌장을 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정부가 라벨을 붙여주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사회적경제이고자 하는 현장, 그래서 자기 전략과 기획을 가지고 실천하는 ‘전략적 현장’을 찾음으로써 정체성을 규명하려고 한다.

 

그 전에 우선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사회적경제가 조직화되어온 과정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김정원의 최근 논문인 ‘한국 사회적경제 조직화 특성에 대한 분석’은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한국의 사회적경제가 조직되어 온 과정을 경로의존성과 결정적 국면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김정원은 1960년대부터 외환위기 이전까지를 구사회적경제 시기로, 97년 이후에서 현재까지를 신사회적경제 시기로 구분한다. 사회적경제를 신구新舊로 구분하는 방식은 캐나다에서 시작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신사회적경제라는 표현을 통해 기존 조직 중심의 오래된 사회적경제와 달리 새롭게 등장하는 여성운동을 비롯해 사회운동과 결합한 것으로 새로운 사회적경제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한국의 경우도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는 사회적경제를 사회 변화의 새로운 담론과 시민사회의 실천 영역으로 재구성하는 결정적 국면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국가의 존재, 발전주의의 자장,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착근되지 못하는 사회적경제 등 남아 있는 과제를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 김신양(한국사회적경제연구회 회장)

 

ⓒ한국사회적경제연구회

 

김정원 (사회적협동조합 너머 연구위원장, 다른미래협동조합 이사)

 

90년대 말, 현장 활동을 통해 ‘사회적경제’의 개념을 알아가다

 

1998년 가을 자활지원사업에 실무자로 참여하면서 이 영역에 몸담게 됐다. 당시에는 사회적경제라고 하지 않고 주로 ‘제3섹터 일자리창출’이라고 했다. 정부의 보조금이 일정하게 있었지만 지금과는 달리 자활지원센터 활동의 틀이 규격화되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지역의 건설일용노동직 쉼터나 저소득층 여성들을 찾아다니면서 사업을 설명하고 같이 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고, 통장 만들어서 다달이 적립하고 그만두겠다는 분들께 돌려주는 등 여러 일들을 했다. 당시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동네에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대보름이나 대동제를 복원해서 2년 정도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에 주민들에게 넘겨줬는데 지금은 성격이 다소 바뀌어서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운영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동네 신문도 만들어서 1년 정도 운영했다. 마트 같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취재해서 기사 쓰고, 공공근로사업으로 지금의 지역아동센터 형태를 초기 2-3년 정도 집중적으로 했다.

 

 

처음 생각했던 사회적경제와 간극을 보이는 지금의 사회적경제,

어디에서 어긋난 것일까?

 

그러면서 사회적경제의 개념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여러 연구자 분들의 도움도 있었다. 잘은 몰랐지만 이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이고 이런 활동들이 정착되고 확산되면 상당히 다른 사회가 될 거라는 꿈을 가졌었다. 지역의 많은 또래 활동가들이 그랬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났는데, 우리가 가졌던 사회적경제에 대한 꿈에 비추어 지금 작동 방식은 상당히 거리가 있게 흘러가고 있다. 사회적경제의 모범사례라고 일컬어지는 해외 사례들과 비교했을 때 무언가 좀 다르다는 생각이 있었다. 자활센터장으로 일할 때는 공무원들과 종종 싸우기도 했다. 물론 우리 활동이 항상 옳은 건 아니겠지만 정부에서 개입하는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지난 활동에 대한 성찰로부터 다시 시작

 

최근 3년 동안 대학에 있으면서 지나간 역사와 개인적으로 가졌던 고민들을 다시 정리할 기회를 가졌다. 첫 번째로 쓴 논문은 한국에서 사회적경제 담론이 형성되는 데 있어 하나의 출처라 할 수 있는 도시빈민운동을 찾아서 구성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분석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많은 충격과 반성이 있었다. 우리가 활동했던 과거에 대한 아쉬움도 들었다. 왜 도시빈민운동에서 90년대 노동자협동조합을 조직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적경제 담론과 연결되는지, 거기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주민 주체라든가 공동체가 어떠한 맥락에서 도출된 것이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이 무조건 공동체는 좋은 것, 주민 주체는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활동해온 데 대한 반성이었다.

 

 

열악한 조건에도 선전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협동조합운동

 

90년대 노동자협동조합운동의 전반적 흐름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때 또 한 번 반성을 했다. 그전에는 90년대 노동자협동조합운동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큰 고민 없이, 남들이 실패했다고 하니까 그렇게 본 것이었다. 지금도 많은 분들, 심지어 그 운동을 경험하신 분들도 여전히 그렇게 얘기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물론 90년대 활동했던 분들이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거나 그 조직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다른 맥락에서 보니, 자조적인 얘기가 아니라 노동자협동조합이 그 정도만 돼도 당시 시대 상황과 그들의 경험과 업종 특성을 봤을 때 오히려 평균 이상의 수준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런 관점으로 지나간 역사를 다시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경로의존성 개념으로 본 사회적경제와 국가

 

왜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경제라 불리는 조직들의 활동이 국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국가의 기획 속에 편입되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이 문제의식을 풀기 위해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 개념을 차용했다. 결과적으로 60년대부터 역사적으로 분석하게 되었다. 경로의존성은 일정한 경로가 형성되면 그 경로 안에서 제약을 받고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뜻한다. 그 속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주 대응 방식들을 돌아보았다.

 

사회적경제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등장하고 확산된 시기가 90년대 이후이다. 물론 그전에 사회적경제라는 게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결정적 국면의 시점을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라고 보았다.

 

첫째, 그 시기 사회적경제 담론이 등장했다. 그전에는 개별적인 활동들, 예컨대 생협, 공동육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하나의 틀로서 기획되지 않았다. 마을만들기도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라는 담론으로 재구성되어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그 이전의 사회적경제라 할 수 있는 집단들(스스로 사회적경제라는 정체성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념의 측면에서 사회적경제로 규정할 수 있다고 전제할 때), 예컨대 농협, 수협 등은 주로 국가의 기획에 의해 발전주의라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실현시키기 위한 보조 기구로서 등장하고 존재해왔다. 반면, 80년대 후반부터 그 맹아가 형성되어 90년대 후반 이후 새롭게 등장한, 우리가 지금 사회적경제라고 부르는 활동들은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조직화를 통해서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활동들조차 관련 제도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다시 국가에 의해 규정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설사 시민사회의 자발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적경제로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실천이라 하더라도 국가의 제도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사회적경제로 규정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가령, 레츠LETS 활동이나 공정무역 등이 그렇다.

 

 

국가의 발전주의적 통치방식이 적용되는 중간지원조직

 

또한 국가의 강한 영향력의 증거로서 요 근래 많이 이야기되는 중간지원조직이 있다. 논문을 쓰면서 만난 분들 중 한 분은 중간지원조직을 ‘마름’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나는 대행통치라고 썼다. 이는 개개 중간지원조직의 활동이 아니라 전반적 작동의 매커니즘을 말하는 것이다.

 

국가나 지방정부는 중간지원조직을 설립하고 그를 통해 자신들의 발전주의적 목표를 실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최근 전북의 한 도시에 중간지원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몇 년까지 사회적기업 몇 개, 마을기업 몇 개를 만들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그걸 이행하지 못하면 소위 물갈이 대상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현장에서 역량 있고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중간지원조직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현장의 토대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한달까, 불안정 상태가 유지된다.

 

중간지원조직이 그 지역사회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현장을 반영하면서 작동하기보다는 짜여진, 혹은 이미지로서 좋게 보이는 활동들을 중심으로 한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뿌리 내리고 튼튼해지려면 연합체가 만들어지고 힘이 강해져서 나름 정치력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사회적경제 조직들 중 그런 활동들을 효과적으로 하는 곳들은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등 몇몇 사례가 있지만 그다지 많지 않다. 오히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정부나 지방정부의 재원을 둘러싸고 서로 경합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90년대만의 독특한 특성은 아니라고 보았다.

 

 

국가의 발전주의 정책에 동원되었던 사회적경제 조직

 

그렇다면 한국에서 국가란 어떤 존재일까. 국가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역할 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고 본다. 그때부터 경제발전 정책이 형성되고, 농협과 수협 등이 만들어지고 각종 제도들이 본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국가가 하나의 통치기구로서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통치기구로서의 국가는 발전주의를 목표로 내걸었고 발전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적극적 합의 속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발전주의적 정책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제시하고 운영하는가가 국가의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국가는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앞서 언급했듯 농협, 수협 등을 만들어 한편으로는 재정을 통할하는 출처로서 활용하고, 또 한편으로 국민들(농민, 노동자 등)을 동원하는 체계로서 또한 활용했다. 87년 6월항쟁 이후 시민사회의 힘이 강해지고 민주주의가 진전되면서 그런 태도에 일정한 변화는 있었다. 하지만 이미 깊게 뿌리 내린 국가의 작동 방식 자체는 크게 변함이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국가와의 결합을 통해 자기 입지를 강화하려는 시민사회

 

시민사회의 경우 한편에서는 60년대 이후 저항의 조직화가 진행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 더 많은 부분에서 저항의 조직화보다는 국가와의 결합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더 크게 진행된다. 가령, 70년대 소비조합들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정부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성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조직된다. 사회복지 기관들의 경우에도 사회복지를 제대로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거기에 집행력을 투입하기보다는 돈을 줘서 관리하는 방식을 오랫동안 취해왔다. 선별적 관리다. 그러다 보니 국가로부터 제공되는 자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더 많이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기관들 내부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혹자는 이런 표현을 하기도 한다. 돈을 넣으면 넣은 만큼 나온다는, 소위 자판기 방식이다. 다시 말해 국가와 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 자신들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쉽게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는 속된 표현으로 ‘뜯어먹어야 할 대상’이다.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서 우리 기관이, 우리 조직이 활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결정적 국면이 있었지만 경로의존성을 벗어나지 못한 사회적경제

 

이런 경향은 지금 현재 사회적경제 조직들에서도 나타나지 않는가. 2010년쯤 어느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석자가 “그러니까 사회적기업에서 일한다는 얘기는 지역사회 활동가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거군요,”라고 묻기에 맞다고 했다. 그 이전의 분위기는, 가령 어떻게 하면 정부와 가까워지고 제안서를 잘 써서 지원을 받아낼 것인가에 주로 관심이 가 있었는데 그 강의에서는 기대와 동떨어진 얘기를 한 거다.

 

사회적기업이 제도화되기 전에는(2007년 이전), 우리가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관련 정보에도 빨라서 지역에 그 정보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사회적기업가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역할 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지역에서 그다지 영향력이 없다. 이미 사회적경제로 일컬어지는 각종 조직들이 너무나 많아졌고, 그 많은 조직들이 각자의 개별 경로를 통해 정부와 관계 맺으면서 재원을 확보하고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사회적경제와 관련한 규범적 얘기나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같이 만나서 학습하고 고민을 나누는 몇몇 그룹들은 남아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보자. 국가가 시민사회에 대해 가져왔던 기본적 태도와 방식을 변화시키려는 자체 노력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크게 변화된 게 없다. 시민사회 역시 국가에 대한 대응에서 내부적으로 자체 역량을 강화해서 변화하려는 노력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했는지 의심스럽다. 이게 과연 앞으로 개선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비관적이다. 경로가 한 번 형성되면 오랜 기간 작동하는데, 90년대 후반에 분명 일대 전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이후 형성된, 어쩌면 더 오래된 관계들이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변화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으로서의 사회적경제의 역사는 계승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노동운동에 더 관심이 있는데, 교과서적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경제의 역사는 노동운동과 한 뿌리이고, 실은 그 자체가 노동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역사에서도 가령 조선노동공제회와 같이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은 조합 형태로 등장했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운동 진영은 국가의 강한 억압 속에서 자리매김해왔던 탓에 저항성을 갖지만 한계가 보인다. 예컨대 임금상승을 중심에 둔 활동으로 개별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목표로 하지 사회 전반의 포괄적인 전망 속에서의 연대를 추진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노동운동과 사회적경제운동 진영과의 관계도 썩 좋은 것 같진 않다.

 

최근 전북 지역에서 어떤 사회적경제 조직과 노동운동 진영 간에 갈등이 불거졌다. 해당 사회적경제 조직은 오랫동안 지역에서 사회적경제 관련 담론과 실천을 이끌어왔던 존재였고, 정부 사업을 비롯해 몇몇 위탁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지역사회, 즉 언론이나 다른 운동 진영에서 그 사회적경제 조직을 ‘업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일반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조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회적경제의 내용이 세상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과 함께 언제든 업체라고 불릴 수 있는, 일반 기업과 차별성 없는 존재로 불릴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사회적경제라 부를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사회적경제라고 하는가. 교과서적으로 이해할 때 사회와 경제는 결코 분리된 게 아니다. 경제활동 자체가 사회활동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인데, 오늘날 시대는 경제활동을 사회로부터 분리시켰다. 특히 그 경제활동은 이윤 창출을 주 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온갖 재앙들이 만들어진다는 논리에 나는 동의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편 어떤 이는 환대의 경제, 즉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사회적경제라고 말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현실에서는 정부에 의해 호명되었을 때만이 사회적경제로 규정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생존을 위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나 타인에 대한 배려,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내 조직의 생존과 성장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회적경제 진영 내부에서 서로 협력을 통해 사업을 하기보다는 경합하게 되는 모습이 일상화되었다. 다시, 무엇을 사회적경제라고 하고 사회적경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들을 사회적경제의 실천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사상을 가지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때

 

여러 연구자들의 글을 보면 해외의 경우에 사회적경제로서의 정체성은 당사자들이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발견해내고 스스로 사회적경제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프랑스의 사회적경제헌장도 자신들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회적경제 내부의 정체성이 정립되기도 전에 정부에서 먼저 해낸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경제에 대해 조직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고, 법적 기반들과 결부되며 정부 지원이 중심이 된다.

 

개인적으로, 사회적경제와 관련된 사상적 맥락을 동학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동학이 발생한 19세기 중후반은 전 세계적으로 혁명이나 사상운동이 많이 발생한 시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학 연구자들은 사회적경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접점이 별로 없다. 가령 『어소시에이션의 상상력』이라는 책을 보면 프랑스혁명기에 나왔던 다양한 활동가 겸 사상가들. 사회적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상적 배경 등에 대해 일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당히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가령 협동조합과 관련해서 그처럼 사상적 맥락에서 접근한 시도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주로 신고전파경제학의 방법들을 활용해 농협이라든가 협동조합 조직들의 경제활동을 측정하는 내용들이 있을 뿐이다. 사상은 실천에서 나오는 것인데 실천은 제대로 정립되거나 축적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사상적 맥락에서 조명하거나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을 이어오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각계 주체들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조직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기보다는 정부 지원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닐까.

 

 

만남과 실천의 공간을 넓히기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협력할 수 있는 대안적 형태로 모색되는 업종별, 지역별 협의회의 경우 지극히 업무 중심, 사업 중심이 될 소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관계를 중심으로만 만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것이 매개가 되기도 하지만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보다는 놀이터 같은 어떤 공간들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역에서도 주로 행사가 있을 때 협력해서 진행하지만 사회적경제 현장의 실천가, 활동가들이 일상에서 시민들과 만날 수 있는 편한 공간이 없다. 그러다 보니 행사나 목적을 가진 공식적인 업무로 주로 만나게 된다. 그 외에는 단절이다. 인간의 삶은 연속되는 것이고 그 연속선상에서 사회적경제라 일컬어지는 행위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공간들을 만들어가는 활동들이 굉장히 중요한 실험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현장에서는 자기 조직의 생존과 성장 이외에 다른 데 관심을 두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현장의 사례를 잘 모를 수 있다. 가령 충남 지역을 보면, 내부의 시선으로는 허점이 보일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볼 때 의미 있는 조직 방식이 많이 있다. 천안의 우리동네협동조합처럼 사회적경제 조직들이 함께 돈을 내서 공유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 충북 지역에서 사회적기업이 종잣돈을 내서 후속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연대기금이 운영되고 있다는 것, 한살림이 지역자활센터와 결합해서 자활기업이 한살림생협의 물류를 담당하는 공동사업이 구축된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잘 알지 못한다. 이런 내용들을 잘 알려내고 공유함으로써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상적인 만남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본다.

 

 

    

모심과 살림 10호(2017 가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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