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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불통의 과학, 대화의 사건
2018-01-11 13:50:00

 

불통의 과학, 대화의 사건

- 구성주의로 본 '소통'과 '대화'

 

 

주요섭

한살림전북생협과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생명사상과 협동운동에 대한 연구와 교류 활동을 해왔으며, 현재 한살림연수원에서 '한살림사람'을 기르는 일을 돕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듣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듣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이해하는 것,

내 생각과 그대의 이해 사이에 이렇게 열 가지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의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소통이라는 신화

 

소설 『개미』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상상력 사전』이라는 책에 쓴 글이다. 제목은 ‘시도’다.

 

이렇듯 우리는 수없이 소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매번 소통에 좌절한다. 이윽고 소통의 원초적 불가능성을 직관한다. 소통은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커다란 바위덩어리를 매번 산꼭대기에 다시 올려놓아야만 하는 ‘시지포스의 신화’처럼 말이다.

 

“소통이 안 돼서 회의에 가는 게 무서워요.”

“소통이 잘 돼야 사업이 잘 될 텐데…”

 

매번 이런 식이다. 시쳇말로 기승전 ‘소통’이다. 모든 문제는 ‘소통’의 부재에서 시작되고 모든 해법은 원활한 ‘소통’으로 끝난다. 여기저기 인간관계가 틀어지고 감정이 상하고 업무가 순조롭지 못한 현실의 배후에, 아니 전면에 ‘소통(疏通)’ 혹은 ‘불통(不通)’이 있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전형적인 순환논리다. 기업에서도 비영리조직에서도, 정부기관에서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말 이 모든 문제가 ‘소통의 부재’, 혹은 ‘불통’에서 비롯된 것일까? 혹시 소통은 일종의 ‘신화’ 같은 것 아닐까? 혹시 ‘합리적인 소통’이란 ‘환상’이 아닐까? 그렇다. 소통 자체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통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라, 소통에 대한 근본적 ‘성찰의 부재’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불통이 과학이다

 

꽤 오래 전 태평양 너머 이야기다. 1980년 아메리카 대륙의 유럽연합(EU)이라고 할 수 있는 미주기구(OAS)라는 국제기구는 사회적 소통의 어려움을 이해하고자 칠레의 과학자들에게 소통의 과학적 근거를 학습할 수 있는 강의를 요청했다고 한다. 40여 년 전 아메리카 대륙의 국제기구에서도 소통은 절박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불통의 쳇바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아마도 소통의 비결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부탁을 받았던 사람들이 소통전문가나 사회학자가 아니라 생물학자, 오늘날의 분류로 말하면 인지과학자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생물학의 관점에서 소통의 본질을 탐색하는 강의가 진행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교재가 출간되었다. 『앎의 나무』가 그것이다. 책의 부제는 ‘인간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뿌리’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면 ‘정보의 전달’로써의 소통은 없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었다.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관(導管/pipe)을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비유는 진실과 거리가 있다. 개념이 조금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인용하면 이렇다.

 

“우리 이야기를 따라가면 생물학적으로 보아 의사소통에 ‘정보의 전달’이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구조접속의 영역에서 행동조정이 일어날 때마다 의사소통이 있다. 이 결론이 충격적으로 들린다면 그 까닭은 의사소통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비유이자 이른바 의사소통매체가 유행시킨 ‘도관’의 비유를 좀처럼 의문시 않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 따르면 의사소통이란 어떤 곳에서 생겨서 어떤 도관에 따라 중계되어 다른 곳으로 전달되는 어떤 것이다. 곧 전달되는 어떤 '것'이 있고, 이것은 도관을 따라 중계되는 것 안에 들어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그림이나 물건, 인쇄된 낱말 따위에 '정보'가 들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 분석에 따르면 이 비유는 처음부터 틀렸다.“

 

의사소통의 ‘의사(意思)’란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뜻이다. 쉽게 말해 생각이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생각의 전달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앎의 나무』의 저자들에 따르면 바람직한 의사소통의 결과는 ‘행동의 조정’이다. 그러나 행동의 조정이 어렵기도 하지만, 행동이 조정된다고 하더라도 애초의 의도가 전달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의사소통 현상은 무엇이 전달되느냐가 아니라, 수신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고 이것은 '정보의 전달'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는 이는 말하는 이대로 자신의 의도대로 말하고, 듣는 이는 듣는 이대로 자신의 머릿속 경험과 학습과 기억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더 이상 다음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즉시 관계가 단절된다. ‘말하기-듣기’가 이루어졌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생각의 교환으로서의 소통은 환상인 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완전한 이해와 수용은 불가능하다. 불통(不通)은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지만, ‘원초적 진실’이기도 한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빨강사과’라는 말을 주고받더라도 각자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사과를 떠올린다고 한다.

 

요컨대 소통이 안 되는 이유를 찾기 전에, ‘소통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먼저 필요한 것이다. 소통이라는 과제의 해결은 소통의 비법과 기술을 찾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할 수 없음’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지포스의 신화, 아니 ‘소통의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길인지도 모른다.

 

인지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구조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일종의 ‘블랙박스’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유전과 경험과 학습에 의해 형성된 인식의 ‘블랙박스’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블랙박스와 블랙박스의 관계인 것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모양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합리적 의사소통’이나 ‘이상적 의사소통’은 불가능한 도전, 아니 일종의 환상인 셈이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의사소통 능력을 키워나가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이상적인 의사소통’이라는 환상에 붙잡힌다면 그것은 개인과 사회시스템의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소통’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보의 전달로서의 소통이 일종의 환상이라니, 그렇다면 소통을 포기하자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소통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통해 소통의 진면목을 탐구해보자는 것이다. ‘이상적인 소통’이라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라면, 이제 불통을 출발점으로 새로운 길을 탐색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불통과 소통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합리적 의사소통의 주창자인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중 한 사람인 니클라스 루만이 그 사람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바람직한 사회란 개방적이고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소통의 공간은 공적인 영역이며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기초가 된다. 또한 이상적인 대화는 가능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어진다. 이른바 공론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루만에 따르면 이러한 하버마스의 주장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다. 이른바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앎의 나무』의 저자들과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이론적 준거점인 ‘이상적인 대화 상태’라는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전제이다. 이성적인 담화를 통해 생각의 일치에 도달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말이다.

 

또 다른 독일 이론가의 도움을 받아 니클라스 루만의 생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버마스와 달리 루만에게 대화란 오히려 대화의 불가능성 때문에 만들어진 가교에 불과하다. 원초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완전한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하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으며, 내가 아무리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할지라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뿐이다. 따라서 루만이 보기에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자체는 블랙박스와도 같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소통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은 인간이 살기 위한 하나의 체계에 불과하다. 루만이 보기에 이성적인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대화이자 소통이라는 하버마스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나 선생과 학생의 대화는 대화의 체계에 앞서서 존재하는 두 이성적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 혹은 선생과 학생이란 가족이라는 소통 체계와 학교 제도라는 소통 체계의 산물이며 그 체계를 형성하는 두 항일 뿐이다. 따라서 루만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이란 그에 앞서 주어진 주체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의 산물일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할 따름이다.“ (박영욱, “의사소통은 없다! +와 -만 존재할 뿐! - [철학자의 서재]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프레시안>, 2013. 6. 14. 강조는 필자.)

 

만약 앎의 나무의 저자들이나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이 타당하다면,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정보의 전달로서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소통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맹수의 공격을 피할 때에도, 농사를 지을 때에도,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인간은 행동을 조정해야 하고, 원활한 조정을 위해서 소통을 해야 한다. 그렇다. ‘가교’가 필요하다. 너와 나를 이어주는 다리, 공통의 신호체계와 소통체계가 발명되어야 한다. 소통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교감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을 넘어선 제3의 존재로서의 사회적 시스템 말이다.

 

루만의 표현을 빌자는 그것은 바로 ‘사회적 체계’로서의 소통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소통체계’이다. 생각의 직접적 교환이 아니라, 의사소통 체계의 창발과 그것의 지속이 곧 소통 시스템으로서의 사회인 것이다. 루만에 따르면, 기업, 조합, 대학, 정당 등과 같은 조직도 독자적인 결정 메커니즘들을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일종의 소통체계다.

 

소통은 합의가 아니다. 설사 합의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합의의 내용은 각각 자신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경험에 따라 자기 식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공통의 언어가 있다 하더라도 기대의 차이, 이해 정도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역시 성공적 소통의 증거는 다음 단계의 소통이 이루어졌을 때이다. 예컨대 ‘사랑한다’는 말을 전달했다고 소통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 예컨대 데이트 약속을 잡았을 때 소통은 성공한 것이다. 소통은 합의에 도달했을 때 성공한 것이 아니다. 소통은 그것이 수행되고 후속 소통을 이끌어낼 때 성공한 것이다.

 

‘말하기-듣기’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체계이다. 그렇다. 소통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것이었다. 의식의 교환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창조물이다. 조직도 하나의 사회적 체계이다. 조직활동은 인격과 인격과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소통을 통해 ‘결정’을 자기생산하는 사회적 체계인 것이다.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소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소통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인격적 대화가 아니라, 가족 혹은 부자라는 하나의 사회적 체계에 의해 작동되는 어떤 것이라는 말이 된다.

 

조직이라는 사회적 체계 내에서의 갈등도 대부분 소통에 대한 과한 기대와 오해에서 기인한다.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말하지만, 아들에게 그것은 부자관계의 언어로 이해된다. 조직의 리더는 ‘솔직히 말해서 말이야’라며 한 인간으로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직의 또 다른 구성원은 조직적 체험으로 그것을 해석한다. 거꾸로 조직의 또 다른 구성원은 개인의 감정으로 리더에게 호소하지만, 리더에게 그는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존재로 치부된다.

 

더욱이 조직언어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경우, 조직 내에서 구성원과 구성원의 대화는 거의 바벨탑 수준의 대화가 되기도 한다. 요컨대 ‘인격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의 구별이 절실하다. 소통의 새로운 출발점은 ‘대인관계’와 ‘조직소통’을 구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생명의 근본 범주로서의 ‘대화’

 

요컨대 생각과 생각의 교환으로서의 소통은 없다. 그러나 거꾸로 소통 없이 삶도 없다. 소통의 발명으로만 인간은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이를 위해 인류는 모임이나 집회와 같은 상호작용체계, 기업이나 정당이나 협동조합과 같은 조직체계, 그리고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소통체계들)들을 창조해냈다.

 

그런데 그 관계 만들기에는 두 개의 범주가 있다고 한다. ‘명령’과 ‘대화’가 그것이다. 『앎의 나무』의 저자들에 따르면 어떤 존재를 컴퓨터처럼 타율적 체계 혹은 통제된 체계로 볼 때 체계와 상호작용하는 존재의 근본범주는 ‘명령’이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는 ‘잘못(오류)’이다. 반면에 자율적 체계의 관점에서 볼 때 살아있는 존재의 근본범주는 ‘대화’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는 ‘이해의 단절’이다.

 

그렇다. 인간에게 있어 ‘이해의 단절’은 상호작용의 중단을 의미하고, 다시 그것은 곧 생명의 지속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물론 ‘명령적’ 상호작용으로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이미 생존모드의 소통체계를 넘어섰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대화만이 삶의 범주가 된다.

 

다시 정리해보면 이렇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 사이에는 상호작용이라는 관계가 있다. 그런데 타율적 존재의 내적 관계는 명령으로 작동되는 반면, 자율적 존재 사이에서는 ‘대화’로서만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대화가 아니고서는 공통의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대화는 ‘행동의 조정’, 다시 말하면 ‘협력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통의 본질이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면, 대화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소통, 혹은 대화의 도달점은 ‘공동의 의미구성’이다. 영어 communication의 어원은 “뭔가를 공통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구성주의 이론가들은 이런 상호작용을 가리켜 ‘공동의 의미구성’ 과정이나, 혹은 ‘의미의 교섭’ 과정, 혹은 ‘참여의 공유’ 과정이라고 말한다.

 

‘숨겨진 질서’ 이론을 창안한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탁월한 대화이론서 『창조적 대화론』의 저자인 데이비드 봄은 이를 ‘공통의식(common consciousness)’라고 표현하고, ‘대화의 비전’은 공통의식의 창조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소통은 전달과 설득이 아니라 ‘공동창조’인 것이다. 대화의 참가자들은 새로운 뭔가를 ‘공동으로(in common)’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공동의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이상(理想)일 수도 있다. 협동조합의 정의를 빌어 말하면, 공동의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이 될 수도 있다. 이렇듯 공동의 의미 구성이란 지금까지 지금 여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는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인류는 ‘상상의 질서’를 함께 만드는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말한다. 150명까지의 공동체는 공동의 의미가 없이도 하나가 될 수 있다. 침팬지와 같은 다른 유인원/포유류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인간은 ‘이념’ 혹은 ‘신화’와 같은 상상의 질서를 통해 하나가 된다. 국가, 민주주의, 공동체의 신화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이제 인류는 소수의 패권자나 천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중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어떻게 공통의 의미를 창조할 것인가?

 

사회구성주의에 의거해 소통의 철학과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는 『소통』이란 책에 나오는 도자기 만들기가 떠오른다. 이 책의 저자들에 의하면, 대화는 이를테면 ‘함께 도자기 만들기’이다. 그런데 그 도자기는 물레를 돌려서 만드는 도자기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물레 위의 도자기를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드는 광경을 상상해 본다. 흙을 조금씩 보태고 기본 모양을 만드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거기에 작은 무늬라도 넣는 순간 도자기 전체의 모양이 바뀐다. 어느 쪽에서건 조금이라도 개입을 하는 순간 의도와 다르게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체적인 모양이 변화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자기는 물론 ‘내 것’이 아니다.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미 그 자체로 새로운 존재이다. 제 3의 것이다.

 

‘대화한다’는 것은 공통의 가치, 의미, 창조물을 창조하는 일이다. 단, 사람들 사이에서 산출되는 의미는 각자의 머릿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화와 대화 사이에 있던 것이다. ‘나’의 것도 아니고 ‘너’의 것도 아닌 제3의 창조물. 즉 ‘사이 너머(between beyond)’의 그것이다(‘사이 너머’는 뒤에서 언급할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철학을 함축하는 개념이자 소식지 제목이다.).

 

대화의 결과물은 시쳇말로 ‘자식’과 같다. 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생겨났지만, 어머니의 것도 아버지의 것도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소통』의 저자들은 이렇게 언명한다. “대화적으로 듣고 말할 때, 당신은 의사소통으로 생기는 결과를 통제할 수가 없다.”

 

물론 회의와 대화는 다르다. 조직체계에서의 공식적인 소통절차인 회의의 목적은 ‘결정’에 있다. 그러므로 ‘동의’가 중요하다. 그러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정과 지지이다. 대화는 결정을 위한 ‘회의’나 찬반을 목적으로 하는 ‘토론’과 다르다. 대화는 회의와 회의 ‘사이’에 있다. 회의 ‘속’에 있다. 사회적 체계로서 조직의 진화도 결국 대화에 성패가 달려 있다. 한 경영학자는 “기업의 성공의 유일한 대안은 학습조직이고 학습조직의 성공의 유일한 방법은 대화다“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창조적 대화’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가정유보’가 그것이다. 데이비드 봄의 말이다. 모든 사람은 세계관, 가치관, 신념체계로 일컬어지는 자기만의 숨겨진 가정(假定)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가정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삶의 의미, 국가의 이익, 종교 등으로 자신의 가정을 포장하기도 하고, 위협을 느끼고 이를 방어하려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감정적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의견은 각자의 가정이고 각자의 경험에 불과한데도 ‘진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의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숨겨진 가정, 즉 의견을 보류해야 한다. 만약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거나 설득하는 데 주력한다면 공동창조 자체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상대방은 자신이 부정당하는 느낌과 함께 내면적으로 공존을 거부하게 된다. 생존모드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대화의 핵심은 이를테면 영점(0, zero point)으로 돌아가기이다. 흔히 말하는 대로 자신의 생각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데이비드 봄은 ‘사고(thouht)’를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진 전달매체로 간주한다. 사고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개념 혹은 관념(집합표상)으로 실재를 왜곡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식은 원초적으로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대화의 진정한 출발점은 다름 아닌 자신이 알지 못함을 아는 것, ‘무지(無知)의 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루만은 이렇게 말한다. “무지에 대한 소통에서부터 소통을 시작할 수 있다.”

 

안심의 공간

 

‘대화의 사건’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사회적 대화운동을 펼쳐왔던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얻은 말이다. 대화의 사건은 ‘사이 너머’와 함께 대화문화아카데미의 모토였다. ‘대화의 사건’이란 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적인 자각이나 영감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자주 외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지고, 프로젝트가 기획된다. ‘사이’가 개인적 관계라면 그 ‘너머’는 이를테면 ‘사회적 체계’라고나 할까. 대화의 사건은 ‘사이’에서 벌어지지만, 그것은 ‘사이 너머’에서 구현된다. 사건의 결과는 더 이상 ‘나의 것’도 아니고 ‘너의 것’도 아니다. ‘우리의 것’도 아니다. 너머의 어떤 것. 제3의 어떤 것이다. 우리 자식이 우리 것이 아니듯이.

 

사회=소통체계가 하나의 살아있는 시스템이라면, 그 역시 진화할 것이다. 그 계기는 대화에 있다. 사회적 체계의 진화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화만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대화를 통해 공통의 스토리를 창조하고, 새로운 공통의 현실을 구성한다. 소통체계는 공식적 의사결정구조와 비공식적 대화가 역동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음양론적 세계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둘 것이 있다. ‘생존모드’로부터 벗어나기이다. 소통의 기본조건이며 대화의 절대조건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실질적인 조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실존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다. 전자는 자기성찰을 통해, 후자는 사회제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안전한 공간 만들기, 안심의 공간 만들기이다.

 

진화사적으로 볼 때 인간에게는 세 개의 뇌가 있다고 한다.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의 뇌와 인간의 뇌가 그것이다. 그 특징에 따라 생존의 뇌와 감정의 뇌와 사고의 뇌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몸의 존재이면서 마음의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언어로 말하면, 인간은 생물학적 체계이면서 심리적 체계이고, 동시에 사회적 체계이다. 파충류의 뇌가 작동할 때 대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생존모드, 즉 도망가기 아니면 싸우기이다.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다시 말해 안심할 수 없다면, 대화는 부재하고 소통은 단절되고, 결국 조직은 균열된다.

 

『앎의 나무』의 저자들, 마투라나와 바렐라에 따르면, “다툼이란 언제나 상호부정”이다. 양쪽이 서로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다툼을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 대화의 비전이라고 말했던 ‘공동의 한 세계’를 내놓을 존재영역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전제조건으로써 ‘안심(安心)’의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 아니 함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탈(脫) 생존모드로의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찰. 소통과 대화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돌아온다. 사람다움의 본질인 성찰, 곧 ‘자신의 앎에 대한 앎’을 질문한다. 대화의 첫 번째 주제는 ‘자기’ 혹은 ‘마음’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대화의 사건’ 중 가장 큰 종류의 사건은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모심과 살림 9호(2017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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