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생명운동의 전망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저자: 주요섭
발표: 생명운동활동가워크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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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명 혹은 생명운동에 대하여

‘생명’이라는 화두는 나와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제 그 가치지향과 세계관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고 해두자.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 삶의 지향이 되었다고 해두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삶을 구속하는 문화와 제도를 한편으로 ‘혁파’하면서 또 한편으로 ‘재구성’해나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 과정이 곧 자기조직화의 과정, 혹은 사회적 진화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혁파’와 ‘재구성’(여기서 ‘재’는 ‘다시’가 이면서 ‘새로운’이다.)의 준거는 무엇인가.
생명을 까고 까고 까고 까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쪼개고 쪼개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물질,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

생명은 그 자체가 준거가 될 수는 없다.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용론을 빌어 말한다면 생명은 體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다름 아닌 用이다. 마치 수운선생이 동학의 21자 주문에 주석을 달면서도 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듯 생명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자기전개, 혹은 자기 조직의 드러남을 이야기해야 한다.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의 ‘결’, 그 무늬가 우리의 삶이다. 생명은 통찰이지, 모토가 아니다. (생명가치와 경제가치의 대비도 방편이다. 경제활동도 사실 생명활동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결대로 살 수 없게 만드는 그것, 생명의 결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정치적 제도는 무엇일까. 진화는 진행형이므로 후자는 속단할 수 없으나, 전자는 분명하다. 자본주의. 그렇다면 혁파와 재구성의 준거는 ‘비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될지는 모르나, “자본주의는 ‘아니다(不然)’”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를 不具로 만드는 약탈적 자본주의적 질서, 그것을 유지 존속시키는 제도와 문화와 물적 토대를 생명의 결대로 재구성하는 것이 곧 생명운동이다.

그러나 생명운동은 생명운동이 아니다. 아니 모든 게 생명운동이다. 생명운동은 공동체운동이면서, 민중운동이면서, 환경운동이면서, 평화운동이면서, 협동운동이면서, 자치운동이면서, 새문화운동이다.

혁파와 재구성의 과정기획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생명의 결대로 우리의 삶과 사회를, 天地人,三才의 세계를 재구성하려 한다. 다시 반복하자면, 문화=하늘, 생태경제=땅, 사회=사람을 전일적으로 다시 새롭게 하는 개벽에 참여하려 한다. 그 범역은 나의 이웃과 지역으로부터 민족, 동아시아, 지구까지 다차원적이다.
송희식 변호사가 오래전 썼던 소설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평화의 습격.

‘평화의 습격’이란 말 안에는 혁파와 재구성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또 한 가지, 평화는 삼재의 세 영역, 문화운동(기획), 생태경제 운동(기획), 사회정치적 운동(기획)을 아우르며 동시에 중심이 되는 생명의 자기전개이다. 다시 체용론으로 말하면, 생명은 체, 평화는 용이다. 기우뚱한 균형과 조화의 하모니, 평화의 절명의 과제다.

천지인, 삼재는 기본적으로 문화전략이다. “풍류로써 세상을 건지리라”는 정산종사의 말씀처럼, 天文, 地文, 人文을 관통하는 우주의 무늬(땅의 대응으로써의 천이 아닌 우주적 천)를 새롭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중심전략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비롯한 우리의 삶의 무늬를 새롭게 그려가는 문화기획은 생태경제적 기획이나 사회정치적 기획을 이끈다.

오늘 우리의 재구성 전략은 이중적이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을 보자. 개벽을 꿈꾸던 전봉준 장군은 어찌하여 대원군과 연통하고, 임금의 신하임을 전제했던가. 이중전략이다.

자기조직화의 과정은 자기 존재를 전면 부인하여 스스로를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살아있어야 한다. 개벽의 꿈은 지금 여기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전투와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진화한다.

비자본주의적 재구성은 자본과 심각한 전투를 벌이면서도,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시장의 질서를 타고 가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평화의 습격’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맥없는 전투력이다.

삼보일배는 김지하 식 표현으로, ‘안으로 굴러들기’ 싸움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삼보일배와 탁발순례는 아름다운 聖戰이다. 탁월한 기획이지만, 우리에겐 자본의 마성을 혁파하는 전투력도 필요한 때가 되었다. 이제 눈을 밖으로 돌릴만큼 내공이 쌓이지 못하기 때문일까.

우리의 진지는 지역, 곧 생활공동체이지만, 가치와 문화를 나누는 유목적 네트워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언젠가 공허하다. 떠나고 싶어진다.

또 다른 이중 전략이 필요한 셈이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삼재의 영역에서 다양한 운동과 기획이 이루어지면서도, 평화의 기획이 절박하다는 것, 문화혁명이 개벽운동의 중심이라는 것. 안팎과 위아래의 이중전략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우리의 운동과 기획은 구조적 접근, 미래를 위한 전략이 아니다. 그래서 얀츠는 ‘과정기획’을 말한다. 구조기획이 아닌.

주체 혹은 조직

오늘 우리가 개벽의 시대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깨우친 사람이 때를 잘 만나야 한다.’ 不遇한 사람은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일은 때가 왔으되, 깨우치지 못한 사람이다. 주체의 문제이다.

오늘 우리가 개벽이라 말하는 것은, 때를 만났고, 그 때를 깨우치고 새 세상을 더불어 열어갈 주체가 형성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 새로운 주체들, 다양한 자율적, 자구적 조직과 동호회, 수행자들, 미학적 야심가들을 만나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익히 알고 있듯이, 인터넷과 모발일로 무장한 네트워크세대이다. 이와 관련해 운동의 전망의 대해서, 하승창 님의 글이 떠오른다.

공동체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자유인의 모습을 지닌 운동가. 거창한가? 우리를 옭아 맨 낡은 방식의 사고와 관행을 벗어던질 줄 알아야 한다. 창조적 자유인으로서의 운동가는 그런 점에서 거창하지 않다. 소박한 실천이다. 우리가 90년대 운동의 전형에 맞는 운동가로 관성적으로 훈련되고 있는 사이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있고, 반면에 기존 시민단체에 속하지 않은 곳에서 훈련되고 있는, 전과 다른 모습의 운동가들이 출현하고 있다.

어느 단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또 여러 단체와 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각각의 단체들에게는 이들은 자원활동가이지만 그들이 관계 맺는 의제의 영역과 그 영역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다른 의미의 활동가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큰 활동한다. 인터넷 상의 수많은 카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전과 다른 활동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기존 시민단체 인사들처럼 유명하지도 않지만 이들이 던지는 문제의 식과 활동방식은 자신의 삶과 일치시키려는 진정성이 바탕에 있기에 신뢰를 더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존 시민단체들이 90년대를 통해 시민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을 급속하게 확대한 공간에서 시민운동은 대중적으로 성장하였다. 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스스로 담론을 만들고 네트워크 하여 거리로 나서고 있다. 기존 시민단체들이 이를 운동의 변화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동원할 부대’ 혹은 ‘동원해야 하나 동원되지 않는 부대’로 인식하는 경향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 이미 이들은 스스로 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얘기를 이어가보자. 네트워크는 조직이면서 조직이 아니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생명의 결대로 우리의 삶과 사회를, 천지인 三才의 세계를 재구성한다는 주체는 누구일까. 사건이다. 만남이다. 요컨대, 생명운동의 네트워크는 생명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금 여기서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다차원적 만남이자 사건이다. 사건을 잘 만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생명(활동가)굿이라고나 할까. 컨퍼런스와 회의를 넘어서는 흐드러지는 굿판이 열려야 한다.

두 번째, 결사가 필요하다. 이 결사는 권력의 전취를 목적으로 하는 전위당과 다르다. 결사의 목표는 세대를 넘어서는 개벽의 꿈이다. 특히 이 결사는 사회정치적 이중전략까지도 자기의 과제로 안고 가야 한다. 이하 생략. 콘스피러시?

세 번째. 무지개 연대로 지금 여기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물론 무지개 연대의 생명 운동적 주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정치 사회적 메시지를 발신하고 공유하고 생산하는 주체가 나와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벽적 전망은 무지개 연대의 형성을 통해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무지개는 ‘물 門’이라고 한다. 모든 빛깔은 담을 수 있다.
“너희가 녹색이라면, 혹 너희가 적색이라면, 우리는 무지개 빛이다”.

* 이 글은 지난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가평 바람과 물 연구소에서 생명과 평화의 길, 생명평화결사 주최로 열린 <생명운동활동가워크샵>에서 정읍통문 발행인이자 정읍 생명문화교육연대 운영위원장인 주요섭 님이 발표한 글입니다.

2009/09/17 02:38 2009/09/17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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