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우리 선생님

문서 자료실 | 2009/07/08 11:58 | 모심과살림
제목: 따뜻한 우리 선생님
저자: 황도근, 고제순, 김호영 / 정리:김호영
발표: <무위당선생을 기리는 모임> 소식지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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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어머니 얼굴 또는 어머니 자궁 같은 무위당 선생님의 서화


심부름꾼 모임에서 전표열 선생을 모시기로 하고 내게 연락책과 원고 정리까지 맡겼는데 정작 연락을 드리려니 걱정이 앞섰다. 그 간 무위당을 이야기해 달라는 인터뷰에 다들 손사래를 치셨던 까닭이다.

「보고 싶어.」
전화해서 하시는 선생의 고유 어법이다.
그래서 나도 전화 드리고「보고 싶습니다」했다. 다음날,
10시 45분경에 도착 할 것 같다는 전화를 15분전에 받고 부랴부랴 시외버스 정류장에 갔다. 지병인 관절염으로 어렵게 차에 오르시면서
「괜찮아, 많이 나아졌어. 근데 뭔 일 있어?」
「보고 싶어서요, 무위당 선생님 말씀도 듣고 싶구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어야지.」
「아무 얘기 나요.」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하기 어려운데....」
눈치를 채셨나 보다. 시대의 황무지를 갈아엎으며 일구어간 무위당과 무위당 사람들, 나무가 크면 그늘도 넓어서 가지 가지 마다 영근 의미(意味) 끝에 숱한 사연, 진한 인연 오죽 했겠나 싶다. 그래서 무위당에 대한 이야기를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것에 비유 하는가 보다.

[전문보기]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던 황도근, 고제순 선생과 반갑게 인사하시곤
「비싼 집이네」 하시는 말씀에 뜨끔했다.
이리저리 녹음기를 시험 해 보던 황 교수가 녹음이 안 된다며 방을 나간 사이에 고제순 선생이,
「선생님, 녹음기 없이 그냥 하시지요? 장선생님하고 가까이 지내셨으니 알고 계신 것들 많으시죠?」
「장선생님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더 말 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조심스럽기도 하고.」

선생님에겐 무위당은 어떤 분이냐는 뜸 금 없는 첫 번째 질문에
「따뜻한 우리선생님이에요, 훈훈한 우리선생님이시지.」
고희를 넘긴 선생의 표정은 예전 대성학교 시절로 돌아 간 듯 했다.

「어떻게 만나셨어요?」,
「성당에서 만났어요. 장선생님하고 같은 성당엘 다녔지. 6.25 후에 내가 지금으로 치면 파랑새라는 고등공민학교에 다녔어. 고등학교에 진학 하려면 문교부 인가 난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해서, 그 때 장선생님이 대성학교 이사장으로 계셔서 찾아뵙고 상의를 드렸더니 대성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 하게 된 거지. 그 때부터 쭉 선생님 하라는 대로 살았어요. 고등학교도 경복이나 춘천에 원서를 내려고 했는데 장선생님이 놀던 곳이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대성에 진학하게 되었고 대학도(고려 대학교) 그렇고. 그 때 내가 대학에 갈 형편이 못 되었거든, 등록금이 만이천원, 책 값 교복 합쳐서 만이천원이었는데 장선생님이 이렇게 저렇게 마련해 주셨지. 성당에서도 좀 내고,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엔 모르셨어요?」
「몰랐지, 나중에 알았어. 장선생님은 그런 분이야. 후에 내가 장선생님하고 이런 저런 일 시키는 대로 함께 하게 되었는데 저건 저렇고 이건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 말씀드리면 “그래, 그랬구먼” 하시곤 모르시는 척 하신단 말씀이야, 그래서 내가 선생님 미리 다 아시구선 시침 떼신다고 반문하면 “허 허” 웃고 마신다고. 그런 분이야.」

「진광 학교에서 교편생활도 장선생님 권유셨어요?」
「그래요, 그 무렵 내가 원주 근처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제대하고 장선생님이 진광에 있으라고 해서 진광학교에 남았어. 또 원주 엠비씨에서 방송하라고 해서 원고 쓰고 방송하고, 개운동 기숙사 맡으라고 해서 사감 노릇도 하고, 가톨릭 쎈터에서 일하라고해서 쎈터 일도 했지. 나중에 한살림에 가라고 해서 한살림에 갔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다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살았어.(방안 웃음 가득)」

「다른 제자들은 영어 배웠다는데 선생님은 무슨 과목을 배웠어요?」
「미술을 배웠어요, 하도 오래돼서 기억나는 건 없지만 하여튼 선생님 시간은 굉장히 엄해서 애들이 떠들지를 못 했어. 수업시간엔 아주 엄하셨다구. 그 시절엔 선생님들이 부족해서 한 선생님이 여러 과목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요즘 대성학교 문제로 원주가 시끄럽다고 말씀드리니
「세상이 다 아는 일이예요, 그 때 장선생님과 함께 학교 설립 했던 몇 분 아직 살아 계시잖아요.장선생님이 설립 허가 받으러 도시락 싸가지고 서울 다니셨어요. 내가 그때 봉산동 선생님댁 근처에 살았는데 학교 갈 때 봉천내에서 큰 돌맹이를 들고 등교했어요. 선생님도 돌 들고 가시고. 학생들, 선생님들 다 그렇게 학교 지었어요.」

「그 돌로 뭐 하는 대요?」
「학교 축대 쌓고 그랬지.」
개울물 보듯 빤한 일을 가지고 장선생님을 헛되이 하신다고 무척 서운해 하시며 긴 이야기를 하였는데 여기 다 옮기지 못 한다. 살아계신 이들에 명예와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서.

「무위당 선생님과 지학순 주교님은 어떤 사이였어요?」
「아름다운 만남이라고들 하지요, 주교님이 원주교구에 착좌 하시고 장선생님을 만난 것이 큰 인연이 되신 거지. 장선생님이 춘천에 있던 김영주 선생을 주선하니까 주교님이 세 번씩이나 찾아가서 기어코 원주교구 일을 많이 맡기셨는데, 당시 교회 내에서는 이해 못하는 분도 많았어요. 주교님이나 장선생님이나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던 거지.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화 운동의 초석인 민청학련 사건도 그런 뜻에서 이해하면 좋겠어요.」

「무위당의 사람들이라 할까요, 봉산동 장선생님댁엔 사람들이 많았지요?」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았어요. 요즘 ‘개혁’을 말하고 ‘생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거의 다라고 생각해요. 이영희 선생님도 속상하면 소주 한 병 들고 원주로 오셨어요. 위안처인 셈이였지. 내가 한 때 서울에서 식당을 했었어,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더라구. 식당 문을 닫고 열두시쯤 원주 기독병원엘 도착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암으로 두 번째 입원 하셨을 때야, 병원에 갔더니 말씀을 못 하시더라구. 바라만 뵙구 돌아 왔는데 다 다음날 돌아가셨다고 기별이 왔어요.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나 보고 싶었나 봐요. 병원에서 돌아오면서 늘 하시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났어요. “우리가 배우고 일하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 하는 일인가. 사람을 위하는 일이지. 땀 흘려 농사짓는 농부들도 왜 농사를 짓나? 사람을 위해서야. 그래서 사람을 위하는 일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야.” 약주를 한 잔 드셨을 때는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공산주의 민주주의 또 무슨주의니 하는 것들 다 뭐하는 주의지? 다 사람을 위하자는 주의 아닌가? 그런데 사람은 위하지 않고 딴 짓들만 하지 않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면 같이 물에 빠져야지. 안 그런가?” 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쉽게 말씀을 하셨어요. 서울까지 오면서 선생님 생각 할 수 록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 했어요. 그런 선생님이시기에 오늘날의 생명 사상, 생명 철학을 정립해 내셨다고 믿어요.」
선생은 중간 중간 무위당의 말씀을 곱씹으며 각인하는 듯 했다.

「장선생님에게 받으신 글 있으세요?」
「대판무언(大判無言)이라는 글 한 점 받았지. 말을 안 하는 것이 크게 판단하는 것이라고 써 주셨는데, 내가 말이 많다고 꾸지람 하신거지.(웃음소리)」

「80년대 쯤 장선생님 생각이 바뀌셨다고 하는데요?」
「내가 보기엔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하고 많이 바뀌신 것 같아요. 왜 모세가 산속에서 기도하고 나왔을 때 모습 있잖아? 10. 26 나고 선생님이 한 달 간 내가 운영 하고 있던 개운동 기숙사에 피해 계셨는데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 주셨지요. 지금 애기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한가지....」

「그때 얘기 해주시지요?」
「선생님은 남에게 꾸어준 돈을 받으러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돈을 꾸어준 사람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고 꾸어 쓴 사람은 여유 가 없는 사람인데 여유가 생기면 가져오겠지 하고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끝까지 안 가져오면 돈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싹 잊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나 돈 많이 잊어(?)버렸지.(웃음소리) 또 그때 선생님은 술 한 잔 드시면 잘 우셨어요.」

「왜 우셨어요?」
「왜 우시는지 내 좁은 생각으론 헤아릴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말씀 못 하실 일들, 답답한 사람들 일 생각 하시면서 눈물짓지 않으셨나 짐작해요.」

「 어떻게 우셨어요?」
「 그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시지.」
흔히 원주를 70년대 민주화의 성지라고 한다. 그 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지학순 주교님, 김지하 시인이 있었다. 10.26 사건으로 긴박하고 혼란스런 시절 야사(野史)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꾸어준 돈 이야기, 우시던 무위당의 기억으로 피해가셨다. 비유를 하신 것인지.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에 한 말씀 해주시지요?」
「모임에서 어디 조용한 곳에 무위당 아쉬람을 지었으면 해요. 장선생님의 자취와 생명사상을 두루 알리는 일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있는 사람 좀 내고, 없는 사람 그냥 편히 쉬어갈 수 있게요. 생전에 선생님이 당신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잖아요?」

전표열 선생은 두 시간 반 동안 내내 자리를 지키시며 처음 인터뷰를 사양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무위당에 대한 그리움으로, 제자 된 자랑으로 동석한 세 사람을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역시 그 선생님에 그 선생 이다.
「선생님 긴 시간 고맙습니다. 내내 건강하시구요.」
하고 일어서려는데 밥 집 벽에 노자의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를 화제로 한 무위당의 서화가 걸려 있었다.

「그래, 내 얘기 하면서 밥 잘들 먹었느냐.」
밥 한 그릇에 생명과 평화를, 자치를 이야기하신 따뜻한 우리 선생님, 무위당의 말씀도 들었다.
2009/07/08 11:58 2009/07/0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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