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생명평화활동가 대회 <나에게 생명평화 운동은 무엇인가>
- 2009. 4. 3-4 / 원주 토지문화관 / 모심과살림연구소 ․ 무위당 좁쌀 만인계 주최
[발제 2]
Fielder's Choice, 생명평화운동의 현장
이진천 (봄내살림 생산관리팀장)
'봄내살림'은 강원도 춘천시에서 로컬푸드, 회원제 농산물직거래, 학교급식운동을 펴고 있는 <춘천친환경농산물유통사업단>의 이름입니다. 노동부 사회적일자리 지원 사업에 힘입어 <춘천생협>과 <춘천친환경농업인연합회> 등이 함께 준비해서 지난 2008년 11월에 출범했습니다. 봄(春)내(川)는 강원도 춘천의 옛 이름입니다.
1. 나의 현장은 어디인가? ...... 라는 물음
- "나의 현장은 어디인가?" 는 제가 붙인 것이 아니라 받은 제목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골방이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나 물을 일입니다. 그 때 얻는 답이 가장 정직하고 신뢰할만하겠지요.
- 그나저나, 준비하시는 분들은 왜 저에게 이런 퍼즐을 맡겼을까요? 아마도 가장 최근에, 뚜렷하게, 적절하게 '현장'을 옮긴 사례라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좋습니다. 당위적이거나 논리적인 접근은 일찌감치 포기합니다. 직관적으로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세 가지만 건드려 보겠습니다.
- ① 생명평화운동 고유의 현장은 있는가? ② 생명평화의 시의적절한 적용 ③ 지금 현장을 묻는 님들에게 드리고 싶은 제언
2. 대체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는가?
- 현장은 어디인가. 사람에 따라서는 빈번하게 묻기도 하고, 평생 어지간해서는 묻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묻는 그 순간만큼은 '길을 잃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 때, '길을 잃은 자리가 어디쯤인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 ㉮ 현장을 결정하지 못하고 길을 찾는 것인가? ㉯ 현장 속에서 일시적으로 갈 길을 잃은 것인가? ㉰ 현장을 명분 있게 회피할 길을 엿보는 것인가?
- 크게 3가지만 들었지만, 경우의 수는 더 다양할 것입니다.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결국 핵심은 '얼마나 나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사실 관습적으로 현장 운운하는 지리하고 두루뭉실한 물음은, 대개는 위선적이거나 비겁할 수 있습니다.
3. 생명평화운동의 현장은 따로 없다.
- 생명평화 활동가들이 모인 자리이니, 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생명평화운동 고유의 현장이 있는 걸까요? 저는 이런 의문을 가진지는 좀 오래되었습니다. 기독학생운동 출신인지라, 성서에 가득한 생명과 평화의 문제와 친숙합니다.
- 제 결론입니다만, 생명평화운동의 현장은 따로 없습니다. 거의 확신합니다. 독자적인 현장은 없습니다. 특히 공간적인 개념의 현장 따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운동 현장은 어디냐"는 차라리 말이라도 되지만, "나에게 생명평화운동 현장은 어디냐"는 질문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혹시, 새만금 삼보일배? 생명평화탁발순례? 어쩌면 광화문 촛불? 선명하니까 생명평화운동의 현장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저는 엄밀히 말해서 사건(event)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field)은 더 혼탁하고 복잡하고 희미하고 암담하고 지루한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러나, 영구하고 특정할 수 있는 생명평화운동의 현장은 없는 것이지만, 생명평화운동의 현장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 생명평화의 道를 좇는 ㉡ 착한 사람의(한 사람이면 충분!) ㉢ 좋은 기운이 퍼져나가는 곳'이면 생명평화운동 현장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도, 우리 집도, 평소 일터도 현장일 수 있으며 아닐 수도 있다고 봅니다.
4. 생명평화의 道
- "자립적인 삶, 조화로운 삶, 영성적인 삶, 모심의 삶, 아낌의 삶이 본래 있어야 할 제자리인 '생명의 자리'다." 제가 좋아하는 귀농운동의 큰 어른 이병철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귀농을 통해 돌아가야 할 자리에 대한 말씀이지만, 유력한 힌트가 됩니다.
- 생명평화의 道. 어쩐지 난해한 느낌입니다. 이걸 언어로 풀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각자 견해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일단 위의 글에서 제시된 자립 ․ 조화 ․ 영성 ․ 모심 ․ 아낌이라고만 한정해 봅시다. 道는 쉽지는 않겠지만 영원히 닿지 못할 경지는 아닙니다. 그러니 닿으려고 애쓰는 것이 생명평화운동일 것입니다. 요즘의 문제는 이렇게 근본적인 이야기들은 고루하고 한가롭다며, 채이고 무시당하기 일쑤라는 점입니다.
- 생명평화운동의 현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현장이 어디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 대한민국 오늘의 현장에서, 생명평화의 道를 어떻게 (덜 고루하게 쉽게 실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
- 다 아실 것 같은 이야기는 아예 빼고, 최근에 생각중인 몇 가지만 이 참에 물어보려고 합니다. 논쟁적이라고 느끼신다면, 의도적입니다.
4.1. 헌신(獻身) 말고, 호신(護身) 어떤가요?
- 대개 운동 현장은 헌신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왔습니다. 저는 반대합니다. 생명평화운동은 호신이 먼저입니다. 헌신은 그 다음입니다. 헌신을 강요하는 운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호신은 몸보신(補身)과는 다릅니다. 호신은 호신술 하면 딱 떠오르는 그겁니다. 기본적으로 방어입니다.
- 제 생명은 능히 지키면서 살아야 생명평화운동 아닙니까? 헌신은 분수에 맞게 스스로 결단하는 것 아닙니까? 타인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분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거 잘하면 본전, 혹시 잘못하면 위선, 자칫하면 사기 아닙니까?
4.2. 투쟁(鬪爭) 말고, 부쟁(不爭) 어떤가요?
- 운동 현장에서 싸움닭처럼 투쟁적인 사람은 늘 눈에 띕니다. 그 투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결과와는 도무지 상관이 없더라도 투쟁적인 사람의 목소리와 입지는 늘 보장되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결과와 상관이 없을 거라면, 아예 상대하지 않으며, 불필요한 싸움은 걸지도 않으며, 나아가 깊이 포용하는 부쟁은 왜 안 되는 것입니까? 부쟁은 옵션으로도 안 됩니까?
- 생명평화운동은 부쟁이 먼저입니다. 天之道 不爭而善勝. 하늘의 도는 싸우지 않고도 잘만 이긴다고 합니다. 관습적인 투쟁(보도자료 성명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 관청 앞 카메라 시위, 동원하는 집회, 점거농성, 시시하게 논쟁 없는 심포지엄, 몇 년 마다 선거 후유증 등등)에 습관적으로 지치느니, 차라리 부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4.3 도덕성(道德性) 말고, 도덕(道德)은 어떤가요?
- 세상은 운동 현장의 사람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생명평화운동의 경우라면 몇 배는 더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내 운동을 하겠다는데, 대체 누가 그런 올가미를 내 앞길에 놓는 겁니까? 거기에 왜 걸려 넘어집니까? 나는 스스로 추구하는 道와 德이면 족하다는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 미묘한 이야기입니다만, 조직 내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면? 성추행이나 횡령? 남의 잣대인 도덕성 따위로 정죄하려니, 결국 모두에게 불쾌한 결과만 낳습니다. 어중간합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조직을 엎어버리거나 해산하고 다시 시작하면 안 됩니까? 애써 유지하려는 것이 조직입니까, 아니면 道입니까?
4.4 경영(經營) 말고, 식구(食口)는 어떤가요?
- 저도 해당됩니다만, 사회적 일자리니 사회적 기업이니 요즘 경영마인드가 미덕으로 요청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것 아니더라도 모든 운동에서 CEO 타입의 리더나 혁신의 시스템은 늘 각광을 받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까?
- 같이 밥상에 앉아 밥 먹는 식구들. 생명평화운동의 현장은 그 정도 크기의 관계를 벗어나면,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 아닙니까? 지혜로운 농부는 자기 노동력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면적을 압니다. 그걸 넘어서면 골병듭니다. 식구라고 부를 수 있는 범위는 어차피 한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규모의 경제'라는 말은 얼핏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지만, 생명평화운동이라면 회의하고 배격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4.5. 풍조(風潮) 말고, 풍류(風流)는 어떤가요?
- 좋아하는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80년대의 운동, 90년대의 운동, 2009년의 운동은 다릅니다. 분명히 풍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풍조는 더 빨리 변합니다. 이른바 유행입니다. 따라잡으려면 참 피곤합니다.
- 생명평화운동은 풍조 너머에 있는 그 무엇 아니겠습니까? 너머라는 의미는 어차피 속도가 다르다는 뜻 아닙니까? KTX를 따라잡을 수 있는 우등열차가 있습니까? 또한 너머라는 의미는 위치가 다르다는 뜻 아닙니까? 열차가 아니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먼 산 아닙니까?
- 먼 산이라. 참 한가한 소리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노닐고 있다고 비아냥거릴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되받아 쳐야합니다. 생명평화운동은 노니는 운동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좀 근사하게 말하면, 풍류가 있는 것이지요. 마땅치 않은 분들은 계속 바쁘게 살면 되지요.
5. 저는 한동안 현장을 묻지 않았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나의 현장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어째 좀 바보 같은 사람이나 하는 질문 아냐?"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서야, "그래. 이렇게 현장을 물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참 절박한 것이지!" 뒤늦게 생각이 되더군요.
- 죄송합니다. 사실 저 자신은 20대 후반 30대 초반 오륙년을 "내 현장은 어디야!" 하며 오락가락하다 낭비해버린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지긋지긋해서 되돌려 기억하기도 싫습니다. 그랬던 주제가 언제부터는 현장을 묻지 않았습니다.
- 저는 귀농운동이라는 작은 문파에 입문한 지난 8년 동안 단 한순간도 제 현장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서울에 살고 일하면서도 農이라는 현장에 연결된 존재임을 확신했습니다. 시간문제일 뿐, 치열한 農과 지역의 현장으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착한 귀농식구들과 고마운 농민들에게 배운 덕분이었습니다.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현장에 대한 확신이라! 하느님께도 감사합니다.
- 4개월이 되어 가는군요. 지금 강원도 춘천에서 33평 6천만원 아파트 전세를 삽니다. 소양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명당입니다. 참 좋습니다. 일도 재미있습니다. 구체적인 농민들과 어울리는 일. 저는 현재로서는 재미있습니다. 앞으로도 재미있을 겁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농촌에서는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이 말을 되새기면 느긋해집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재미를 구하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귀농본부 사무처장을 몇 년 하면서 전국구로 놀았습니다만, 사실 그건 허당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현장은 좁히고 낮출수록 명쾌해진다고 확신합니다. 당연히 어려움이야 있지만, 서울에서 당하는 어려움과는 다릅니다. 한마디로 덜 막막하고 덜 공허합니다.
- 작년 이 자리에서 느낀 것인데, 지역 활동가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는 기억입니다. 당연하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 때는 부러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지역 초보 주제에 앞에 서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6. 제안! 모르겠으면 일단 農과 지역으로!
- 그러나 감히 제안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현장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계신 분이 있다면, 農과 지역을 권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 農과 지역은 도시와 중앙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생명과 평화를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農과 지역의 빈약한 자원과 누적된 모순의 현실로 보자면 최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운동 전망은 좋은 것 아닙니까?
7. Fielder's Choice, 야수선택(野手選擇)
- 글 제목을 설명하면서 맺겠습니다. 현장이 'field' 라면 활동가를 'fielder' 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Fielder는 늘 매순간 어떤 Choice를 하며 삽니다.
- <Fielder's Choice>는 고급 야구용어입니다. 원아웃 상황에서 기아 이종범이 3루에 있습니다. 타자가 3루 땅볼을 쳤습니다. 눈앞에서 이종범이 홈으로 뛰니 롯데 3루수 이대호가 잡아서 홈으로 던지는 '선택'을 합니다. 아슬아슬 세이프입니다. 타자는 쉽게 1루로 갔습니다. 그냥 1루로 던졌으면 타자는 아웃이었겠지만 1점은 내줄 수밖에 없었겠지요. 결과는 1점도 내주고 타자도 살았습니다. 선택의 결과는 최악입니다. 과연 <최선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요즘 뜨고 있는 김인식 감독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게 야구에서 말하는 <야수선택> 상황입니다.
- 대개 운동의 현장에서, 내야수(활동가)들은 1점을 주지 않으려고 홈으로 송구하는 무리수를 두기 쉽습니다. 결국 점수도 내주고 아웃 카운트도 못 늘리지만, 한번 던져라도 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 생각합니다. 야수에 따라서는 도박이거나, 습관이거나, 분석의 결과이거나, 믿음이거나. 어쨌든 홈으로 던집니다.
- 그러나 생명평화운동은, 알기 쉽게 1루로 던졌으면 합니다. 1점은 주고, 아웃은 하나 늘리고, 다음 공수교대를 기약하는 소박한 야구(운동).
- 그게 최선일 리는 없습니다. 어차피 최선은 누구도 모르는 일. 이른바 <차선의 야구>입니다. 이런 야구는 화끈하지 않아서 재미도 없고, 근성도 없고, 환호도 없는 야구입니다. 팬들은 시시하다고 비난합니다.
- 그런데 말입니다, 장기 레이스에서는 결국 이런 야구가 승률이 높습니다. 생명평화운동이야말로 평생 가는, 초장기 레이스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