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장일순 선생님

문서 자료실 | 2009/07/08 12:03 | 모심과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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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기리는 모임에서는 장일순 선생님을 추억하는 이야기를 소식지에 싣고 있습니다. 11호 소식지에 실린 김정하 선생님 인터뷰를 옮깁니다. 김정하 선생님은 진광중학교 교장과 원주의료생협 이사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이야기는 무위당 기리는 모임 실행위원들이 담당하였습니다.

일 시 : 2005년 2월 23일(수요일) 오후 3시
장 소 :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모임 사무실
참석자 : 김상범, 고제순, 황도근, 나무선, 김용우, 김동준, 김재용, 김익록
정 리 : 김동준, 김익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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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순 :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자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랜 시간 동안 무위당 선생님과 인연을 맺어오셨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자세한 얘기를 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불편하니 옷 벗어 놓자는 말 때문에 참석자 모두 웃음)
무위당 장 일순 선생님께서는 좋은 말씀도 많이 해 주셨지만 특히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그 점에 관련해서 말씀 해 주실 것 이 많지요?
먼저......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을 때가 언제인지?

김정하 : 사실 저보다도 선생님과 더 가깝게 지낸 분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을텐데......
제가 좀 외람된 것 같아요. (웃음)
몇 번 사양을 했는데 막상 시간 내서 오니까 모두 바쁜 분들이 와 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제가 특별히 무위당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선생님의 둘째 동생(고 장 상순 선생)과 제가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에요. 그래서 인연이 시작됐고요. 장 선생님을 어려서부터 보면서 자랐죠. 철이 들면서...... 지금도 철이 없지만(웃음), 선생님께서 청년 시절부터 좋은 일을 참 많이 하시는 걸 봤죠. 지역의 주민들이 장 일순 선생님을 가리켜서 ‘모범청년이다. 정말 나이는 어리지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죠.
그러나 어렸을 적에 직접적인 만남은 별로 없었어요. 그냥 친구 형님이려니, 그런거죠.
실질적으로 선생님을 뵙고 같이 일하게 된 건 성당에서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장일순 선생님이 성당 내에서 어떻게 활동하셨는지는 조금은 알고 있죠.
원동 성당 레지오 마리애 초기에 단원 활동을 하시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지요.
또 제가 모시면서 함께 일과 생활도 같이 했으니까요. 또 교회 세례명도 사도 요한 저하고 똑 같아요. 그래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된 동기는 성당입니다. 원동 천주교회죠.

고제순 : 성당에서 뵙고 그 후에 사회개발위원회가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활동할 때, 그때도 일로 같이 만나셨나요? 교회에서 활동하신 것과 사회개발위원회에서 활동하신 일들 연관해서 말씀해 주세요.

김정하 : 천주교 원주교구가 처음 창설되고...... 그게 65년도예요. 1965년 3월22일이 천주교 원주교구의 창설일이에요. 올해가 교구창설 40주년이 되는군요. 교구가 생기고 초대교구장으로 지학순(다니엘) 주교님이 오셨고, 지학순 주교님과 장일순 선생님하고 같이 만나게 된거죠.
그때 원주교구 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14개 교구 중에서 가장 취약한 교구거든요.
환경이 열악하고 농촌, 소도시, 탄광지대, 어촌 지역이고, 신자수도 가장 작고 아주 빈약한 교구죠.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런 빈약한 교구, 열악한 교구를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또 어려운 사람들, 탄광, 농촌, 어촌 분들. 특히 당시 농촌엔 고리사채가 심할 때니까, 생활하기가 참 힘들잖아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어려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느냐? 여기에 두 분께서 많은 신경을 쓰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우리 원주 교구는 - 그러니까 천주교가 언제나 외국의 원조에 의해 지탱돼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젠 그러지 말고 가난하고 열악한 교구지만 - 우리 교구부터 자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외국의 원조를 받지 말고 자립하는 교구, 교회로 만들어보자 했죠. 그래서 구호라고 하면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자립하는 교회, 독립하는 교회’를 만들자! 그렇게 하려면 우리 평신도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의식개발을 해야 한다고 봤죠. 교구 창설 당시 한국인 신부가 몇 분밖에 없었어요. 외국인이 열한분 정도 됐고요. 그러니까 신자수도 적지만 신부 수도 적었죠.
지 주교님도 한국 신부님들이 있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장 선생님과 모든 일을 의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구가 발전하고 좋아지려면 평신도 지도자를 많이 양성해야겠다. 거기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아요. 한국 신부님들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이 교회는 평신도들이 주인이 돼 평신도들이 교회를 발전시켜야겠다. 평신도 의식 개발, 자립하는 교회로! 받는 교회에서 자립하는 교회로 초점을 뒀죠. 그 때가 언제냐면 마침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해에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무렵인데, 그 정신을 받아서...... 공의회 문서가 4개의 헌장하고 9개의 교령하고 3개의 선언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교회가 가장 먼저 이 공의회 문헌을 입수했어요. 그러니까...... 1965년부터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장 일순 선생님이 공의회 문헌을 가져와서 매일 저녁에 강의를 해 주셨어요. 우리가 강의를 듣고 각 교회마다 팀을 짜서 평신도 의식을 개발하기 위해 교육(피정)을 하러 다녔죠. 그래서 원주교구가 생긴 진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른 타 교구보다 굉장히 앞선 교구가 됐어요.
장 선생님께서 평신도 지도자 양성에 큰 몫을 하신 거죠. 그게 바로 원주교구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또 초대 사도회장님이기도 했어요. 제가 당시 총무를 맡아 일했어요. 주로 평신도 지도자 강의 교재로 공의회 문헌을 사용했는데, 공의회 문헌 중에도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이 있어요. 이 교령을 중심으로 하여 공의회 문헌 외에도 ‘어머니와 교사’, ‘노동회칙’ 등을 교재로 저희에게 강의를 해주셨어요.

나무선 : 공의회 문헌이라는 게 성경에 대한 가톨릭의 사회교리를 집대성한 교리서인데 개인 교리가 아니라 사회 교리라고 볼 수 있죠.

김정하 : 공의회 문헌은 현대 교회가 나아갈 지침서에요. 성경이 예수의 근본정신이라고 한다면 공의회 문헌은 현대 교회가 어떻게 가야 한 다라는 현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지침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동준 : 공의회를 통해서 만들어진 교회의 새로운 지향점은 그 핵심이 무엇이라고 볼 수 있나요?

김정하 : 공의회는 급변하는 현대 세계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자성하고, 쇄신, 변화 해 보자는 것이지요. 또한 타종파와의 관계 모색이라든가. 사제나 평신도가 한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보는 등 급변하는 사회에 대한 대 사회적인 선언이라고 보는 거죠.

나무선 : 정말 놀랍네요.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종교)의 모습은 당시에 지향했던 쇄신 의지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조금 드네요.

김정하 : 물론 각 교구마다 그 문헌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다른데 우리는 장 선생님께서 신자들의 의식을 많이 깨우쳐 주셨죠. 초대 회장님이셨고, 지 학순 주교님과도 마음이 잘 맞았던 거죠. 신자들 사이에서 지 주교님은 ‘평신도만을 위한 주교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웃음) 신부님들 사이에서는 ‘우릴 소외시키는 거 아닌 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니까요. 장 선생님과 지 주교님이 원주 교구의 초석을 닦으셨어요.

나무선 : 장 선생님이 일할 때 지 주교님이 뒤에서 서포트라고 할까? 많이 지원을 해 주신거죠?

김정하 : 그럼요. 교회는 주교님의 허락 없이 하는 건 힘들거든요. 제가 볼 땐 항상 장 선생님과 주교님이 의견을 나누시고 한 것 같아요.

나무선 : 타 종교나 종파와의 관계에 대해선 어떻게 가르치셨나요? 타 종교와의 조화와 화합을 많이 강조하셨다고 들었는데......

김정하 : 그 당시 원주에서는 개신교와 함께 예배를 드린 일도 있어요. 장 일순 선생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어요. 대개 교회가 빨간 집에 빨간 담을 많이 쌓아놨잖아요. 구원 받으려면 교회로 들어와라, 그런 건데 너무 오랫동안 그러니까 답답하다, 그래서 담도 허물고 문도 활짝 열어서 외부의 공기와 순환하자, 그런 거죠. 썪은 건 도려 내고, 새롭게 하자.

나무선 : 당시에 그러한 일들을 해 나가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김정하 : 장 선생님이 사도회장님을 맡으면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자립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이를 위해 평신도 지도자를 육성해야겠다고 판단하셨죠.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새로운 교회의 지침서인 공의회 문헌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공의회 문헌을 중심으로 강의를 많이 해 주신거구요.

그리고 두 번째로 꾸르실료 운동이라는 게 있어요. 평신도 교육입니다. 또 아주 훌륭한 교육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피정의 한 형태로 보면 됩니다. 꾸르실료가 한국에 67년에 들어왔어요. 이것을 한국에 처음 전파시킨 사람들이 필리핀 사람들이라는군요. 이 친구들이 1차로 미8군들의 고급장교들을 위해서 한 거예요. 한국에서 2차를 하는데 미8군 군인들과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함께 한거죠. 그 당시 영어로만 강의를 했어요. 영어로 리포트 내고 말이죠. 3박 4일의 교육기간인데요. 천주교회에서는 평신도 교육 중 단시간에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교육이 바로 꾸르실료 교육이에요. 이 때 장 일순 선생님이 2차 꾸르실료 교육에 원주교구에서는 유일하게 교육을 받으신거죠. 아마 지 주교님이 소개를 하신 것으로 압니다. 3차 때부터는 순전히 한국 사람들을 위한 꾸르실료가 시작됐어요. 장선생님이 67년 11월 4차 꾸르실료를 할 때 원주교구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어요. 장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방 교구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은 거죠. 우리가 네 명(장화순, 신동익, 조태원, 김정하) 이 갔으니까요.
그 이후로 많은 분들이 서울교구에 가서 꾸르실료를 받았는데요, 다음 단계로 얘기가 나온 게 어떻게 매번 서울에 가서 이 교육을 받냐, 우리교구도 자체적으로 한 번 해봐야겠다, 해서 장 선생님께서 원주교구에 꾸르실료를 도입하기 위한 일을 시작하셨죠.
그래서 원주교구 제 1차를 70년에 했는데요. 강사들은 서울팀을 모셔와서 했죠. 그때 강사가 원주에서는 장 일순 선생님하고 김 용연 선생님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분들이 강의를 했죠. 꾸르실료를 하려면 지도자 학교(강사 양성)를 다녀야 하는데요, 장 선생님과 김 용연선생님 두 분이 서울을 3개월 동안 다녔어요. 점심과 저녁은 야간열차에서 우유와 빵으로 해결 하셨대요. 참으로 고생들이 많으셨지요.
원주교구 꾸르실료를 하기 위해서 처음 1회는 진광 학교에서, 그 후 가톨릭 교육원 - 지금의 한살림 있는 자리에서 했고, 그 뒤에는 봉산동 사회복지관을 거쳐 현재는 베론 성지에서 꾸르실료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매년 여름 방학, 겨울 방학 때마다 했거든요. 목요일날 시작해서 일요일날 끝나는 3박 4일 동안의 평신도 교육을 했습니다. 지금도 계속 되고 있어요. 많은 인원을 배출했죠. 꾸르실료를 받은 사람은 꾸르실리스타라고 하는데, 엄청나죠.
교구 내에 본당과 공소에서 참여 할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한 거죠. 여기를 수료하고 간 사람들은 개인의 신앙생활의 열심은 물론이려니와 교회에 도움 주는 일을 많이 하고, 대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일도 많이 했죠. 그래서 원주 꾸르실료 교육이 교회발전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생각을 합니다. 초대 원주교구 꾸르실료 주간(대표)을 하셨지요.
우리 교구뿐 아니라 이웃 춘천교구에도 꾸루실료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3단계로 농촌, 탄광 지역 등 먹고 살기 힘들었잖아요. 이래선 안 되겠다 없는 사람 살리는 길이 뭐가 있을까 고민한 거죠. 그래서 원동 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용협동조합을 만든 거예요. 초대 이사장이 장 일순 선생님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돼 나오긴 했지만 밝음 신협의 모체가 된 거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 다음에 또 생각나는 건 가톨릭센터 건립을 원주가 전국에서 최초로 한 건데요. 다른 교구에서도 여기를 본 따서 가톨릭센터라는 이름을 붙인 거죠. 그때 가톨릭센터 건립 할 때 보면 교회가 언제든지 자기 가족만 챙기거든요. 개신교는 개신교끼리 자기 가족만 챙기고, 천주교는 천주교끼리 자기 가족만 챙기고 그랬죠. 하지만 가톨릭센터는 천주교 신자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어요. 모두에게 누구에게라도 개방하는 공간이었지요. 특히 이 때는 원주시내만 해도 문화 공간이 거의 없을 때였어요. 음악회, 미술 전시회를 한 번 하려고 해도 공간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 교인만 쓰는 게 아니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한 것이죠. 이것 역시 장 일순 선생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 당시 원주시내에서 가장 나은 건물이었죠. 가톨릭센터가 원주시민이 폭 넓게 이용할 수 있었고, 문화공간으로 잘 이용되었죠. 또 센터에서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조그만 어린아이들 까지 가톨릭 센터라면 다 알 정도 이니까요. 장 선생님은 신앙도 신앙이지만 교육자의 역할이 크죠. 평생 사회 교육자였잖아요.

나무선 : 장 선생님은 가톨릭과 개인적으로 어떻게 인연이 되신 건가요?

김정하 : 할아버지 때부터 가톨릭을 믿었다고 들었습니다. 장 선생님은 원주 초등학교를 졸업 하던 해 (1940년) 원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으셨다고 해요. 6.25사변 때 이야기 입니다. 장 선생님이 피난길에 국군에게 검문을 받게 되었어요. 당시 장 선생님은 머리를 박박 깍아서 인민군으로 오해를 받으신 거지요. 당시는 이가 많아서 머리를 박박 깍으셨다고 합니다(웃음) 여러 사람이 붙들려 총살을 받게 되어 한사람씩 사형을 받게 되는데 사형 집행관이 “할 말이 있는가?” 라는 최후 질문을 하는데 장 선생님께서는 아무 말도 안하시고 묵주를 손에 들고 성호를 그었다고 합니다. 집행관이 상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 하니까 상관이 이 보고를 받고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공산당 일 수는 없다. 해서 총살을 면했다고 합니다. 이런 면을 보아도 평소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신 분이시지요.
죽음은 면했지만 붙들린 상태로 고생고생 하면서 횡성을 거쳐 홍천까지 갔는데 마침 그곳 부대에서 은인을 만난거죠. 그 은인은 6.25사변 전에 장 선생님 댁에 하숙하셨던 육군 소위가 중령이 되었더랍니다. 또한 장선생님의 할아버지께서 당신이 기거하시던 방을 그 군인 소위가 쓰도록 배려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은 장 선생님과 자주 어울렸다고 하니 너무나 잘 아는 사이었을 거라고 짐작이 가네요. 그 분 덕분으로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집에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무선 : 대부분 신자들은 자기 종파 안에서 노력하고 나름대로 아집이랄까 벽을 갖고 있는데, 장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타 종교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도가 크셨던 것 같아요.

김정하 : 스님, 목사님을 다 만났죠.

나무선 : 지금의 기독교도 그렇지만 상당히 배타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장 선생님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배타적인 면은 없었던 것 같아요?

김정하 : 네, 저는 그런 배타적인 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김용우 : 그런 걸 교회의 병폐라고 지적하셨던 거 아닌가요? 그때부터 늘 그런 말씀을 했던 것 같은데요.

나무선 : 그걸 후천적으로 학습하신 것도 아니고 원래 처음부터 그렇게 의식이 된 건가요?

김동준 : 그것보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보면 폐쇄적으로 지내면 안 된다, 이런 말씀을 잘 실천하신 거죠. 내가 볼땐 그래요.

나무선 :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교회에서 잘 안 가르치지지요? (웃음)

김용우 : 장 선생님 활동하실 때 백그라운드가 되어 주신 분은 지 주교님이신데요. 가까이 모실 때 지 학순 주교님하고 장 선생님과 만날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김정하 : 두 분이 만난 건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까, 속된 표현으로는 배짱이 잘 맞는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두 분께서 어떤 논의를 하셨는지는 잘 모르고요.

고제순 : 장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선생님께 받은 영향이라고 할까, 좌우명이나, 뭐 그런게 있으신가요?

김정하 : 특별히 그런 건 없고요. 저에게 글을 하나 주셨어요. 시천무아(侍天無我)라고. 하느님을 모시려면 네 것은 모두 버려라. 이런 의미에요. 설명도 안 하고 주시면서 ‘잘 생각해봐’ 하시더라고.(웃음) 니가 무슨 일을 하려거든 니 마음을 비워라, 하면서 주시더라고요.
그 양반이 항상 보면 사람을 많이 만나잖아요. 보면 예쁘고 잘 사는 사람이 아닌, 없는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죠. 그리고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해’ 그러시면서 옛날 자기집 얘길 하시더라고요. 우리 집에 밥 얻어 먹으러 오는 사람 중에 그냥 오는 사람은 밥상을 차려주고 그릇을 가져오면 따뜻한 밥을 담아주고 그랬다고 하시더라고요. 사람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거죠. 언젠가 한 번은 약주가 높았는데요. 저에게 ‘기어야 해, 기어야 해 (웃음) 밑으로 기어라’ 그런 말씀을 하더라고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길 사람을 가리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책임 맡은 건 성실히 하고, 사람이 지위가 높을수록 어머님 같은 역할을 해야 해.
이런 말씀이 생각이 나요.

고제순 : 그것 말고 다른 건 없으세요?

김정하 : 제가 학교에 근무하고 있을 때 한 번 다녀가셨는데요. 천지여기(天地如己)라는 글을 주셨어요. “하늘과 땅은 네 몸과 같다”라는 뜻이지요.
‘하늘과 땅이 네 몸이야’ 그걸 보면 사람 뿐 아니라 자연도 귀하다 하는 것 같아요. 하늘과 땅, 하면 우주 만물이잖아요. 그러니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나는 새, 다 네 몸처럼 아껴라.
고제순 : 요약하면 생명사상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김정하 ; 깊게 보면 일맥상통하죠.

나무선 : 선생님과 사회개발위원회를 하면서 인연이 이어졌는지?

김정하 : 사회개발위원회에 대해서는 김상범 선생이 더 잘 알고 있어요. 저는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요. 제가 1년 동안 파견근무를 했어요. 그 때 가깝게 모셨죠. 72년도에 남한강 유역에 큰 홍수가 있었어요. 그때 지 주교님이 외국에서 많은 액수의 원조를 받아오셨는데요. 옛날 같으면 그냥 이재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잖아요. 그걸 재해대책사업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서 농촌, 어촌, 탄광촌 사람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어요.
당시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책임자는 김 영주 선생님(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모임에 회장)이 셨지요. 그런데 장 선생님과 지 주교님은 고기를 잡아 주는 식 보다는 고기 낚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식의 교육을 하셨죠. 당시 구호품을 이재민들에게 그냥 나누어 줬으면 돈 쓰고 말았을 텐데, 수해지역 부락마다 한우 작목반, 약초 작목반 등 그룹을 만들었고요. 그 그룹에 자금을 대 주었고, 그 그룹이 협동해 생산해서 부락이 잘 살도록 해 주었죠. 그냥 만들어만 놓은 것도 아니고 작목반에 상담원도 배치해서 상담원이 교육을 시키는 거죠.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회의 방식을 일러준다던가 해서 토론도 하고, 합의점도 찾고, 실천도 하고 그랬죠. 그래서 그 동네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준거죠.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환수하고 다시 재투자하고 그랬습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사회개발위원회로 되었고 그 후 사회 복지회로 변경되어 현재 원주교구에서 많은 복지사업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김동준 : 농촌에는 자금관리나 회계, 이런 것이 상당히 낙후돼 있어서 공동기금을 마련해서 협동조합을 만든 거죠. 그래서 최초로 신용협동조합이 생긴 거고 자금관리를 한 거죠. 이렇게 교육을 시킨 거죠.

김 상범 : 각 부락마다 담당 상담원이 있어서 직접 농촌 부락에 가서 상담도 하고 그랬죠. 협동하면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거죠.

나무선 : 옛날이나 지금이나 협동조합하면 이상적이긴 하지만 어려움이 많잖아요. 실제 개개인의 가구 단위로 보면 가족 이기주의랄까, 같이 일을 했을 때 한 가족의 절대적 생활이익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거 말입니다. 이론은 좋은 데 실제 활동 내용에 있어서 자립할 수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김 상범 : 한 두 마디로 얘기하기 어려운데요. 기금관리 입장에서는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한 거고, 한편으로는 농촌이라는 게 상당히 지역단위로 폐쇄적이거든요. 그런 의식을 바꿔나간 것들......그리고 수동적으로 지시만 받아서 일을 했던 게 농촌 농민인데요. 그렇게 해선 안 된다, 민주적으로 작은 작목반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의견을 말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러한 작업이 농민들과 지역 운동에 미친 영향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게 유신체제 하에서 활동을 한 거기 때문에 그분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어야 했죠. 웬만한 마음가짐이나 각오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죠.

고제순 : 앞에서 말씀하셨던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평신도 교육이 훗날 사회 운동, 농촌 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서도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았나 생각되는데요? 그것이 협동운동이나 생명운동을 하는 데 뿌리,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김정하 : 상관이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죠. 주교님 말씀이라면 모두 따르던 시기였는데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을 택일 하므로 강의만 하는 것도 아니고 미사도 보고 성가도 부르고 오락도 해서 일종의 피정 같아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연수, 교육이죠. 그 때는 각 성당마다 신자 피정(교육)을 자주 하였습니다.

나무선 : 장 선생님은 사람을 모으시고 변화시키고 하는 일들을 해 내시는데 참 탁월하셨던 것 같아요.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어요.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아주 크셨지요.

김정하 : 그렇죠. 얘길 나누다 보면 장 선생님 말씀에 푹 빠지잖아요. 저녁이 되면 또 들어야지, 모이면서 그랬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요.

나무선 : 일반적으로 그런 모임을 하면 괜히 갔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장 선생님은 꽤 생산적인 자리를 만들어 주셨고 또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소통하는 역할을 잘 하셨네요.

김정하 : 말씀이 딱, 정감 붙게 하잖아요. 연속극에서 뒤에 어떻게 되나 궁금하듯이 말씀에도 뭔가 여운을 둔다니까요. 그러면 다음에도 또 듣고 싶은 거죠. 한 번 얘길 꺼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요.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얘길 해 주셨죠.

고제순 : 지금 금년이 돌아가신 지 11주기가 되는데 선생님이 가까이 모시던 분들은 아직도 자기 생활 속에서 정신 속에서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떠나시고 안 계시니까, 지금에 와서 선생님의 생각이랄까, 그리움... 이런 말씀을 해주세요.

김정하 : 저는 아버지가 6.25때 돌아가셨어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는데요. 장 일순 선생님은 부모님 같았죠. 저의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의논드리고 했지요. 그분 돌아가심은 부모님을 잃은 슬픔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좀 더 지역사회에 오래 계셔서 더 많은 말씀을 남겨주셨으면 좋지 않았겠나 싶어요. 이렇게 좋은 분이 좀 더 우리 곁에 오래 있었으면 하는 게 아쉬움이고 바람이죠. 성자 같은 분인데...

나무선 : 만약 장 일순 선생님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요?

김정하 :우리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와 후원자가 되시면서 "자네, 너 이리와 이것 좀 해“그러면 바로 아무소리 못하고 ”네“하고 가서 일 해야죠. 그 양반이 시키는 일에 하자가 없었으니까요. 지금 돌이켜봐도 그리운 시절이지요. 선생님 모습이 눈에 선 하네요......

고제순 : 우리 모두 마음속에 선생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긴 시간 많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9/07/08 12:03 2009/07/0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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