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명운동의 선구자, 무위당 장일순.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을 빼놓고 1994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원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선생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엄혹한 시절 생각 없이 쓴 한두 줄의 메모라도 주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취할 수밖에 없는 지당한 행동이었다. 글을 쓰지 않았던 선생의 모습에는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들의 소리에 깊이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경의 정신과 근원적인 겸손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의미부여를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아무 저작이 없는 선생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생이 말년에 여기저기서 말씀한 강연과 대담을 묶은 책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와 이현주 목사와 이야기 나누며 노자 81장을 풀어놓은 <노자이야기>가 남아 있어 선생이 가졌던 생각의 일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10주기를 기념하여 나온 주위 사람들이 겪은 선생에 대한 일화집 <좁쌀 한 알>과 선생을 알고 지내던 후학들이 선생을 기리며 쓴 글 모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그리고 서예가로 글씨와 난초 그림을 담은 도록(圖錄) 몇 권과 최근 발행된 잠언집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을 통해 어느 정도 장일순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각 맞추기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선생의 강연이나 대담, 일화들은 학자처럼 일관된 체계를 잡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생활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담아낸 것이기에 어쩌면 사상이라 할 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얘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더더군다나 말년에 한살림으로 집약되는 생명사상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저 선생이 사회활동을 시작한 대학시절부터의 인생 역정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는 한계는 감수해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생을 이 땅에 생명사상을 처음 제창한 생명운동의 정신적 지주,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비롯된 한국의 비폭력 평화사상을 이어 세상에 널리 알린 사상가로 평가한다. 그것은 장일순의 생명사상이, 그의 비폭력 평화사상이 체계화된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드러나는 삶의 지혜를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할 것이다. 선생에게는 처음부터 이론 따로, 실천 따로라는 구분이 없었다. 밥 먹고 자고 일하며 살아가는 일상,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 속에 선생의 생각, 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지인들과 함께 원주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교육자로 역할을 하던 모습에서도, 몽양 여운형을 사숙하고 4.19 이후 사회대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낙선하고 5.16 직후 옥고를 치러야 했던 정치가로서의 모습에서도, 또 지학순 주교와 함께 가톨릭평신도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협동조합운동, 지역사회개발운동, 지역자치운동,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뒷바라지하던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에서도, 또 유홍준 교수가 지조 높은 이 땅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규정하는 서예가로서의 모습에서도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나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으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또한 아이들 아버지의 모습 속에도 선생은 한결같았다. “매일 아침 일찍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 부모님의 요강을 손수 비우시던 모습, 그렇게 부모님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던 모습과 주위 사람들을 늘 따뜻하게 대하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이분을 평생 모시면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이경국 전 신협전국연합회 사무총장)”
이런 선생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규정한 것이 그의 제자였던 시인 김지하이다. 그는 선생을 일러 덕성과 인격수양이라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정신을 정치인의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천한 ‘도덕정치가’라고 말한다. 요즘 현실만 봐도 도덕과는 거리가 멀어만 보이는 정치에 도덕의 이상을 끊임없이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행위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봉산동 다리 건너에 있는 본댁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원주시청 앞 찻집까지 선생이 가시는 데 보통 한 시간에서 두 시간 반이 걸렸다고 한다. 가시면서 이런 좌판, 저런 리어카, 바구니 장사 아주머니, 하다못해 지나가는 나그네에, 동네 순경까지 만나서 소소한 이야기들, 즉 아버지 잘 계시냐, 조카 결혼생활은 잘 하느냐, 요즘 사는 게 어떠냐, 뭐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셨다는 것이다.
민초들의 삶과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쁨과 슬픔, 아픔을 함께 나누는 자애로움, 건네는 따뜻한 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의 자세는 선생의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공경의 태도였으며, 거기에 그의 사상의 일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은 어느 시기에 전환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무위당이라는 한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본연의 모습이었다”라고 리영희 교수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경과 모심을 기본으로 삼는 생명사상이 그것을 제창하기 이전에 오래전부터 이미 선생의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모습에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전체 글 보기를 클릭하시면,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오랜 군사독재 치하의 숨 막히던 시절, 원주가 반체제 지식인, 활동가들이 숨을 돌리는 안식처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원주 봉산동 선생의 자택에는 군 장성에서부터 장바닥 아주머니들까지 선생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찾는 사람은 누구라도 허투루 대하지 않고 지극함으로 따뜻하게 맞아 사람마다 그 서있는 자리에 맞게 가야 할 길을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할지를 소중하게 여기라 하며, 공무원에게는 민(民)을, 장사꾼에게는 손님들을 하늘처럼 섬기며 정성을 다하라 말하였다는 것이다.
선생이 그린 난초가 민초의 얼굴을 닮았고 그 얼굴에서 부처의 미소가 발견되는 것도 우연이 아닐 터이고, 작고, 여리고, 하찮은 미물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허투루 대하지 않고 공감과 연민, 자애로 감싸던 선생의 태도가 생명사상으로 이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사람이나 사물, 일체의 것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고, 한울님 모신 거룩한 존재들이기에 공경해야 한다는 생명사상의 기초 위에 바로 이런 태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생명사상의 첫 지점은 공경, 모심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생명사상의 첫 사회적 실천의 담보물이라 할 수 있는 한살림모임의 창립총회에서 ‘시(侍)에 관하여’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는 것도 자못 의미심장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해월 선생님의 말씀을 보니까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라.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제비알이나 새알을 깨뜨리지 말아야 하고 풀잎이나 곡식에 이삭이 났을 때 꺾지 말아야 되거든요. “새알이나 제비알을 깨뜨리지 않으면 봉황이 날아 깃들 것이고, 풀의 싹이나 나무의 싹을 자르지 않으면 숲을 이룰 것이고, 그렇게 처세를 하면 그 덕이 만물에 이른다. 미물까지도 생명이 함께 하신다고 모시게 되면 그렇게 된다.”고 말씀하셨더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새알을 깨고, 팀을 나눠 경쟁해서 남이 안 보니까 남의 밭에 나는 콩싹을 잘라버리는 것들이 제국주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제국주의란 것이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모신다는 기본적인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작은 것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중략)......
그러니까 옛날에 착한 분들이 써놓은 책들을 보면, 특히 우리나라의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이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말씀을 보면 그 많은 말씀이 전부 시(侍)에 관한 말씀이라. 그러니까 이 구석을 들여다봐도 시(侍)고 저 구석을 들여다 봐도 시(侍)고 시(侍) 아닌 것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구석에 가서도 그거 하나만 보고 앉아있으면 편안한 거라.(<시에 관하여> 중에서)
협동과 자치운동 - 사람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선생은 이웃에서 천도교 포교소를 하던 오창세(6.25직후 사망)의 영향으로 이미 1946년에 동학을 접했다고 한다. 선생의 삶과 사상에서 동학, 특히 해월 최시형의 영향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앞의 강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선생은 생명사상의 원류를 거의 전적으로 해월의 생각과 실천적 삶에서 찾고 있다.
생명사상은 천지만물이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라는 해월의 말이 출발점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람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이 땅의 풀뿌리 민중을 하늘처럼 공경하라는 동학의 정신도 여기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신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 선생이 사회운동가로서 펼쳤던 원주교구 중심의 신용협동조합운동이나 소비조합운동의 근간에도 자리하고 있었다. 협동조합이 사회운동가들이 주도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구적인 역량을 길러 풀뿌리 백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고 자치하려는 사회실천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생각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이 참여한 농민운동과 노동운동도 그 조직방식은 철저하게 협동운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1970년대 원주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밑바닥에는 그 조직적 기반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독재정치에 반대하면서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는 사회운동 내에서 일부 지식인들, 사회운동가들의 독점적 권위주의가 용인되는 운동방식과는 달리 민중들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믿음, 즉 이미 온전한 한울님의 모습을 내재하고 있는 민중에 대한 신뢰에 바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울 영등포의 산업선교회와 가톨릭의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정치운동과 더불어 원주를 중심으로 했던 신용협동조합운동의 경제민주화운동도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 봉우리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독재 권력과 결탁한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에 신음하며 고리채와 가난에 허덕이던 풀뿌리 민중들의 자구적인 협동적 경제 실천운동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역사적인 평가가 따라야 할 것이다.
1972년 남한강 유역 대홍수로 삶터를 잃은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일원의 재해대책사업과 지역사회개발운동에도 협동운동의 정신적 바탕은 그대로 담겨진다. 시혜적 방식이 아니라 마을이 스스로 자립하고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조직하는 데 초점을 맞춘 지역사회개발운동 방식은 후에 생명운동의 사회적 실천으로 조직된 한살림의 조직운영에서도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를 바탕으로 한 협동운동의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시민들의 계약을 중심으로 한 서구식 민주주의와 달리 무궁한 우주를 모신 존재로서의 풀뿌리 민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차원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무궁한 우주를 모신 민중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더 나아가서는 공경하는 공동체적 질서를 의미한다 할 것이다. 한울님, 즉 거룩한 생명과 우주를 모신 존재로서의 민중, 여기로부터 민주주의도, 교육도, 사회운동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오늘 원주의 협동조합운동과 지역자치운동의 성과가 196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것이고, 그 바탕에는 선생의 이런 사상적 뒷받침이 있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친 얘기가 아닐 것이다. 평생 원주를 떠난 적이 없었던 선생은 세계화의 변두리나 국가적 통치의 대상으로서 지역이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지역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전망했고, 1992년 제1차 지방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 등에 참여하면서 자치의 이상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선생의 후배들과 제자들이 그 꿈을 오늘 원주에서 실현해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생이 서른도 안 된 약관의 나이에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지인들과 함께 원주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2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 활동하던 시절의 제자들이 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은 삶의 궤적을 살아왔다는 이야기도 놀라운 것이고, 그 제자들이 말하는 선생의 교육철학의 밑바탕에는 “아이들 속에서도 스승을 발견”하는 태도가 있었다. 선생과 학생이 둘이 아니고 오히려 때에 따라서는 학생이 선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이들도 생명과 우주를 모신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비단 어린아이들만이 아니다. 선생에게는 천지만물 모든 존재가, 작은 미물 하나조차 생명과 우주를 모신 거룩한 존재였다.
나는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라는 적이 있습니다. 만상(萬象)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들을 때 평상시의 생활을 즉각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부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면 내 일상의 생활은 생활이 아니고 경쟁과 투쟁을 도구로 하는 삶의 허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삶이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나의 작은 벌레가 엄숙하게 가르쳐줄 때에 그 벌레는 나의 거룩한 스승이요, 참생명을 지닌 자의 모습은 저래야 하는구나라는 것을 가슴깊이 새기게 됩니다.(<삶의 도량에서> 중에서)
한살림에 힘쓰던 말년 몇 해 선생을 가까이할 수 있었던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놀라워했던 것도 선생이 이데올로기나 이념의 잣대로 사람이나 사물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천하의 미물에서도 스승을 발견하는 선생의 모습이었다. 즉, 천지만물과 일용행사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본인이 어떤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있으냐에 따라서 세상에 스승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 필자가 선생에게서 배웠던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밥 한 그릇에 우주의 공생과 협동이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야일체(萬物與我一體)니라.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니라.” 선생이 생명사상을 본격적으로 내걸면서 후학들에게 가장 많이 들려주었던 것이 법안선종(法眼禪宗)에서 인용한 위의 선시(禪詩)였다.
서구의 생태주의가 먹이사슬의 순환이 단절될 때 일어날 파국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면, 선생의 생명사상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살아있는 존재들 하나하나가 생명을 모신 거룩한 존재요, 그 존재들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명의 질서를 영성적 차원, 종교적 차원으로 들어 올리는 일이었다. 시인 김지하가 생명사상을 일컬어 ‘거룩한 유물론’이라 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주로 원주에서 협동과 자치운동을 밑바탕으로 지역운동을 전개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해 반독재민주화운동을 펼치던 선생은 1977년 무렵 운동의 방향이 전환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후배 박재일, 이병철 등과는 농촌의 생명공동체와 도농 직거래, 김지하 등과는 생명사상에 교감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방향의 운동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사상적으로는 생명사상으로, 현실운동으로는 한살림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것은 그때까지 노선을 같이 했던 수많은 동료나 후배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맑스 패러다임과 선을 긋는 일이었다. 인간을 착취하거나 억압하는 것을 종식시키려는 맑시즘의 문제의식을 인정하면서도 그 궁극적인 지향이 이해관계의 증진이 되었을 때 가져올 파국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당연히 종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를 막론하고 이 산업사회가 자연을 약탈하고 파괴시키며 생산해낸 그 결과를 공평하게 나눠먹자고 투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니, 오늘날의 핵문제, 공해문제, 자원보존문제 등등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 이 세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방대한 물량을 생산해서 낭비를 한다는 것은 살생행위라는 걸 체득해야 하는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살생이라는 것도 오늘날에 와서 더욱 진지하게 얘기될 수 있구요. 동학에서는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라고 해서 같은 격으로 물질도 높여놓았습니다. 물질은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아끼고 공경할 대상이며 생명의 분신이라는 생각의 차원으로 가지 않고서는 지금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거죠.”
선생은 문제의 근원을 이해관계, 이로움(利)과 편리함의 추구, 그로 말미암은 경쟁과 효율만을 좇는 산업문명이라 지적하며, 김지하, 박재일, 최혜성, 김민기 등 후배들과 함께 한살림선언을 발표한다.
“산업문명이 온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면서 급속히 생명을 파괴해 가고 있는 오늘의 죽임의 상황에 대하여 지금 전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요청은 바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이에 입각한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입니다.(<한살림선언> 서문에서)”
경쟁과 효율을 따지게 되었을 때에는 일체가 어떻게 되느냐. 적수가 돼. 그렇게 되지 않아요? 일체가 적수가 된다 이 말이야. ..... 그러니까 오늘날 산업문명이 고달픈 것이 경쟁과 효율을 가지고 따져 올라가기 때문에 한이 없어요. 그리고 인간도 일체가 이용의 대상인 동시에 자연까지도 이용의 대상이니까. 자연까지도 이용의 대상으로서 무자비하게 해오다 보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었어요? 사람이 살 수가 없게 되었지.
중요한 것은 모든 것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 하나라는 것, 모든 생명체와 유기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여직까지 경쟁의 시대에서, 또 인간의 편리함만 생각하고 있던 그러한 시대에서 온 그러한 습관 때문에 모든 것을 가리게 되고 모든 것을 일일이 ‘따지게 되고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만 생각하게 되고 독선적으로 생각하게도 되고. 인간의 횡포와 독선이 얼마나 이 자연을 망가뜨렸기에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왜 한살림인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중에서)
이 횡포와 독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전일적(全一的)인 생명의 세계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했고, 그 각성에 맞는 생활양식, 사회를 찾아야 했다. 선생과 그 후배들이 찾은 것이 바로 해월 선생의 ‘식일완만사지(食一碗萬事知)’라는 법설(法說)이었다. 그리고 그 법설의 실천운동이 바로 한살림이었던 것이다.
햇빛과 공기와 물, 흙과 미생물, 벌레, 그리고 농부의 합작품이라는 유기적 생명의 질서를 누구나 쉽게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매개가 ‘밥 한 그릇’이었고, 그 밥의 소중함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삶의 질서와 사회를 찾아가자는 것이 바로 한살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해 건강과 생명을 해치는 농약과 비료, 제초제로 짓는 농사가 아니라 유기적 생명질서에 맞는 유기농법, 자연농법을 통해 생산된 공생의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들과 나누는 협동적 삶의 실천을 시작으로 새로운 삶의 질서와 사회를 찾자는 것이었다.
혁명은 품어 안는 것 - 사회운동론
밥은 새로운 운동을 여는 매개물이었다. 그렇다고 농약 안 쓰고 화학비료 안 쓰는 농사만을 고집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의 진면목은 바로 사회운동을 펼쳐내는 방법론에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덮어놓고 자꾸 차원을 높이는 건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살림에 동참하게 해야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유기농을 하는 분만이 아니라 농약을 쓰고 비료를 쓰고 그러는 농사꾼까지도 안고 가야 한다 말이에요. 그렇게 해야 그 사람네들도 그 길이 옳다 하고 그 길로 변화해야 하겠다고 해서 우리와 만남이 있게 되잖아요. 서로 이해가 다 되는 사람끼리 매일같이 만날 필요 있어요? 그러자면 말이지, 농약이 있는 농산물도 좀 먹어줘야 되잖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 얘기예요. 문제는 고고연하면 안 된다 이 말이야.
예수님이 그러지 않았어요? “나는 세상의 의인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왔다.”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어요. 또 “이년이 샛서방질을 했는데 돌로 때려죽이리까 말리까?” 하니까 말이지 “너희 가운데 죄없는 놈 있거든 돌로 먼저 쳐” 그랬지요? 잘나고 못나고가 어디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함께 할 수 있다고 하는 게 중요한 거지. 그런데 그 근원은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의 마음, 생명, 이런 것을 버리지 않고 가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하고 나누고 그렇게 해서 변화하고 그 어려움을 함께 이해해 주고,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넘어진 사람 일으켜 세워줘야 한다 이 말이에요.(<왜 한살림인가> 중에서)
선생의 정신 속에서는 한살림이 건강만을 찾는 이기적 보신주의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선생에게 한살림은 처음부터 근본에 대한 성찰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환은 그 근본에 깊게 뿌리내릴 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선생에게 혁명 또한 상대를 무시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품어 안는 것이었다. 혁명은 전환을 위한 것이고, 전환은 상대의 변화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좁쌀 한 알> 중에서)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니까요.
내 것이 옳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틀을 갖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만 판을 짠다거나 다수의 힘의 논리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선생은 말한다. 그런 정신 속에 논공행상(論功行賞) 따위는 설 자리가 없다.
김지하 시인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무위당 선생을 참 스승으로 느낀 것은 출옥하고 나서였어요.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원주로 그 마수가 뻗쳐오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을 때였죠. 보통 사람 같으면, 운동의 성과를 거머쥐고 있으려고 할 거예요. 하지만 선생은 달랐어요. 농민운동은 농민운동대로, 협동운동은 협동운동대로, 노동운동은 노동운동대로 제 갈 길을 가야 한다고 풀어놓는 거예요. 그 시절에는 각자 가는 것만이, 제각기 살 길을 찾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보통 사람으로는 안 되거든요. 하지만 선생은 그랬어요. 그때 ‘이 양반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구나’ 느꼈고 ‘아, 이 분이 참스승이구나’ 생각되었어요.”
그랬다. 원주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가톨릭의 평신도운동을 일으키고, 정의구현사제단, 가톨릭농민회, 민청학련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뒷바라지하며, 강원도 일원의 지역사회운동, 신용협동조합운동, 유기농업운동, 생협운동의 주춧돌을 놓고, 한살림운동에 앞장섰다는 대략의 발자취만 따져도 이 땅의 그 누구보다 못할 것이 없으련만, 선생이 남 달랐던 것은 그것을 자랑하지도 앞세우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아예 그 숱한 세월 동안 본인의 모습이 세간에 드러나 본 일도 없었다.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구절이나 자주 인용했던 노자(老子)의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고(生而不有), 키웠으되 부리지 않는다(長而不宰)”는 문구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김지하 시인, 이현주 목사를 비롯한 여러 후학과 제자들에게 늘 “기어라”, “문을 활짝 열고 아래로 흘러라(開門流河)”고 말했던 의미도, 식당하는 사람에게는 손님을 하느님처럼, 소비자에게는 농민을 주님처럼, 공무원에게는 주민을 정성을 다해 모시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줬던 것도 밑바닥, 근본의 자리를 놓치지 말라는 당부였고, 우리 삶의 목표가 개인의 영달이나 이해관계가 아니라 일체를 모신 존재들이 공생하고 협동하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었다. 선생이 지향했던 사회운동이 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사회를 만드는 창조의 그것이었던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의에 저항하는 에너지도 사람의 온기 속에서 나오며, 사회운동의 바탕에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도덕적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선생은 몸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은 날마다 넘어지면서도 마음을 곧추 세우는 공부의 자세였고, 무슨 일을 하든 ‘정성’을 다하고 어떤 사물과 사람을 대하더라도 연민과 자애로 ‘공경’하면서 ‘믿음’을 잃지 않았던 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에게 명상과 사회혁명은 둘이 아니었고, 명상적 깊이에서 나오는 사회적 실천이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선생은 사람들이 모이면 병신춤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자신을 낮추면서 민초들과 함께 했다. 또한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인간적인 면모로 선생 주위에 사람들이 모였던 게 아닌가 싶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생명사상은 일상 속에서 드러났고, 또 일상의 정진을 통해 닦여진 것이지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매일 넘어져요. 그동안 사회에서 배운 게 있어서 안하겠다고 하면서도 자꾸 저질러요.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때는 벌써 넘어진 거지. 그럴 때는 “내가 잘못했구나” 하면서 털고 일어나야지. 그러는 수밖에 방법이 없잖아요. 그건 내 집안 식구가 아는 것도 아니고 나만이 알고 가는 거지. 누가 그걸 알겠어요. ...(중략).....
그럴 때는 휘 - 혼자 산보를 해요.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술도 많이 먹었어요. 술 몇잔 얻어먹고 나서 돌아올 때는 꼭 방축으로 걸어서 오지요. 그래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주는구나” 하는 감사도 하고, 또 “내가 이러저러한 허튼 소리를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 하고 반성도 합니다. “네 자신이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구나” 하면서요.
또 하나는 돌틈에 끼어서 짓밟혀 있으면서도 풀이 턱 버티고 서있는 걸 보잖아요. 풀은 뿌리를 대지에 박고 있고 주야로 태양과 달을 의연히 맞이한다 이 말이야. 그 하나의 모습마저도 내가 못 미치거든요. 걸어오면서 내 마음을 씻는다고 할까, 많은 도움을 줬어요. 또 어떤 때는 붓을 들기도 하는데 하루종일 붓장난을 하는 날도 수두룩해요. 마음을 많이 세척하고 기를 한군데로 모아서 밝은 기분을 되찾기도 하지요.
사상과 운동의 뿌리를 찾아서, 후학들의 과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선생의 면모를 그리는 일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생명사상의 심화와 생명운동의 더 폭넓은 실천를 위해서라도 선생의 사상과 운동이라는 큰 나무가 자랄 수 있었던 뿌리는 철저히 파헤쳐져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 여운 장경호 밑에서 배운 한학과 우국지사 차장 박기정에게 사사받은 서화가 선비로서의 지조를 익히는 근원이었고, 지치주의자로서의 바탕을 만드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동양의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 공부와 일상을 둘로 여기지 않는 태도도 여기에 연원이 있다 할 것이다. 사회안전법과 정치정화법 등으로 언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부터 글씨를 쓰고 난을 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기를 모은 힘이 될 수 있었다.
해방 무렵 약관의 나이에 세계연방정부운동, 반핵평화를 위해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한 과학자들이 주도한 원월드운동에 참가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조로 유지했던 것은 김지하 시인이 말한 것처럼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영향이 컸을 테고, 특히 해월 최시형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인재양성의 교육자로서의 선생에게 도산 안창호의 영향은 지인들과 힘을 모아 창립했던 대성학원이라는 학교명에서 확인된다. 4.19 직후 사회대중당을 창당, 국회의원으로도 출마하고 5.16 직후 중립화통일론을 주창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던 선생에게 몽양과 죽산 조봉암 등 혁신계의 영향이 있었고, 그 영향이 1992년 제1기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진영이 구성했던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에 참가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협동조합운동, 지역사회운동을 펼치는 데 천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의 도움이 있었고, 천주교 사회를 향해 문을 활짝 열게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주도한 요한23세에 대해 상당한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 덕으로 선생도 가톨릭을 배경으로 여러 사회운동을 펼칠 수 있었다. 그에게 생명에 대한 명상의 깊이를 더하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 종교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불교신자에서 천주교도로, 그리고 다시 동학으로 이어지는 종교적 편력은 종교간 장벽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종교가 가진 생명에 대한 폭넓은 통찰을 가능하게 했던 에너지였다.
불살생(不殺生)의 불교의 교리와 무궁한 생명세계의 유기적 질서에 대한 화엄의 경전들의 깨침, 예수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 그리고 동학의 생명사상, 특히 걸어다니는 동학으로 불리던 해월 선생의 생각과 삶의 실천은 말년에 선생이 따르고자 했던 삶의 전범이었다. 해월의 사람과 사물을 모시는 태도와 민초들을 공경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사회실천은 선생의 생명사상과 운동의 교과서였다.
우주의 질서, 자연의 질서를 무위(無爲)로 표현한 노자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이현주 목사와 함께 노자 81장을 이야기 나눈 것만 봐도 노자가 주는 지혜에 대해 상당한 평가를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크게 선생에게 영향을 준 것은 장바닥의 아저씨와 아주머니, 풀뿌리 민초였고, 또 길섶에 피어난 잡초들이었다. 그것은 기교 없이 가장 절실함이 배어 있다 하여 ‘고구마 팜니다’라는 좌판의 글씨를 서화보다 낫게 평가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생명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잡풀들을 스승으로 느낀다는 선생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선생의 난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서화 중 가장 지조 높다는 난초가 바람에 흔날리는 잡풀을 닮았고, 또 장바닥 사람들 얼굴을 닮아 어느덧 부처의 모습으로 변하는 거기에 바로 선생의 생각과 삶의 실천의 뿌리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얼굴들이, 그 풀포기가 바로 선생을 선생일 수 있게 한 힘이 아니었을까.
선생이 평생의 사색과 실천을 선명하게 집약한 것이 생명사상이라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탐욕과 오만을 버리고, 자연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天地與我同根), 만물은 나와 한 몸(萬物與我一體)”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하찮아 보이는 풀, 벌레라도 거룩한 것으로 느끼며 모시고 공경해야 한다는 선생의 생명사상은 경쟁의 논리나 화폐의 잣대가 아니라, 공생의 논리와 생명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에 걸맞는 삶의 모습을 만드는 일이 우리 삶의 과제요, 우리 사회가 실천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