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경과생명 63호에 수록된 윤형근 선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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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생명 2010년 봄호(통권 63호) - 기획]

장일순 : 모시는 사람, 생명운동의 선구자 


윤형근((사)한살림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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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생명운동의 선구자, 무위당 장일순.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을 빼놓고 1994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원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선생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엄혹한 시절 생각 없이 쓴 한두 줄의 메모라도 주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취할 수밖에 없는 지당한 행동이었다. 글을 쓰지 않았던 선생의 모습에는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들의 소리에 깊이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경의 정신과 근원적인 겸손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은 의미부여를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아무 저작이 없는 선생의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생이 말년에 여기저기서 말씀한 강연과 대담을 묶은 책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와 이현주 목사와 이야기 나누며 노자 81장을 풀어놓은 <노자이야기>가 남아 있어 선생이 가졌던 생각의 일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10주기를 기념하여 나온 주위 사람들이 겪은 선생에 대한 일화집 <좁쌀 한 알>과 선생을 알고 지내던 후학들이 선생을 기리며 쓴 글 모음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그리고 서예가로 글씨와 난초 그림을 담은 도록(圖錄) 몇 권과 최근 발행된 잠언집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을 통해 어느 정도 장일순이라는 인물에 대한 조각 맞추기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선생의 강연이나 대담, 일화들은 학자처럼 일관된 체계를 잡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생활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담아낸 것이기에 어쩌면 사상이라 할 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얘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더더군다나 말년에 한살림으로 집약되는 생명사상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저 선생이 사회활동을 시작한 대학시절부터의 인생 역정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는 한계는 감수해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생을 이 땅에 생명사상을 처음 제창한 생명운동의 정신적 지주,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비롯된 한국의 비폭력 평화사상을 이어 세상에 널리 알린 사상가로 평가한다. 그것은 장일순의 생명사상이, 그의 비폭력 평화사상이 체계화된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드러나는 삶의 지혜를 가깝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할 것이다. 선생에게는 처음부터 이론 따로, 실천 따로라는 구분이 없었다. 밥 먹고 자고 일하며 살아가는 일상,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자세 속에 선생의 생각, 사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지인들과 함께 원주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교육자로 역할을 하던 모습에서도, 몽양 여운형을 사숙하고 4.19 이후 사회대중당 창당에 참여하여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 낙선하고 5.16 직후 옥고를 치러야 했던 정치가로서의 모습에서도, 또 지학순 주교와 함께 가톨릭평신도 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협동조합운동, 지역사회개발운동, 지역자치운동,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뒷바라지하던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에서도, 또 유홍준 교수가 지조 높은 이 땅의 마지막 문인화가로 규정하는 서예가로서의 모습에서도 그의 사상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히나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으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또한 아이들 아버지의 모습 속에도 선생은 한결같았다. “매일 아침 일찍 부모님께 문안을 드리고 부모님의 요강을 손수 비우시던 모습, 그렇게 부모님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던 모습과 주위 사람들을 늘 따뜻하게 대하던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이분을 평생 모시면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이경국 전 신협전국연합회 사무총장)”
 

공경과 모심의 철학

  이런 선생의 모습을 가장 적확하게 규정한 것이 그의 제자였던 시인 김지하이다. 그는 선생을 일러 덕성과 인격수양이라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정신을 정치인의 덕목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천한 ‘도덕정치가’라고 말한다. 요즘 현실만 봐도 도덕과는 거리가 멀어만 보이는 정치에 도덕의 이상을 끊임없이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와 같은 행위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봉산동 다리 건너에 있는 본댁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원주시청 앞 찻집까지 선생이 가시는 데 보통 한 시간에서 두 시간 반이 걸렸다고 한다. 가시면서 이런 좌판, 저런 리어카, 바구니 장사 아주머니, 하다못해 지나가는 나그네에, 동네 순경까지 만나서 소소한 이야기들, 즉 아버지 잘 계시냐, 조카 결혼생활은 잘 하느냐, 요즘 사는 게 어떠냐, 뭐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셨다는 것이다.
 
  민초들의 삶과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기쁨과 슬픔, 아픔을 함께 나누는 자애로움, 건네는 따뜻한 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경청의 자세는 선생의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공경의 태도였으며, 거기에 그의 사상의 일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렇기에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은 어느 시기에 전환되었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무위당이라는 한 인간의 밑바닥에 깔린 본연의 모습이었다”라고 리영희 교수가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경과 모심을 기본으로 삼는 생명사상이 그것을 제창하기 이전에 오래전부터 이미 선생의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모습에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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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2 12:57 2010/04/2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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