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운동에 던지는 12가지 작은돌
- 생명운동의 전망과 과제
'스마일 태양'은 유럽 녹색당의 상징이다. 핵미사일과 핵발전소에 맞서는 태양에너지, 그리고 꽃 한 송이도 천하만큼 귀히 여기는 마음, 생명감수성을 꽃피우자는 싱그러운 약속이었다. 그리고 한없이 투명한 영혼을 지닌 녹색여신 페트라 켈리. 벌써 30년 전 일이다. 68혁명 이후 풀뿌리에서부터 다양한 성장해온 유럽의 대안운동이 1979~80년 녹색을 선언하며 생명과 평화의 청량하면서도 격렬한 파고를 일으켰던 게 벌써 한 세대 전 역사가 되었다.
삼보일배. 한국 생명운동의 상징이라고 할만하다. 새만금과 온 세상의 뭇 생명을 모시는 마음으로 한없이 몸을 낮춘다. 보름달 같이 둥글고 환한 스님의 까까머리, 그리고 신부님과 목사님과 로만칼라. 그러고 보니 생명운동의 스승들도 성직자이거나 도학자(道學者)였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 그리고 장일순 선생을 떠올려 본다. 1970년대와 80년대 정농회와 한살림의 유기농업과 도·농 직거래로 시작된 한국의 생명운동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한국의 생명운동은 생활협동운동과 귀농운동으로 대중화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삼보일배로 상징되듯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등불로 밝혀왔다.
유럽의 전일적 세계관이나 동아시아의 순환적·연기적 세계관이나 근원적으로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생태주의(ecology)운동과 한국의 생명(生命)운동은 다르다. 주체도 전개 양상도, 사회경제적 단계 혹은 구조와 맥락도 다르다. 한국사회가 압축성장을 거듭했듯 한국의 사회운동도 단계를 뛰어넘는 압축·융합 속에 진화해왔다. 그래서 더욱 다르다.
한국 생명운동의 해바라기는 무엇일까? ‘삼보일배’일 수도 있고, ‘밥 한 그릇’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절명상이나 식일완만사지(食一碗萬事知)는 성찰의 화두를 던지기는 하나,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새로운 아이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숭고하다. 언론사 기자들에게 한국의 생명운동은 여전히 종교적 활동의 일부이다. 종교적 활동 혹은 종교의 사회 참여를 넘어서 유럽에서와 같이 역사적·문명사적 파고를 일으킬 수는 없을까? 생명운동의 관점에서 보는 오늘의 세계는? 생명운동과 전망과 과제는? 생명운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해본다. ** 아래, 더보기를 누르시면 전체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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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계점에 다다른 세계
가속도가 붙었고 막바지에 이른 느낌이다. 세계화, 지구별이 이렇게 시공간적으로 가깝게 묶인 적이 없었다. 물질적, 정신적 교류와 소통이 이렇듯 거세게 요동친 적이 없었다. 지구엔 더 이상 오지(奧地)가 없다. 아마존 밀림의 수십 명 소수 부족의 삶마저 지구 반대편 TV를 통해 노출된다. 더 이상 새로 개척할 시장도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땅 끝까지 갔다. 소비와 욕망의 창출은 있을지언정 지정학적 처녀지는 없다. 산업문명, 혹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임계점에 다다른 게 아닐까. 이미 신호가 오고 있다.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위기는 쓰나미처럼 일거에 지구 전체를 집어삼킬 지도 모른다.(물론 세상이 망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
한국사회도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경쟁국가’, ‘성장국가’의 거친 구호가 꼭두새벽 새마을노래처럼 귀청을 때린다. MB정부 출범 이후 가속이 붙었다. 세종시 논란은 접어두고서라도 집요한 ‘4대강 살리기(?)’가 무섭다. 그 속에서 민주주의와 생명의 존엄은 사치로 치부된다. 성장드라이브와 경쟁력 전투가 결말을 예고하듯 가파르게 치닫고 있다. 국가동원체제가 연상된다. “경제성장, 선진화, 국운상승.” 방송은 선동하고 공적 조직은 선전한다. 하기야 경제위기 극복한다며 부양(浮揚)에 부양을 거듭했으니 추락이 두렵기도 할 것이다. 그 와중 지리멸렬한 ‘진보’의 행보마저도 임계점과 전환기의 징후인 것 같아 안타깝다.
2. 물신숭배·경쟁국가
자연생태계의 다양성만 무너진 게 아니다. 사회적 균형만 깨진 게 아니다. 가치의 생태계도 모노폴리가 되었다. 다 아는 이야기다. 성장지상주의와 시장숭배.
“당신은 돈을 인생에서 최고의 성공 증표로 생각하십니까?” 한국 사람들의 69%, 그러니까 10명에 7명이 그렇다고 답한 셈이다. 최근 언론의 보도다(2010년 1월 24일 조선일보). 이미 짐작했던 일이긴 하나 숫자로 확인하니 몹시 아프다. 떠오르는 세계의 공장 중국도 역시 69%다. 이어서 인도가 67%로 바짝 쫓아오고 있고, 한때 경제동물이라고 불렸다는 일본도 63%를 유지(?)하고 있다. 문명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진다는 예언은 기실 자본주의의 이동과 확산임이 드러났다.
물신주의를 꺼낼 것도 없이 우리는 이미 ‘돈의 지배’ 체제 아래 살고 있다. 화폐와 GDP에게 영혼을 내어준 채 소비에 마취되어 생명의 고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심도 염치도 교양도 배려도 다 쓸 데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정신의 문제만이 아니다. 생활은 이미 일자리-소득-소비-폐기라는 돈벌이경제의 순환구조에서 몸을 뺄 수가 없다. 체제적으로는 자본의 전제(專制), 상품시장의 지배체제이다. 국가와 시장, 혹은 정부와 기업은 혈맹으로 결합되어 돈의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기업국가’이거나 ‘국가기업’이고, ‘시장국가’이거나 ‘국가시장’이다.(4대강과 토목과 원자력산업과 수출경제의 성장과정을 보라.) 그리고 선언한다. 경쟁국가. 경쟁과 성장은 국시(國是)가 되었다.
3. 가장자리 혁명
“생명은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생명은 새로운 질서를 의미한다.
양극화는 이미 구조화 단계를 지나 내면화되었다. 노예와 주인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양극화는 사회적 균형의 파괴와 무질서로 인한 극단적 요동의 한 증거인 셈이다. 교실에서도, 노동시장에서도, 문화레저시장에서도 사회적 배제와 양극화는 일상이 되었다. 결국 약·소자들은 가장자리로 떠밀려난다.
그런데 바로 이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남조선의 변방 고부, 더 이상 빼앗길 것 없는 농민들과 몰락한 향반들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하는 개벽의 새 세상이 예비 되고 있었다. 이 시대의 민초들은 누구인가? 오란 데도 없고 갈 데도 없는 개인들이다. 국가와 시장의 중추구조, 즉 국가기구와 대기업에 낄 수 없는 사람들, 비정규직과 소농과 자영업자와 비취업자들 혹은 反백수들, 이중삼중 구속의 여성들과 사회적 잉여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노인들, 이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싹이 트고, 새로운 사회적 질서의 단초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지구의 문명사적 혼돈의 가장자리일까? 폭주기관차일까?
4. 탈운동의 시대, 정신·문화의 시대
그렇다. 우선 가치·정신·문화의 생태계를 되살려야 한다. 다양성을 복원하고 균형과 조화를 되살려야 한다. 한살림운동은 생명의 세계관 확립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세계관운동, 새로운 문화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운동도 생장소멸(生長消滅)의 변화를 거듭해왔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소멸과 또 하나의 생장을 목격하고 있다. 민주화운동은 정치운동이다. 경제도 사회도 정치적 변화를 통해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정치인과 사회운동가가 있었다. 우리는 탁월한 정치지도자에 열광했다. 그리고 권력이 경제로 이동하고, 사회운동의 관심도 노동운동으로 비롯하여 경제정의운동, 사회경제적 민주화운동에 방점이 찍혔다. 폭풍 같은 노동운동의 시대를 거쳐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풍미했던 경실련의 토지공개념운동과 참여연대의 소액주주운동의 그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이들은 한국형 신흥 부르주아의 탄생에 기여 했다. 그땐 부르주아도 경제운동도 반드시 필요했다.)
사실은 운동 자체가 낡은 것이 되었다. 사회운동, social movement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듯 무브먼트일 뿐이다. ‘운동’은 근대세계의 역학적(力學的)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더욱이 운동은 구조의 형성, 소통 등과 함께 생명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사회운동은 지난 세기 과학기술, 예술, 정치 등과 더불어 핵심적인 동인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니다. 사회운동은 조선말 선비들의 집단 상소처럼 낡고 상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비분강개한 남성 양반들의 도포자락처럼. 탈운동의 시대라고 할까. 아니면 절대적 운동의 시대가 아닌, ‘상대적 운동’의 시대라고 해야 할까.(물론 상대성이론의 세계에서도 뉴튼물리학이 필요하듯 여전히 운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는 문화예술이, 정신(영성)·문화운동이 사회변화의 중심, 새로운 운동의 열쇠다. 물론 정치운동, 경제운동이 사라진다는 게 아니다. 정치와 경제는 여전히 삶·생명의 일부이므로. 다만 균형을 위한 중심이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명운동의 중심엔 종교인이 있다. 앞으로의 사회적 변화는 종교인·예술가가 이끌게 될 것이다. 생명운동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문화 영웅이 기대된다. 스타라 해도 좋다. 다만 이제는 조금은 엄숙한 로만칼라-까까머리와 한 쌍을 이룰 발랄한 영혼들의 댄스파티가 기다려진다. 그리고 이미 그들이 오고 있다. 위키피디아와 집단지성, 모바일네트워크와 UCC, 길거리 문화행동으로. 바로 성찰하는 촛불, 놀이하는 촛불, 흔들리는 촛불이 그들이다. 가장자리 혁명의 전사들.
5. 녹색·환경의 재구성
녹색도 이미 MB의 것이 되었다. 아무리 “녹색은 성장이 아니라 순환”이라고 주장해도 이미 녹색정치는 MB의 손을 거쳐 또 하나의 성공신화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기후변화와 에너지위기가 심각해지면서 기후의제와 에너지의제는 시민운동의 것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것이 되었다. 환경문제가 지구의제가 되고 국가의제가 되면 될수록 그 의제를 다룰 현실적 주체의 손으로 권력이 넘어갈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와 에너지문제는 이제 거대한 투자계획이거나 국가 간 협력사업이 되었다. 여기서 NGO와 NPO가 낄 자리는 없다. IPCC와 같은 전문가 기구는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다. 개인과 시민단체에게 글로벌 의제로써 기후변화를 다룰 힘이 없다. 환경의제 있어서 시민이니셔티브는 사라지고 없다. 환경단체들은 이제 생활실천운동을 조직하거나 정책을 보조하는 하위기구가 되었다. 어쩌면 환경정책은 이제 좋은 정당, 좋은 민간연구소에 넘겨야 할지도 모른다.
‘진보의 재구성’만큼이나 ‘녹색의 재구성’이 절실하다. 이미 녹색, 환경은 해체되었다. 의제의 재구성만이 아니다. 주체와 전략의 재구성이 뒤따라야 한다. 마치 진보의 재구성에서 노동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듯이. 환경운동의 주체도 어메너티(쾌적성)를 최우선시 했던 ‘시민’에서 생명의 터전을 지키는 ‘농민과 여성과 노인’들에게로 옮겨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어쩌면 재구성의 키워드는 ‘생명’이 될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환경운동은 생명운동이다. 4대강 싸움도 정녕 생명운동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생명운동은 정신운동이면서 생활운동이면서 사회운동이다
운동의 시대가 지났거니와 ‘생명’운동은 없다. 생명은 스스로 운동하고 조직하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작용이 불필요하다. 그렇다면 생명과 운동 사이에 무언가 있어야 한다. 뭇 생명을 살리는 ‘생명(살림)운동’이거나, 생명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확산하는 ‘생명(문화)운동’이거나 혹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세계의 평화를 구현하는 ‘생명(평화)운동’일 수도 있다.
생명(生命=삶으로 드러난 하늘의 질서)활동은 생태(生態)이기도 하고 생활(生活)이기도 하고 생계(生計)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적 생명세계는 천지인 삼재로 구성된다. 서양의 생태학적 세계관은 정신생태학, 환경생태학, 사회생태학의 세 차원으로 전일성을 설명한다.
한살림의 문법을 빌자면, 생명운동은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물론 방편이다. 하나이면서 셋이다. 한살림정신운동, 한살림생활운동, 한살림사회운동이 그것이다. 생활운동은 생명활동의 또 다른 표현인 생존의 기초조건이므로 바탕이 된다. 정신(문화)운동은 생명운동을 이끌고 사회운동은 생명운동을 매듭짓는다. 생명의 세계관을 내면화하고 생명감수성을 고양하는 것. 식의주교의(食衣住敎醫) 등 생활의 필요를 호혜와 순환의 원리로 실현하는 것. 생명가치가 실현되는 사회·경제적 제도와 체제를 구성하는 것(정치). 이들이 곧 생명운동의 전개과정인 것이다. 일찍이 한살림은 <한살림선언>을 통해 자기실현, 생태적 균형, 사회정의를 세 가지 운동적 비전으로 제시한 바 있다.
7. 생명운동은 평화(平和)운동이다
생명운동은 생명평화운동이다. 뭇 생명의 평화가 곧 생명운동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스스로 그러하므로(自然) ‘생명운동’은 없다. 생명운동은 오히려 평화운동이라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생명이 체(體)라면 평화는 용(用)이다. 평화는 피스(peace)이기도 하지만, 한자로 풀면 저울(平)과 피리(龠, 和는 피리龠의 조화로운 소리(禾))다. 즉 균형과 조화다. 생명운동이란 다름 아닌 평화운동, 즉 균형과 조화운동이다. 하늘, 땅, 사람의 균형과 조화. 하늘의 평화=영성적 균형과 조화, 땅의 평화=생태적 균형과 조화, 사람의 평화=사회적 균형과 조화. 그러므로 생명운동은 차라리 평화운동이다.
8. 이제 체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생명운동은 자기만족적이다” 라는 비판이 있다. 생명운동은 분명 자족적 운동이다. 스스로 호혜와 순환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니 말이다. 그러나 생명운동은 자기들만의 행복을 구하는 활동이라는 비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과 ‘구조’와 ‘제도’에 대한 이야기, 즉 체제에 대한 구상과 기획을 준비하고 내놓아야 한다.
임계점에 다다르고, 혼돈의 가장자리가 요동치는 전환의 시대, ‘전환의 기획’을 이야기하자. 앞서 세 가지 틀 그대로 첫째 세계관의 전환, 둘째 생활양식의 전환, 셋째는 체제의 전환이다. 생명운동은 공동체와 마을, 농업과 자립적 삶, 대안적 생활양식과 수행을 이야기하며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실천해왔으나, 아직 세 번째에 대해서는 시간이 부족했다.
시장과 국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교환과 재분배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 혹은 너머,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공동체와 호혜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대중과 어소시에이션의 전략과 함께 네트워크와 생명의 역동적 연기법을 검토해야 한다.
9. 영혼이 있는 경제, 호혜경제운동을 제안한다
물질 안에도 영성이 있다면 이코노미와 돈에도 정신(spirit, 혹은 영성)이 깃들어져 있을 것이다. 지금은 화폐가치로만 계산되고 있지만. 시장경제에도 계획경제에도 인간과 인격과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을 제거함으로 시장은 효율적이 되고 계획은 과학적이 되었다. ‘사회적 경제’는 훌륭하다. 하지만 거기에 마음을 담아내야 ‘사회적 경제’는 ‘사람의 경제’가 된다.
생명운동의 직거래운동은 바로 호혜(互惠)의 경제였다. 유통업자가 농민의 자식 같은 농산물을 밭떼기로 후려칠 때, 시장가격이라는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소비자와 생산자를 동시에 속여 먹을 때, 생명운동은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모토 하에 협의가격을 이끌어냈다. ‘적대적 교환’에 대해 ‘호혜적 교환’이다.
도·농 제휴농업과 품앗이와 두레가 바로 호혜경제였다. 이웃들과의 나눔과 벗들과의 교제 속에 호혜경제 즉 마음을 담은 경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다. 한살림과 생협들은 지금도 이 정신을 지키고 있을까? 호혜의 정신은 더욱 확산되어 왔는가?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
적대적 교환을 호혜적 교환으로, 양자거래에서 호혜의 그물로. ‘호혜적 순환’의 고리를 이어가고, ‘순환적 호혜’의 그물을 자아가야 한다.
소비에트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재분배기획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동성과 서로에게 은혜가 되는 사랑의 경제, 영혼이 있는 경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10. 생명운동은 後근대의 전망을 보여주어야
아직은 단초에 불과하지만, 호혜적 교환의 가능성은 인터넷 안에서도 존재하고 있다. 비상업적 직거래사이트들이 늘어나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동 중이다. 트위터로 상징되는 다양한 소셜네트워크(SNS)가 사회·정치적 행동의 도구가 되고 있다.
단지 디지털기기의 활용 문제가 아니다. 생명운동은 흔히 종교적인 활동으로 비칠 뿐 아니라, 전근대적 (농촌)공동체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근대 이후에 대한 비전과 상상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非근대의 기획에서 ‘前근대의 재발견’은 하나의 축이다. 그러나 反근대와 後근대도 중요하다. 超정보화사회라 할 만한 놀라운 기술적 변화에 대해 생명운동은 무어라 이야기할 것인가? 창조사회로 전환과 자본의 지배라는 이중적 현실에서 디지털 디스토피아에 대한 에코토피아의 기획은 불가능할까?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우주·생명공학 시대에 생명운동은 무엇인가?
11. 창조적 개인과 네트워크
생명운동의 요체는 창조적 개인과 공동체적 협동의 조화다. 호혜는 착취와 적대(敵對)에 반대하면서도 대동단결이나 연합을 강요하지 않고 ‘나’와 ‘당신’을 전제한다.
더욱이 초정보화시대, 모바일네트워크시대에는 개인이 중요하다. 협동이 필요하지만 협동농장으로는 안 된다는 게 역사의 증언이다. 소비자도 소농도 자영업자도 반백수도 다 개인이다. 개인은 약하니 모여야 한다. 그러나 대동단결이 아닌 화이부동(和而不同), 혹은 군이부당(群而不黨)으로. 개인의 창조적 자기실현과 이들의 네트워킹이 필요하다. 매스(mass)의 시대가 지나갔다. 연합(association)으로도 부족하다. 우리시대의 어소시에이션은 모두가 중심이며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고 발신자이면서 수신자인 인드라망이다. 생명의 그물이다.
12. 생명운동은 새로운 삶의 등대
생명운동은 삶의 근본을 묻는 운동이므로 오늘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생명운동은 “사는 게 뭔지”를 묻는 운동이다. 대중적 깨달음 운동. ‘사회적 척도’를 새로 만드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인생관을 바꾸는 정신운동을 벌여야 한다. 중심가치가 돈이 아니라 생명임을, 온전한 자기실현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소비로부터의 자유, 물질적 풍요로부터의 자유, 돈과 돈벌이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선언을 앞장서야 할 일이다.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와 그 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공공연하다. 역학적인, 적자생존의 세계관에 대한 의문부호가 커지고 다른 삶, 다른 사회에 대한 행동이 늘어나고 있다.
생명운동은 등대. 오늘 이 사회의 등대이고 새로운 삶의 등대가 될 것이다.
생명운동은 더욱 더 다양해져야 한다. 토론이 절실하다. 30년 전 독일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자는 수많은 이들이 울긋불긋 다양한 색깔로 꽃밭을 이루며 모였다. 이미 수 천 개의 대안적 소그룹이 존재했으며, 정치, 경제, 문화, 생활, 영성 등 그 관심사도 다양했다. 생명운동엔 아니 오늘의 사회운동 전체에게 더욱 시끌벅적한 쟁명이 필요하다.
지난해 말 가톨릭농민회 최초의 여성회장님이라고 하는 임봉재 회장님의 신문 인터뷰가 생각난다.(최근 한살림도 여성 활동가를 새 회장님으로 모셨다.) “여러 분야와 단체의 활동가들과 생명운동을 새롭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맑은 얼굴이 떠오른다. 반갑고 뵙고 싶었다. 생명운동의 선배·어르신들을 모시고, 새로운 삶을 실천하는 정착적 청년 농사꾼과 함께, 유목적 모바일 半백수와 더불어 백가쟁명의 장을 만들자. 장터를 잘 만들면 네트워크는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이다.







생명운동의전망과과제(주요섭,201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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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접점을 이루는 좋은 글이네요. YMCA도 생명평화운동을 하지만 사람들의 고착화된 이미지 속에서 평화운동은 나름 참신하고 글로벌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생명운동은 고루하고 무겁게만 느껴져서 상징어 자체를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찐하게 논의해봅시다.
한자가 잘못 쓰였네요. 본문의 '反백수'는 半백수입니다. 광주의 어느 선배님이 강조했던, '창조적 백수'의 잠재력을 가진, 정규직도 아니고 비정규직도 아닌 절반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