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 모델로서 ‘한살림’의 경험과 과제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선임연구원)
1. 새로운 사회적 경제와 생협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영향력이 국가의 조절능력과 생태학적 수용능력을 넘어 급속히 확대 되자 대안으로 사회적 경제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위 ‘새로운 사회적 경제’(new social economy)로 불리는 것으로, 돌봄 노동, 보건 및 의료, 교육 및 문화, 주택, 환경 등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지속가능한 생활과 관련한 문제들을 공동체적 경제활동을 통해 상향적이고 자조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는 지역에 대해서도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지역이 더 이상 국가의 일방적인 통치 대상이거나 시장의 이윤추구 수단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생활이 어우러지는 구체적인 ‘삶의 장소’(life place)이며, 따라서 자립과 자치의 원리로 지역사회를 공동체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사회적 경제의 원리를 지역적 실천양식으로 접목시키는데 있어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은 주목할 만한 영역이다. 우리나라의 생협은 소비자들의 권익 실현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 영미권의 소비자협동조합과는 달리, 생활인으로서 당면하는 공동의 과제들을 지역사회에서 협동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먹을거리를 활동의 기본 소재로 삼지만 단순히 안전한 먹을거리를 값싸고 편리하게 구입하는 차원을 넘어서 지역에서 협동적 가치와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한 ‘운동’의 정체성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생협 운동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래 외환위기 당시를 제외하고는 20여 년 동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2009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생협 전체 조합원수가 41만 세대를 넘어섰으며, 한해 총 공급액도 4천6백억 원에 달하고, 취급 물품의 품목 수도 농산과 가공품을 합해 1천종이 넘는다. 따라서 사업과 활동의 규모에 비례해서 생협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도 상당히 커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회적 경제의 주요한 활동 영역이자 주체로서 생협이 가지는 대안적 의미와 가능성들이 충분히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여타의 다른 사회적 경제 활동 영역들과 비교해서 생협들은 오랜 기간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 기반들을 의미 있게 만들어 왔으며,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련해서 사회적 경제의 모델로서 생협이 가지는 역할과 가능성들을 우리나라 생협들 중 조직규모와 역사성 측면에서 대표적인 ‘한살림’의 경험들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2. 한살림의 등장 배경과 성장 과정
우리나라에서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통한 생협 운동을 처음 연 한살림은 1986년 12월 4일 서울 제기동에 ‘한살림 농산’이라는 작은 쌀가게를 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에 비하면 취급 품목이나 규모가 볼품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농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만큼은 원대했다. 당시 한살림 농산 설립 취지문을 보면 “갈수록 더해가는 분열, 불신과 공해가 만연하는 ‘죽임’의 삶을 협동과 화합, 믿음이 가득차는 ‘살림’의 삶으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려는 한살림 운동을 펼쳐 나가고자 ‘한살림 농산’을 개설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농촌과 도시, 생산과 소비의 경계를 뛰어넘어 ‘한집 살림’ 하듯 상호 신뢰에 기반한 협동의 사회와 경제 질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노력해 온 한살림은 지난 24년 동안 조직적으로나 사업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들을 일구어 냈다. 1988년에 회원 수 1천5백 명에 공급액 4억 원 규모였던 한살림은 작년(2009년) 말 기준으로 회원 수가 20만 명이 넘고 공급액도 1천5백억 원이 넘는데다, 전국 19개 조직에서 일하는 실무자가 3백 명이 넘고 주부 활동가도 1천5백 명에 달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돈 보다는 생명을, 경쟁보다는 협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농사활동에 전념해 온 생산자들과 이들의 노력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 실천해 온 소비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여기에다 먹을거리 자체가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위협받고 있는 사회적 환경도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지난 수년 간 식품관련 각종 오염과 사고가 빈발해지면서 먹을거리의 안전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통한 생협의 조합원 가입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배추값 파동을 겪으면서 직거래를 통한 생협의 안정적인 가격 시스템이 크게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사회적 관심을 생협 활동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조직 차원의 노력도 중요했는데, 그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보다 많은 소비자 조합원들이 효과적으로 물품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류체계를 혁신하여 효율화 했고, 마을모임, 소모임, 각종 위원회 등을 통한 조합원 참여 활동과 지속적인 교육 등을 통해 조합원들이 단순히 물품만 이용하는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협동 조직체를 함께 이끌어가는 주체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여기에다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긴밀한 신뢰 관계 형성을 위한 도농교류 활동에도 힘을 쏟아 왔다. 단오잔치와 가을걷이 한마당잔치와 같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하는 연례행사는 물론이고, 도시와 농촌의 공동체 결연을 통해 일손 돕기와 생산지 방문 활동들을 지속해 오고 있다.
3. 사회적 경제 모델로서 한살림의 경험과 역할
오늘날 한살림을 포함해서 생협들은 국가 통치와 시장 지배를 넘어선 대안사회의 모습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과 가능성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사회적 경제의 주요 주체 중 하나인 사회적 기업들이 정부의 지원에 의존한 채 제도화의 틀에 갇혀 창조적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생산과 소비의 분리를 협동의 원리로 극복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대안의 영역을 만들어 온 생협의 잠재력은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이라는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경제활동체로서 가지는 생협의 특성을 고려할 때, 한살림의 외형적 성장은 사회적 경제의 활동 영역이 그 만큼 확장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특히 많은 조합원들이 생협 활동을 통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과 협동조합적 운영원리를 학습하고 다양한 교육과 참여 활동을 통해 주체적 역량을 성장시켜 온 점은 사회적 경제의 저변을 형성하는데 있어 의미 있게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한살림은 유기농산물을 중심으로 한 직거래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지역사회를 보다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지역살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살림운동은 먹을거리를 포함해서 복지, 교육, 환경, 노동 등 다양한 생활 속 과제들에 대한 조합원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자, 한살림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지역사회로부터의 요청들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길이기도 하다. 현재 한살림은 각 지역별로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가고 있으며, 서울의 경우 작년에 용산과 광명 지역 두 곳에 지역아동센터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생협의 경제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을 지역사회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의미 있는 실천 방식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한살림 생산지에서는 생태순환형 지역농업 체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도시 소비자들은 기금을 모아 생산지에 햇빛 발전소를 건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의 공동출자를 통한 ‘일 공동체’(workers' collective)를 통해서 생협의 힘으로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현재 한살림은 친환경 면 생리대를 만드는 ‘목화송이’와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한 ‘착한밥상 맛깔손’ 두 곳을 워커즈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나아가 지역살림 활동 영역을 국경을 넘어서 펼치기도 하는데, 북한 어린이 돕기나 아이티 난민 돕기는 물론이고 최근에는 지진으로 고통 받고 있는 파키스탄 돕기와 아프리카 농장 지원 활동들도 진행하고 있다.
4. 전망과 과제
이상기후와 경제적 불안정성이 확대되는 복합위기 상황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변화와 충격들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 영역(buffer zone)들이 경제와 사회, 생태계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이점에서 협동의 경제로 생태순환형 농업체계를 보호하고 공동체적 지역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해 온 한살림을 포함한 생협들의 역할은 앞으로도 더욱 중요해질 전망이다.
그만큼 생협 스스로도 본래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공재를 협동의 원리로 지속가능하게 생산해 내고, 지역을 ‘생명의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짜나갈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들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마침 올해 개정된 생협법(제8조)에도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를 생협 활동의 주요 영역으로 설정하여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생협의 역할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하지만 생협 단체들만의 노력으로 지역에서 사회적 경제의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은 한계가 있다. 계획 권한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자원을 종합하고 조율할 수 있는 지자체 차원의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개정 생협법(제9조)에는 생협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나 시설 등에 대한 ‘국가 및 공공단체의 협력’ 조항이 담겨 있다. 하지만 굳이 법적 근거를 빌리지 않더라도 자립과 자치의 원리로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생협들이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지자체의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생협과 지자체 간의 긴밀한 파트너십으로 사회적 경제 거버넌스 체계가 잘 작동해서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지방의회 의원들이 주로 보는 잡지 <월간 자치행정> 2010년 12월호(273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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