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민주주의 : 민주주의의 창조적 진화

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 선임연구원)

*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하는 ‘희망세상’(2011. 2)에 실은 것입니다.



지난 시절 사회적 열망의 대상이었던 민주주의가 오늘날 심각한 물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높아진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 수준과 현실적 조건 사이에서 비롯된 괴리감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동안의 민주화 과정이 일구어 낸 정치, 제도적 성과들이 사회, 경제적인 영역으로 충분히 확산되지 못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변화를 충분히 체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다수결에 기반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다 근본적으로 지적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는 급속한 환경 변화와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 지금의 민주주의가 적절한 해법을 제시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의사결정의 오류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겨 있다. 지금 소개하는 ‘생태민주주의’(ecological democracy)는 바로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실 민주주의의 이론과 제도에 대한 창조적 진화를 요구하고 있다.

생태민주주의의 등장

생태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생태학적 도전을 바탕으로 해서 등장했다. 현실 민주주의와 정치 제도의 특성 및 역할에 대해 ‘생태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살펴보는 과정에서 생태민주주의가 주목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논의의 역사도 그리 길지는 않다. 생태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관심은 앞선 근대화만큼 생태적 부작용 또한 일찍이 경험한 서구 선진 국가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생태문제가 전 지구적인 차원의 문제로 확산되자 인류의 생존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해 낼 수 있는 대안적 실천 담론의 하나로 생태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환경민주주의, 녹색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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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나라에서 생태민주주의는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여전히 생소한 영역에 머물러 있다. 생태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나타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다. 새만금 간척사업, 부안 방폐장 건설 등 정부의 대규모 개발사업들이 심각한 사회갈등과 생태적 부작용을 일으키자, 이를 비판하던 환경운동 영역에서 생태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소위 민주화 된 정권 하에서 나름의 법적 절차를 거쳐서 진행되는 각종 정책과 개발사업들이 결과적으로 생태학적 부담과 부작용을 일으키는 일들이 반복되자, 민주주의와 생태주의의 관계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대안으로 생태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현실에서 생태민주주의는 이론의 영역 보다는 운동 현장의 실천적 고민을 바탕으로 등장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생태민주주의는 체계화 된 이론으로 소개되기 보다는 지금도 형성, 분화, 발전 중에 있는 담론으로서 성격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민주주의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이 분명하고 실천적 함의도 큰 만큼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태민주주의가 제기하는 문제의식들

생태민주주의는 당면한 생태문제를 정치의 문제이자 민주주의의 문제로 인식한다. 따라서 해결에서도 단순히 물리적 환경만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주체인 인간의 인식과 실천 양식에서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생태문제의 발생과 정치 제도의 특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생태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치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생태민주주의가 제기하는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태문제에 대한 위기의식이 권위주의에 대한 유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즉 생태문제에 대한 우려와 긴장감이 확대 될수록 의사결정과정에서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더욱 요구하게 되고, 그 결과 다수의 합의에 따른 자율적 선택 보다는 강력한 심판자 또는 관리자를 통한 문제해결 방식을 더 선호하게 되어, 결국 ‘생태권위주의’(ecological authoritarianism)의 등장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권위주의적인 접근 방식은 사회적 학습과 성찰의 가능성 자체를 제한시켜, 복잡하고 불확실성이 높은 생태문제를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 권위주의 체제의 생태학적 무능력은 구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이후 드러났던 심각한 생태파괴 현상과 지금 북한 체제가 당면한 생태학적 재난 사태를 통해서 경험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이 민주주의의 생태학적 정당성을 저절로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지금의 대의민주주의는 특성상 잠재적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높은 생태문제들을 다루는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체계는 생태위기적 현상들에 대해서도 사후적인 반응과 제한적인 대응에 머무르게 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를 통한 개방된 의사결정 체제가 생태문제에 대한 높은 반응성과 책임성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단기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사적 권리를 확대․실현시키기 위한 통로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의제적 선거정치 구조는 이런 생태학적 결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생태민주주의의 핵심은 의사결정 과정을 단순히 개방하고 확대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질과 그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함께 다루는데 있다. 따라서 생태문제에 대해 무감각과 무능력, 무책임성을 보여주는 현실 민주주의의 이론과 운영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것이 생태민주주의가 가진 기본 문제의식이다.


생태민주주의의 도전과 과제

의사결정권에서 제도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 그리고 인간 이외 다른 생명 존재들의 필요와 요구들을 민주주의적으로 반영시키기 위한 생태학적 도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대규모 국책형 개발사업을 둘러싼 갈등들 속에서 이런 현상들이 포착되고 있다. 따라서 새롭게 나타나는 변화와 도전들을 생태민주주의 측면에서 진단, 해석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해서 구체적인 실천 과제로 풀어내는 일이 과제로 던져졌다.

먼저, 방사성폐기물 처리장(이하 ‘방폐장’) 부지 선정과 관련하여 실시된 ‘주민투표’ 제도를 생태민주주의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원자력 발전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의 처리 문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항상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특히 좁은 국토에 원자력 발전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나라는 1986년에 정부가 방폐장 사업에 착수한 이래 20여 년 간 지역갈등 등으로 9차례나 부지 선정에 실패 했었다. 안전성을 핵심으로 하는 방사성폐기물의 보관 및 처리 문제가 해당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과 미래세대에 미치는 부담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주민투표 방식을 통해 방폐장을 경주로 최종 확정했다. 그리고 이런 결정방식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획기적이고 의미 있는 시도로 홍보 했다.

하지만 주민투표를 통한 의사결정 방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태적으로 민감한 안전성 문제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주민합의 과정이 생략된 채 파격적인 경제적 지원책이 의사결정 과정을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경주로 확정되었던 방폐장 사업이 안전성과 보상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다시 표류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결국 이 사례는 의사결정 과정의 개방이 민주주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과제 임에도 불구하고 생태가치가 여전히 비주류인 현실적 조건을 고려할 때 보다 신중하고 섬세한 접근이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생태학적 도전은 새만금 개발사업에 대한 ‘미래세대 소송’에서도 확인된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총연장 33.4km의 세계 최장의 방조제 축조와 여의도 면적의 140배에 해당하는 갯벌과 바다를 매립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개발사업이었다. 그 만큼 이 사업으로 인한 생태학적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새만금 미래세대 소송도 그 중 하나다. 전국의 만 18세 미만 어린이 및 청소년 200여명으로 구성된 ‘미래세대 소송인단’이 정부를 상대로 새만금에 대한 사업 중지 및 취소를 청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미래세대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이 소송은 법원으로부터 원고 부적합 결정을 받아 각하 되었다. 그러나 이 사례는 현세대가 지구의 ‘마지막 주인’이 아닌 만큼, 미래세대를 위해 자연자원을 현명하게 이용하고 물려줄 책임과 의무가 있음을 사회적으로 환기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생태민주주의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한편, 건국 이후 최대 국책사업이라 불리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과 관련하여 2차 구간(대구-경주-부산)인 천성산 터널 공사를 둘러싸고 발생된 ‘도룡뇽 소송’ 역시 생태민주주의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천성산 관통 반대 대책위원회는 2003년 10월 천성산에 서식하는 도롱뇽을 원고로 하고 자신들을 '도롱뇽의 친구들'이란 이름의 대리인으로 해서 사업시행 주체인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역시 동물은 소송 수행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소송 자격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 채 기각 되었다. 하지만 도룡뇽 소송 역시 인간 중심적인 법과 제도적 틀 속에서 생태적 가치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물음을 우리 사회에 던져 주었다.

종합해 볼 때 이러한 사례들은 민주주의의 절차적 합리성과 생태적 가치를 고려한 실체적 합리성을 서로 균형 있게 결합시키는 차원에서 생태민주주의의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기후변화와 식량 및 에너지 자원 고갈 등 생태학적 위기가 현실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의사결정 체계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생태학적 도전은 다양한 영역에서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전망이다. 따라서 인간중심적인 권리에 기반한 지금의 의사결정 체계를 시공간적으로 확장시켜 미래세대와 기타 생물 종까지 고려하는 생태적으로 민감한 민주주의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생태위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창조적 진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다가왔다.

2011/03/22 14:10 2011/03/2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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