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선언 30주년

한살림선언

“한살림선언”은

한살림선언은1989년 10월 29일 대전 신협연수원에서 열린 ‘한살림모임’ 창립총회에서 발표되었다. 한살림모임은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매개로 생활공동체운동을 펼치던 한살림소비자협동조합(현재의 한살림)과 함께, 또 다른 축의 생명문화운동을 펼치기 위해 발족했다. 당시 한살림모임에는 무위당 장일순, 시인 김지하, 최혜성, 박재일 등 주로 원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회운동가들을 중심으로 60여 명이 참여했으며, 김민기(가수, 극단 학전 대표)가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동안 이들은 1988년 다섯 차례사전모임을 거쳐 ‘한살림 연구회’를 만들고, 1989년 1월 ‘한살림모임 창립준비위원회를 거쳐, 그해 10월 ‘한살림모임’을 정식 출범시켰다. 한살림모임은 1년여에 걸쳐 공동체운동과 세계의 협동운동, 환경위기와 생태주의, 동학을 비롯한 전통사상 등 다양한 분야와 세계사의 흐름을 검토하고 토론을 벌였다. 이를 최혜성이 대표 집필해 <한살림선언>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이후 한살림모임은 1992년까지 공부모임을 지속하며 무크지 형식의 ≪한살림≫과 ≪쓰레기로부터 지구를 생각한다≫ ≪공생의 사회 생명의 경제≫ 등을 발행했다. 한살림선언은 한살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생태, 환경운동, 협동운동에 중요한 지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모심과살림연구소는 한살림모임의 지향을 이어받아 생명협동운동에 관한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기 위해 지난 2002년 문을 열었다.


1.산업문명의 위기

인류가 자유, 평등, 진보의 깃발 아래 피와 땀을 흘리면서 이룩해 온 오늘날의 산업문며은 세계를 황폐화시키고, 모든 생명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또한 인간이 자연 지배의 도구로 사용했던 기계와 기술에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예속되어 버렸다.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이고, 공산주의 사회도 인간이 기계와 기술에 예속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산업문명은 생명을 소외시키는 체제이며, 본질적으로 반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반생태적이다. 또한 산업문명은 모든 것들을 대립, 투쟁하게 한다. 노동과 자본, 이성과 감성, 인간과 자연의 대립은 산업문명으로 인하여 생겨났다. 더욱이 민족의 대립, 분단이라는 비극까지도 야기시켰다.

우리들은 산업문명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사회·경제·정치의 세계에서, 전지구 규모의 생태계의 영역에서 위기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물질적, 제도적인 위기일 뿐만 아니라 지적, 윤리적, 정신적 위기이며 인류사상 유례없는 규모와 긴박성을 지닌 위기, 바로 전인류와 지구상의 전생명의 파멸을 의미할 수도 있는 위기인 것이다. 오늘날 산업문명이 우리에게 가져온 위기는 다음과 같은 증후(症候)로 나타나고 있다.

  • · 핵위협과 공포
  • · 자연환경의 파괴
  • · 자원고갈과 인구폭발
  • · 문명병의 만연과 정신분열적 사회현상
  • ·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악순환
  • · 중앙집권화된 거대 기술관료체제에 의한 통제와 지배
  • · 낡은 기계론적 세계관의 위기

핵공포와 환경오염, 암과 정신장애, 폭력과 범죄, 인플레이션과 불황, 자원고갈과 인구폭발 – 산업문명이 바로 이러한 위기의 원천인 것이다. 이제야말로 산업문명에 의하여 구축된 세계질서와 그 기반이 되고 있는 세계관,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2.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

산업문명의 기초는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 철학, 뉴톤 역학, 존 로크의 사회사상이 등장함으로써 자연·우주·인간이 기계론적 모델에 의해 설명된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가 전개되면서 서구의 합리주의·실증주의·산업주의는 사고의 편견을 가져왔다. 즉 직관적 지혜보다는 합리적 지식을, 통일보다는 대립을, 조화보다는 경쟁을 더 추구한다. 이러한 편견으로 인해 여러 가지 불균형이 생겨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는 오늘날의 산업사회 전반에 산업문명을 옹호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기계론적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모형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과학만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

분석과 실증을 통한 과학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인식의 길이라는 ‘과학지상주의’는 학문과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등 모든 분야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2. 실재(實在)를 이원론으로 분리해서 보는 존재론

데카르트 등장 이래 이원론적 존재론은 모든 영역에 적용되면서, 산업사회의 지배적인 철학으로 신봉되어 왔다.

3. 물질과 우주를 기계모형으로 보는 고전역학

이원론적인 존재론, 즉 환원주의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조차 기계론적 틀로 파악하게 하였다.

4. 생명현상을 유기적으로 보지 않는 요소론적 생물관

생명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대부분의 문제는 생명을 요소론적으로 파악하는 비유기적이고 단편적인 접근에 그 원인이 있다.

5. 인간정신을 기계모형으로 보는 영혼 없는 행동과학과 육체 없는 정신분석

행동과학과 정신분석학은 그 방법과 관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는 의식을 기계론적으로 보는 동일한 이론적 기반 위에 서 있다.

6. 직선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이론

자본주의이건 사회주의이건간에 오늘날의 경제이론은 모두 직선적인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3. 전일적 생명의 창조적 진화

환경과 단절되어 고립된 체계는 엔트로피, 즉 폐기된 에너지를 생산하고 축적하여 마침내는 열의 죽음에 이르게 되며 그 구조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게 된다고 하는 우울한 진실이 열역학熱力學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오늘의 산업문명은 환경, 즉 생태계로부터 단절되어 고립된 기계와 흡사한 세계이다. 이 안에서 생존하는 인간도 사회적, 생태적 환경에서 단절되어 고립된 존재같이 보인다. 그런데 열역학은 고립된 체계들은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고 선언하고 있다. 엔트로피 법칙에 지배되는 산업문명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고하는 그 슬픈 운명이 기계적 모형 안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고 기계문명의 붕괴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붕괴하고 파멸하는 것은 기계문명의 낡은 틀일 뿐이지 인류 그 자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과학에 새로운 기운이 움트고 있다. 뉴턴 이래 모든 과학은 사물을 가장 단순한 단위로 분할하고 환원시켜 해명하려고 애써 왔으나 분할의 과학은 산업문명의 낙조가 깃든 오늘날 한계에 부딪혀 있다. 우리가 일상 경험하는 자연현상은 하나의 원자나 분자가 아니라 다수의 분자 덩어리로 이루어진 복잡한 현상이다. 분자와 분자, 분자와 환경 사이에 여러 모양의 상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덩어리는 혼란스럽게 보인다. 이와 같은 복합 현상은 단순한 단위와 요소로 환원하여 해명할 수 없다. 구름의 변화를 물의 분자로 해명할 수 없고 건물을 벽돌의 집합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분할된 것을 다시 통합하여 자연의 전체적인 본래의 모습을 보려고 노력하는 과학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과학이 엔트로피 법칙에 대해 놀라운 재해석을 하게 되었고 진화에 대한 새로운 모형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과학의 견해에 따르면, 환경과 더불어 물질·에너지·정보를 주고받는 개방된 체계는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내부에서 생산된 엔트로피를 환경에 배출한다. 개방된 체계에 있어서 환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에너지의 양과 환경으로 배출하는 엔트로피의 양이 평형을 이루면 그 구조는 평형상태에 놓이게 되고 반대로 양자 사이에 평형이 깨질 때는 비평형상태에 놓이게 된다. 평형상태는 그 구조가 안정되어 있지만, 비평형상태에 있는 체계는 불안정하여 끊임없이 동요하게 된다. 그 동요가 격화되어서 어떤 분기점(分岐點)에 도달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낡은 구조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조직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평형상태에 있어서 작은 동요는 오히려 증폭되고 격화됨으로써 낡은 구조를 해체하고 새 질서로 진화해 가는 것이라 한다.

열역학은 고전역학과는 달리 시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엔트로피 법칙은 이 우주에는 피할 수 없는 에너지의 손실이 있다는 것, 즉 한 체계에서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지만, 쓸모 있는 에너지의 양은 열의 손실로 점차 감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이 우주가 열의 죽음으로 인해 운동을 멈추는 것이라면 한순간이라도 바로 그 전의 순간과는 더는 같을 수가 없다. 열역학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일정하게 흐른다는 절대시간의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 그 누구도 엔트로피를 보충하기 위해 시간의 방향을 거꾸로 돌릴 수 없으므로 시간의 화살은 비가역적(非可逆的)인 것이다. 우주는 에너지가 새어 나옴으로써 그 구조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질서에서 무질서로 무너져 버리고 만다. 결국, 우주는 늙어가면서 죽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와 인간에게 비관적인 장래를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의 시각에서 보면 우주와 세계는 달리 보인다. 우주는 에너지를 잃어감에 따라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늙어감에 따라 보다 성숙하게 자기를 조직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높은 수준의 질서를 향해 진화해 가는 것이라고 한다. 엔트로피의 증대는 닫힌 체계에서 시간이 비가역적으로 흐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닫힌 체계란 우주의 진화에서는 극히 드문 일시적인 현상이며 오히려 비가역적인 시간, 즉 엔트로피야말로 질서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 한다. 개방된 체계는 무질서하게 요동치는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고차원의 질서로 자기를 조직해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엔트로피는 죽음을 향해 가는 내리막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한계를 초월하여 높은 질서로 향해 가는 진화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다.

진화의 모형으로 보면 평형은 정태적 구조에서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정체(停滯)와 죽음을 의미한다.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기계적인 체계가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르게 되는 최대의 엔트로피는 완전한 평형과 정지로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자기의 외부에 있는 환경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과정 가운데 일시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머무를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볼 때 정태적 구조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끊임없는 동요와 진동 속에서 변화를 억제함으로써 기존의 구조를 유지할 때도 있지만, 오히려 변화를 촉진하고 증폭함으로써 낡은 구조를 버리고 새 질서로 진화하는 자기 초월을 수행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보면 모든 생명은 그 환경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아니고 우주적 관계의 그물 속에서 상호작용을 하면서 연결된 것이고 자신 안에 우주적 생명을 지닌 하나의 통합된 전체라 할 수 있다. 생동하는 우주의 진정한 모습은 모든 생명을 하나의 생명으로 아우르면서 진화하는 큰 생명의 무궁한 펼쳐짐이라 하겠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환경과 협동하여 공진화(共進化)하면서 우주의 궁극적 생명으로 합일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과 자연은 기계적인 질서 속에서 서로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으며 그들의 참모습, 즉 생명의 모습으로부터 소외되고 있고 그 본성을 억압받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생명에 대한 공동체적, 생태적, 우주적 각성이 더욱 요청되고 있다. 생명에 대한 새로운 각성만이 인류를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문명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의미를 새로운 빛으로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생명은 ‘자라는 것’이고 기계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명이란 스스로 자라는 생성生成 그 자체이며 자라는 과정에서 자기의 구조와 질서를 스스로 조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기계는 그 누군가에 의해 제작되는 것이고 그 운동은 이미 정해진 구조와 질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서구의 오랜 전통철학은 모든 것을 존재로 보고 존재의 정태적 구조를 중심으로 사고를 해왔다. 즉 변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궁극적 실재라고 생각해 왔다. 만들어진 기계는 어떤 의미에서 존재라 할 수 있으나 생명은 진화라는 시각에서 보면 존재라기보다는 생성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둘째, 생명은 부분의 유기적 ‘전체’이고 기계는 부품의 획일적 ‘집합’이다.

모든 생명은 그 자신보다 큰 전체에 대해서 하나의 부분이면서 동시에 많은 부분을 통합하고 있는 전체라는 의미로서 전일적 아조직체全日的亞組織體이다. 전체이면서 부분인 생명은 서로 작용하면서 순환적인 구조를 가진 성층질서成層秩序의 그물에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모든 생명은 전체로서의 독립성과 부분으로서의 종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전체로서의 생명은 부분으로 결코 분할될 수 없고 오히려 부분으로서의 생명이 전체로 통합되는 것이다. 또 부분이 전체에 통합될 때 부분은 자기의 개성을 주장하려는 경향과 전체에 통합되려는 경향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상반된 것인 동시에 상보적인 것으로서 균형을 유지하며 이 균형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체적 통합과 개성적 주장 사이의 역동적 균형이 전일적인 생명에게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셋째, 생명은 ‘유연한’ 질서이고 기계는 ‘경직된’ 통제이다.

생명은 내적인 융통성融通性과 유연성柔軟性을 가지고 있다. 생명은 통합된 전체로서는 하나의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부분들의 모양은 어느 정도 변화가 있고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두 개의 생명체가 똑같은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 생명은 전체로서는 일정한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있으나 부분들의 활동은 분방하고 불규칙적이다. 또한, 생명은 전체로서 질서와 규칙을 강조하지만 이를 분방하고 개성적인 부분들에 강요하지 않고 부분들의 무질서와 다양성을 너그럽게 조정調整하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생명은 진화하는 환경에 동참하여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편 기계는 엄밀한 설계에 따라 일정한 부품들로 조립되어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엄밀히 설계된 전체의 구조가 부품들의 운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그 부품들의 모양도 획일적인 것이다.

넷째, 생명은 ‘자율적’으로 진화하고 기계는 ‘타율적’으로 운동한다.

생명은 자기를 스스로 조직화하는 체계이다. 생명의 활동은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며 동시에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리하여 생명은 자기를 자율적으로 조직하는 한 자유롭지만 반면에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인 한 결정론적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이 격심한 동요로 진화의 분기점에 이르렀을 때 그 진화의 방향이 혼돈 속으로 와해할지 아니면 새로운 질서로 진화해 나아갈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생명의 진화에는 돌연변이와 같은 우연이 개입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생명 자신의 선택이며 일단 한 방향을 선택하면 다음 분기점에 이르기까지는 필연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와 필연은 생명의 진화과정 속에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기계의 운동은 외부의 힘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기계는 타율적인 것이라 하겠다.

다섯째, 생명은 ‘개방’된 체계이고 기계는 ‘폐쇄’된 체계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 밖에 있는 환경과 물질·에너지·정보를 주고받는 신진대사(新陳代謝)를 통하여 자신을 구성하는 부분 중에 낡은 것은 밖으로 내보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 생명은 이러한 자기갱신(自己更新)을 통하여 전체적인 자기의 구조와 질서를 유지하게 되며 부분들의 손상 때문에 전체로서의 자기가 파괴되지 않도록 자기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손상된 부분들을 스스로 치유한다. 생명은 낡은 부분들을 새것으로 바꾸는 부분적인 자기갱신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 한계를 넘어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기 위하여 또다시 자신을 전체적으로 갱신하는 창조적 모험을 감행한다. 그리고 생명은 창조적 진화를 단독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거시적인 생명인 환경과 협력해서 공동으로 수행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진화는 생명체가 자연선택에 따라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 보는 다윈Darwin류의 진화가 아니라 미시적 생명이 거시적 환경과 공진화하면서 자기를 초월하고 동시에 자기를 조직화하는 창조적 활동이다. 반면에 기계는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된 체계이다. 작동을 계속하기 위해서 한번 에너지를 공급받으면 외부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에너지가 일단 고갈되면 작동이 정지되며 정지된 기계는 외부에서 에너지의 새로운 공급이 없는 한 스스로 작동을 시작할 수 없다.

여섯째, 생명은 순환적인 ‘되먹임고리feedback’에 따라 활동하고 기계는 직선적인 ‘인과연쇄’에 따라 작동한다.

생명의 활동은 신진대사이거나 진화이거나를 막론하고 끊임없는 순환과정을 통하여 진행된다. 순환과정은 출력된 에너지를 입력으로 다시 먹이는 되먹임의 고리이다. 이러한 순환에서 생명은 그 내부가 동요하게 됨으로써 비평형의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사실 비평형이야말로 생명이 ‘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며 자기보존과 자기갱신을 위해 부지런히 환경과 신진대사를 하게 만드는 동시에 낡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질서로 진입하게 하고 있다. 생명은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동이 일정 수준을 넘어 자신의 평형을 지나치게 불안하게 만들면 마치 자동제어장치같이 변동을 억제함으로써 다시 평형을 회복한다. 그리하여 생명은 소극적인 ‘되먹임고리’를 통하여 체온조절, 혈액순환 등과 같은 대사 활동을 하는 것이다. 한편 생명은 적극적인 ‘되먹임고리’를 통해 변동과 요동이 증폭되면 전체의 평형이 붕괴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 생명은 낡은 질서를 해체하고 전혀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게 되는데 결국 생명은 위기를 창조적인 진화로 전환하는 것이다. 생명의 진화는 변동을 억제하는 소극적인 되먹임고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동을 증폭하는 적극적인 되먹임고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적극적인 되먹임은 적은 입력으로 진화라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오는 과정이다. 이와는 다르게 기계는 원인과 결과의 직선적인 연쇄에 따라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만 작동하는 것이다.

일곱째, 생명은 ‘정신’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생명의 본질은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정신은 생명을 기계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생명과 정신은 둘 다 그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자기를 조직하는 역동성을 지닌다. 창조적인 것은 정신의 본성이다. 물질도 정신의 반대가 아니라 우주적 한 과정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신은 인간과 생물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우주의 모든 실재에 내재하는 생명의 근원적 활동이다. 모든 생명체가 신진대사를 통하여 자기를 조직하듯이 화학반응에 있어서 분자들도 스스로 자기를 조직한다. 아원자입자에서 은하계에 이르는 물질의 세계, 원시세포에서 인간에 이르는 생물의 세계, 생식과 대사작용에서 자기의식에 이르는 인간 정신의 세계는 모두가 ‘우주정신의 자기조직화’, 즉 우주 진화의 역동적 표현이다. 인간은 외부의 실재를 자기 안에 반영하는 반사정신(反射精神)을 창조함으로써 환경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환경을 변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 밖에 있는 것들을 감각하고 경험하며 생각하는 반사정신으로써 자신을 의식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의 밖에 있는 환경을 의식하고 지각하며 경험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면서 문화를 창조하게 되었다. 과학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약 5만 년 전에 거의 완성되었고 그 뒤에는 사회문화적 진화를 해 왔다고 한다. 이미 인간은 의식, 사고, 언어의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생물학적 진화에서 정신의 진화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자기를 초월하는 인간 정신은 자기보다 큰 생명인 공동체와 생태계의 질서에 참여하고 지구의 정신에 통합되며 종국에 가서는 거룩한 우주의 마음과 합일하게 된다. 이처럼 생명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 그 이상의 것으로 자기 한계를 초극하여 진화함으로써 창조의 기쁨을 느끼는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우주를 포함한 모든 생명에 담겨 있고 바로 이 거룩한 생명이 바로 한울님이다. 한울님은 결코 초월자나 절대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실현을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 그 자체이다. 인간 정신은 자기 안에 거룩한 우주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4.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

동양 전통사상의 직관적 지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창조하고 계시하는 초월적인 신神으로 보지 않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활동 속에서 자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보편적 일자(普遍的一者) 즉 우주의 생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힌두교의 최고신을 지칭하는 브라만이라는 말은 생명, 운동, 성장, 진행을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브라만은 때로는 생성과 소멸의 춤을 추는 시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힌두교는 우주를 유기적으로 성장하며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고, 고립된 형태로 고정된 것들은 모두 마야(摩耶) 즉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 인간은 비로소 마야의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역동적인 세계관은 바로 불교의 근본 사상이기도 하다. 불교는 세계의 모든 실상이 무상하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모든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며(諸行無常) 유전하고 변화하는 것이 우주와 생명의 근원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번뇌는 움직이고 변하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정된 현상과 관념에 집착하는 데에서 생겨난다고 가르친다.

중국의 역사상(易思想)과 노장사상(老莊思想)도 모든 실재를 유동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았고 그 궁극의 원리를 ‘길(道)’이라고 표현하였다. 심리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모든 현상은 역동적인 우주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도(道)의 참모습은 대립하면서도 상보적인 관계에 있는 음(陰)과 양(陽)의 순환적 활동의 주기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음과 양은 우주의 궁극적인 생명인 태극(太極)의 양극이다. 그리고 모든 변화는 음과 양의 순환적 파동으로서 끊임없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변화는 어떤 외적인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 두루 내재한 자연적 경향이고, 음과 양의 균형이 바로 사물의 질서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 ‘한’이란 말로 표현해 왔다. ‘한’은 상반되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한’은 ‘전체로서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개체로서의 하나’이다. 그리고 ‘한’은 밖으로 퍼져 나가는 ‘원심적 확산’과 가운데로 모이는 ‘구심적 수렴’을 동시에 뜻하기도 한다. ‘한’은 많은 개체를 하나의 전체에 통합하면서 확산과 수렴의 순환적 활동을 수행하는 한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상은 고조선 시대 이래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으로 면면이 그 맥락을 이어 왔다. 최치원이 전하는 풍류도(風流道)가 바로 ‘한’의 사상이다. 풍류도는 유(儒), 불(佛), 선(仙)을 모두 포함하면서 그 이상의 무엇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 사상이다. 풍류도는 진화하는 우주생명의 전일성(全一性), 즉 ‘한’에 이르는 지극히 그윽한 길(玄妙之道)이다. 현묘지도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생명에 합일되어 가는 도정(道程)이다. 우주생명인 ‘한’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생겨나고(一折三極), 하늘과 땅과 사람이 각각 생명을 지니면서 하나의 우주생명에 합일되어 가는 것이다(大三合). 따라서 ‘한’은 없는 곳이 없고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無不在無不容).

‘한’ 사상은 서세가 동점하는 근세에 와서 우리 민족이 봉건적 질곡과 외세의 억압에 신음하고 있을 때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그 위대한 모습을 다시 나타냈다. 동학의 한울님사상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수천년간 형성되어 맥락을 이어온 한울님의 상(像)이 민족의 암울한 전환기에 성(誠)과 경(敬)과 신(信)으로써 모셔져야 하는 한울님으로 다시 현현하게 되었다. 한울님은 ‘한’, ‘길(道)’, ‘태극(太極)’, ‘기(氣)’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한울님을 관념화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마음에 있는 한울님은 삼라만상 속에 충만하고 인간과 더불어 있는 지극히 가까우면서도 그윽하고 아득한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이다. 한울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 안에 동참하면서 나누어 받아 체험할 수밖에 없는 한(大)생명인 것이다. 동학은 이러한 한울님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동학사상은 하늘과 사람과 물건이 다 같이 ‘한생명’이라는 우주적인 자각에서 시작해서 우주의 생명을 모시고(侍天) 키워 살림으로써(養天)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체천(體天)의 도를 설파하였다.

오늘날 인류는 진화냐 파멸이냐 하는 분기점에 서 있다. 진화는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다. 문명의 전환기는 인간에게 새로운 각성과 결단으로써 잃어버린 생명과 정신을 되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벗어나 우리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류의 진화과정에 축적된 문화유산에서 우리의 진로를 현명하게 결정할 지혜를 찾아내 활용해야 하겠다. 특히 동학사상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지혜와 희망을 줄 것이다.

첫째, 사람은 물건과 더불어 다 같이 공경해야 할 한울이다.

동학사상은 한울님을 인간과 자연을 초월해서 주재(主宰)하는 신으로 보지 않았다. 한울님은 사람과 생물 심지어 무기물에까지 내재해 있고 이들을 하나의 생명으로 통합하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해 가는 우주의 큰 생명이라고 한다. 사람과 물건들 속에 있는 생명은 곧 한울님이며 거룩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한울님을 공경해야 한다. 또한 사람은 한울님을 공경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물건들이 자기와 같은 생명으로서 한 동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동학은 ‘사람’과 ‘자연’이 모두 공경해야 할 ‘한울생명’에 합일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한울님같이 공경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해월은 일찍이 인간이 자연에 대해 공경심을 가짐으로써 자연과 생태적 균형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의 진화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하여 해월은 “초목의 싹을 꺾지 아니한 뒤에라야 산림이 무성하고” “손수 꽃가지를 꺾으면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 “폐물을 버리면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생태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둘째, 사람은 자기 안에 한울을 모시고 있다.

수운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거룩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두 한울님이 되는 것이다. 수운은 한울님을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수운은 한울님을 말로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한울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울님은 개념화될 수도 없고 정의될 수 없는 아득한 우주생명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한울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은 우주의 거룩한 생명을 자기 안에 모심으로써 우주적 삶을 살게 되고 우주의 마음에 합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울님을 모시는 일은“안으로 신령함을 지니고(內有神靈) 밖으로 기운화함이 있으며(外有氣化) 나아가 한 세상 모든 사람 각각이 옮겨 살 수 없는 한울임을 알게 되는 일(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이다. 시천(侍天)은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안에 모신 한울님을 망각하고 섬기지 않을 때 바로 인간의 소외, 즉 ‘옮김(移)’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운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守其心) 자신의 생명을 바르게 하면(正其心) 한울님의 성품을 거느리고(率其性)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 자연의 결에 따라 진화해 가는 것으로 본 것이다(化出於自然之中).

셋째, 사람은 마땅히 한울을 길러야 한다.

해월은 한울님이 사람의 마음속에 모셔져 있음은 종자(種子)의 생명이 종자 속에 있음과 같다고 하였다. 사람은 종자를 땅에 심어 그 생명을 기르는 것과 같이 자신의 마음밭에 심겨 있는 우주생명(宇宙生命), 즉 한울님을 길러야 한다고 한다. 한울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종자를 땅에 심지 않고 물속에 던져 그 생명을 죽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울을 기르는 사람에게 한울이 있고 한울을 기르지 않는 사람에게 한울이 없는 것이라 하였다. 종자를 심지 않는 사람은 결국 생명의 원천인 곡식을 거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울을 기를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울을 모실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사람은 자기 안에 포태(胞胎)된 생명의 씨앗을 잘 기르기 위해서 자기가 일해서 얻은 곡식과 밥을 먹여 키워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안에 거룩한 생명을 모시고 기른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자기 안에 모시고 기르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은 한울로서 서로 공경하며 협동적으로 공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다른 사람 안에, 자연 안에 모셔져 있는 생명의 씨앗을 정성껏 기르는 노고를 아끼지 않을 때 우주의 생명과 합일되는 시천(侍天)을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우주 차원에서 보면 양천(養天)은 바로 한울이 한울 전체를 키우기 위해 동질적인 생명들이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하게 함으로써 서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고, 이질적인 생명들이 먹이사슬(從屬營養) 순환을 통해 연대적인 성장 발전을 도모하도록 함으로써 한울 자신이 진화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해월은 이를 한울이 한울을 먹는다(以天食天)고 표현하고 있다.

넷째, ‘한 그릇의 밥’은 우주의 열매요 자연의 젖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한울을 키우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한다. 사람은 밥을 얻기 위해 땀을 흘려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밥과 곡식은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결실이라고만 할 수 없고 오히려 우주와 자연의 밭에서 자라난 열매이며 한울(天)과 땅(地)의 젖이라 할 수 있다. 부모의 포태(胞胎)가 곧 천지의 포태이기에 사람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도 한울과 땅의 젖이고 자라서 오곡을 먹는 것도 한울과 땅의 젖이라 한다. 해월은 밥과 곡식과 젖을 한울과 땅의 녹(祿)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한 그릇의 밥을 먹는 일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한울이 한울의 젖과 녹인 밥을 먹는 일이다. 즉 그것은 사람이 우주생명과 합일되는 우주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한 그릇의 밥은 한울과 땅에서 맺힌 열매이며 동시에 이웃 사람들이 땀으로 빚은 젖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밥 한 그릇 속에는 우주의 진리가 깃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공동체적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결국 사회라는 큰솥에서 지은 밥을 같이 먹고 살아가는 한 식구인 것이다. 만사를 안다는 것(萬事知) 즉 진리의 깨달음은 밥 한 그릇을 먹는(食一碗) 이치를 아는 데 있다고 하였다. 한 그릇의 밥이 한울과 자연의 젖이요 이웃들의 땀인 줄 안다면 한울과 땅 그리고 이웃의 고마움을 알고 갚을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갚을 마음은 한울과 땅과 이웃에 대한 고마움의 고백(告白)으로 나타나게 된다. 해월은 이 고백을 식고(食告)라고 부르고 이를 “도로 먹이는 이치(反哺之理)”라고 풀고 있다. 생명은 ‘되먹임고리’에 따라 순환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되먹임’은 우주와 생태계와 사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이 물질과 정보, 에너지와 마음을 교환(交換)·교감(交感)하면서 서로 연결된 순환적인 상호의존성의 고리를 뜻한다. 그리하여 해월이 말하는 반포지리는 바로 ‘되먹임’으로 풀 수 있다. 즉 한울과 땅과 사람이 생명의 에너지와 마음을 받아 되돌려 주는 순환 고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식고는 한울과 땅과 이웃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양식을 다시 되돌려 주겠다는 보은(報恩)의 의리(義理)를 맹세하는 일이다. 밥을 먹는 일은 성스러운 우주생명에 바치는 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계시는 한울님 앞에 생명인 밥을 바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상의 혼령에게 제사를 지낼 때 메밥과 위패가 벽을 향해 산 사람 건너편(彼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해월은 밥그릇을 정오(正午)의 산 사람 앞으로, 즉 이편으로(此岸) 옮겨 놓았다.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시간과 자리를 제자리로 바로 잡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사상은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식사를 성스러운 제사로 그 본래의 의미를 찾게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우주생명을 모셔 기르는 산 사람 앞에 생명의 근원이 되는 밥을 공양(供養)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산 사람 안에 한울님으로서의 조상들의 마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마음 안에는 먼 과거의 조상들의 영혼과 먼 장래의 후손들의 마음이 우주의 정신 즉 한울님으로서 하나로 합일되어 있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은 한울을 체현해야 한다.

사람은 한울을 모시고 키우는 자, 즉 시천(侍天)과 양천(養天)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한울님의 질서를 이 세상에 구현해야 할 사회·윤리적 책임을 지고 있다. 체천(體天)은 사람이 한울을 모시고 키우는 주체로서 한울님다운 도덕적, 사회적, 생태적 행위를 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한울님다운 행동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을 한울님다운 세상으로 진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즉 선천세계(先天世界)는 죽임과 억압, 소외와 분열의 세계이다. 때문에 이 세상을 다시 한울의 세계, 즉 생명의 질서로 개벽(開闢)하는 인간의 행동은 불가피하게 싸움과 부정(否定)의 형태를 띠게 된다. 죽임과 억압에 거슬러 투쟁해야 하고 소외와 분열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울의 정의(正義)인 것이다. 이 싸움은 우선 죽임과 억압의 질서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인 투쟁(財戰)으로, 조작과 기만의 문화에 대한 언어·심리적 투쟁(言戰)으로 나타나게 된다. 도덕의 싸움과 생명을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活人) 싸움,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사람도 살고 자연도 사는, 즉 함께 사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위한 싸움이다. 한편 경제의 싸움은 밥 한 그릇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밥 한 그릇이 우주의 열매이자 사회의 열매인 것을 깨닫고 생명의 열매를 모든 생명에게 나누어 먹여서 그 생명을 살리는 싸움이다. 말의 싸움은 한울과 사람과 물건이 다 같은 한울님이라는 우주적 각성을 하고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을 섬기고 키워서 살려야 하는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한울의 진리를 이 세상에 널리 전하고 또한 그 진리의 그릇인 ‘말’을 순화(淳化)시키고 생동시키는 문화투쟁(文化鬪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죽임의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일상적 생활에서 생명에 대한 존엄과 경외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생명을 가두고 나누고 억압하고 죽이는 일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체천(體天)의 소극적인 표현이 바로 십무천十毋天의 강령이라 할 수 있다. 십무천 강령의 내용은, “①생명을 속이지 않는다 ②생명 앞에 오만하지 않는다 ③생명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④생명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⑤생명을 일찍 죽이지 않는다 ⑥생명을 더럽히지 않는다 ⑦생명을 굶기지 않는다 ⑧생명을 파괴하지 않는다 ⑨생명을 혐오하지 않는다 ⑩생명을 예속시키지 않는다”로 되어 있다. 한울을 이 세상에 구현하는 체천의 도(道)는 삼전(三戰)과 십무천을 통하여 구체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섯째, 개벽(開闢)은 창조적 진화이다.

수운과 해월이 말한 바 선천세계는 생명을 가두고(抑壓) 옮기고(疏外) 나눔(分裂)으로써 생명을 죽이는 죽임의 질서라 할 것이다. 생명이 생명답게 되기 위해서는 선천의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다. 그러나 동학사상은 후천개벽이 인간의 인위적인 혁명으로 성취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후천개벽은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되어 가는 것이다. 낡은 선천세계는 낡은 것과 새것이 자연스럽게 서로 갈아드는 진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다. 인류는 인위적 폭력으로써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위이화하는 우주의 진화와 협력해서 자신의 생명을 능동적, 적극적으로 진화시켜 나아갈 때 세계를 개벽할 수 있다. 인류의 진화는 무위이화라는 우주의 자연스러운 진화과정이면서 동시에 시천(侍天)하고 있는 인간의 각성과 실천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이 낡은 선천세계를 개벽하는 일도 한편으로 보면 우주의 생명과 마음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인간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참여를 통해서 이룩된다고 할 것이다. 결국, 우주와 인간은 협력하고 동역(同役)함으로써 창조적 진화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고 이 진화의 역동적인 과정을 통하여 우주와 인간이 통일되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창조적 진화는 우주의 개벽이고 우주의 진화는 인류의 후천개벽이 되는 것이다.

일곱째, 불연기연(不然其然)은 창조적 진화의 논리이다.

수운은 그의 독특한 개념인 ‘불연기연(不然其然: 아니다 그렇다)’을 가지고 천지개벽과 인간 진화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의 ‘불연기연론’은 동양과 서구의 전통적인 존재론에 대한 진화론적 극복이라 할 수 있다. 수운은 형태를 갖추면서 생성·진화하고 있는 천고(千古)의 만물들이 그 현상으로 보면(所見而論之則) 그렇고 그런 것같이(其然似然) 보이지만 그 생성으로 보면(所自而度之則) 그렇지 않다(不然)고 하였다. 그리고 생성하는 것을 변하지 않고 고정된 틀, 즉 ‘존재’의 구조로 보면 ‘그렇다’와 ‘아니다’의 대립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긍정(肯定)과 부정(否定)의 이원론은 ‘생성’을 ‘존재’로 보는 데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수운은 이원론적 대립이 시간의 개념에서도 성립된다고 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서도 ‘이미 사라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이분(二分)되어 어느 한쪽을 ‘그렇다’라고 보면 그 다른 쪽은 ‘아니다’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운은 긍정과 부정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해결을 진화의 시각에서 찾으려고 했다. 모든 실재는 그 생성과 진화에서 보면 스스로 진화하는 궁극적 실재, 즉 한울과 합일되어 있다는 것이 부정될 수 없으므로 오히려 ‘그렇다’라고 단언될 수 있다고 하였다. 수운은 인간이 존재의 시각으로 보아서 ‘아니다’라고 하는 것조차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근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부정할 수 없고 오히려 ‘그렇다’고 앎으로써 ‘그렇다’고 믿는 것이라 하였다. 결국 ‘아니다(不然)’라고 보는 것은 기필(旣必)하기 어려운 것, 즉 생각이 ‘아직’ 미치지 못한 것을 의미하고 ‘그렇다(其然)’는 ‘이미’ 알고 있는 것, 즉 생각이 미친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수운은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가운데 진화하는 한울에는 “옛적부터 지금까지 미필(未必)한 적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불연(不然)한 것은 미필한 것이요 기연(其然)한 것은 기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주는 물질과 반물질 간의 대칭성 파괴로 인한 태초의 폭발(Big Bang)로부터 시작되어 맥동하면서 진화해 왔으며 지금도 진화하면서 원자와 분자 같은 물질의 미시적 수준, 생물과 인간 같은 생명의 거시적 수준, 생태계와 우주 같은 초거시적 수준 등으로 중층질서(重層秩序)를 형성해 왔다고 한다. 여기서 진화란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분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一)’가 ‘많은 것(多)’으로 분화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진화는 복잡하게 혼돈된 무질서가 질서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즉 ‘많은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진화는 서로 모순되는 것같이 보이는 ‘복잡화’와 ‘질서화’의 두 경향을 통합하는 순환적 역동 과정이다. 그리고 진화는 모든 수준의 생명이 그 존재의 한계를 넘어 멀리 뻗어 나가는 것, 즉 ‘자기초월’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진화는 모든 수준의 생명이 요동을 통해 자기를 새로운 질서로 조직하는 것, 즉 ‘자기조직화’인 것이다. 따라서 진화는 낡은 질서의 초월과 새 질서의 조직을 그 과정에서 통일하고 있다. 또한 진화는 과거의 살아 있는 경험과 전망되는 미래에의 계획을 창조적으로 통합하고 있다. 그리고 진화는 시간들의 통일일 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묶어 시공 연속체로 통합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주는 모든 수준의 생명이 상호연관의 그물에 이어져 미시계와 거시계가 공진화함으로써 무궁한 시공(時空)으로 펼쳐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을 통합하면서 진화하는 우주가 바로 인간 정신 안에 내재해 있다. 인간 정신은 과거의 경험과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유전 기능이 있고 그의 환경인 생태계와 에너지를 교환하는 대사 활동을 할 뿐만 아니라 우주 진화의 전 과정을 포괄하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자기의식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은 자기의식 속에 무궁히 진화하는 우주, 즉 한울을 지닌 셈이다. 수운은 이를 일컬어 시천(侍天)이라 하였다. 시천은 정태적(靜態的)인 상태에서 초월적인 신을 섬기는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생성·진화하는 우주를 지님으로써 한울과 더불어 진화하는 인간의 정신을 의미한다.

수운의 ‘불연기연론(不然其然論)’은 ‘아니다 그렇다’의 논리로써 바로 진화의 진상(眞相)을 규명한다.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분석적 지각은 실재를 정태적 구조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만 보고 실재의 생성과 진화를 간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감성과 오성(悟性)을 넘어서 있는 것, 즉 생성과 진화에 대해 불연한 것으로 ‘아니다’라고 판단을 내리고 만다. 그리고 인간이 미시적 차원에서 진화하는 거시적 실재를 인식하려고 한다면 정태적인 틀에 맞는 것에 대해서만 ‘그렇다’라고 궁극적 판단을 내리게 된다. 여기에서 존재의 이원론적 분열과 대립이 성립하는 것이다. 인간이 생성하는 실재를 분석적 지각으로 보면 기연한 것만 보고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을 불연하다고 부정하지만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을 가지고 이를 보면 그 불연한 것이 기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은 불연과 기연이 진화하는 궁극적 실재에 있어서 하나로 통일되어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거시적인 차원의 실재는 감각적인 경험과 분석적인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직관을 통해 파악할 수 밖에 없다. 직관(直觀)은 문자 그대로 ‘내부에서 배우는 것(intuition)’을 의미한다. 인간이 격변하는 진화의 소용돌이에서 저장된 유전정보, 환경과의 대사(代謝), 분석적 정신만을 가지고 진로 설정에 어려움을 겪었을 때에 직관적 지혜가 인간을 인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직관은 구조적 지식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지식이며 진화하는 우주의 전일적 과정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천의 각성(覺醒)이다. 인간이 생명의 궁극적인 실재인 한울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아니다’가 ‘그렇다’로 전환된다. 결국 인간은 ‘깨달음’을 통해서 인간과 우주,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 물질과 정신, 불연과 기연이 통일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제 시천의 각성이 양천(養天)의 실천을 통해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가운데 개벽(開闢)으로 전개되는 진화의 문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연과 인간을 역사적인 안목에서 존재가 아니라 생성으로 보려는 사상적인 시도와 노력이 19세기 서구에 있었다. 근대화되어 가는 서구의 세계 질서 속에서 후진적 주변부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의 낭만적인 시대정신은 당시 현상(現狀)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면서 변증법적 사고를 촉진해 나갔다. 변증법(dialectic)은 헤겔(Hegel)의 관념적인 변증법이나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을 막론하고 그 특징은 모순을 용인하는 데 있다. 이때 모순은 ‘있음과 ‘없음’의 통일, 즉 대립의 통일을 의미한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대립의 통일’을 모든 사물의 본질이요 역사 진보의 원동력이면서 동시에 사고의 법칙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사물의 변화를 ‘양(量)의 점진적 변화의 질적 비약(質的飛躍)’으로 보고 그 원리를 바로 ‘부정의 부정’의 논리로 보았다. 변증법은 레닌(Lenin)에 와서 대립의 통일보다는 투쟁이 강조되었다. 레닌은 대립의 통일은 조건적, 일시적, 상대적이고 서로 배척하고 충돌하는 ‘대립의 투쟁’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투쟁의 변증법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변증법은 대립의 통일과 투쟁으로써 생성과 변화를 설명하고 있지만, 대립적인 것이 모순이라기보다는 상보(相補)적이라는 점을 놓침으로써 존재의 이원론적 구조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하였으며, 생성과 변화를 단순히 ‘양의 질로의 변화’로 이해함으로써 기계론적 틀에 사로잡혔다. 결국 헤겔의 ‘구체적 전체성(具體的 全體性)’은 개체와 전체가 전일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획일적 전체성’으로 오해됨으로써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수운의 ‘불연기연의 논리’는 존재의 정태적인 틀 속에 속박된 인간 오성을 해방하려다가 좌초한 변증법적 이성(辨證法的 理性)의 실패를 극복하고 인간, 자연, 그리고 우주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창조적 진화의 문법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5. 한살림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모든 문명은 발생, 성장, 쇠퇴, 소멸의 길을 걸어왔고 역사의 이러한 흐름은 우주의 역동적 순환과정의 일환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떠한 문명이든지 그것이 최성기에 도달하면 그 사고방식, 행동양식, 사회구조의 유연성(柔軟性)을 잃고 경직화됨에 따라 활력을 상실해 버리고 몰락해 가는 경향이 있다. 산업문명은 20세기 후반 1970년대에 들어와서 그 정점에 도달하고서는 바로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 같다. 생명의 원리인 유연성에 반하면서 경직화된 기계의 질서는 이제 생존이냐 아니면 파멸이냐 하는 절망적 위기의 벼랑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위기는 파멸로 인도하는 위험한 상황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화에의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는 진화의 계기, 즉 새로운 기회일 수도 있다.

오늘날 위기의 상황 저변에서부터 변화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사회, 경제, 정치의 모든 영역 특히 국제정치, 경제의 영역에서 지배권력이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은 베트남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무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일본은 인류사상 처음으로 자위대라는 비정상적인 군비(軍備)를 가지고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해 가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를 지배해 오던 미국 경제는 1970년대를 고비로 해서 소위 쌍둥이 적자라 불리는 국제수지 적자와 재정 적자로 시달리면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세계 최대의 부채국인 미국의 달러가 세계경제사상(世界經濟史上)처음으로 전 세계의 화폐로 통용되는 기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국경을 타고 넘는 다국적기업(多國籍企業)들이 국가의 주권과 세계경제를 주무르게 되었다. 이들 기업의 자산은 대부분 국가의 국민총생산을 능가하고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 힘은 각국 정부의 권력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의 지배도 국제 여론의 힘과 국제경제의 블록화에 의해 세계 도처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또 세계는 인권과 자유를 물리적 폭력으로써 지배해 오던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민주화의 경향을 보인다. 또 산업사회 내부에서도 기술관료체제, 즉 대기업과 당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면서 부분적인 개혁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또 다른 변화의 조짐은 자연환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도 엿보인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환경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제 더는 경제성장을 환경문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환경 파괴와 공해문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파탄이라고까지 하면서 적극적인 환경정책이 요청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 파괴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상황인데도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다소의 환경 파괴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아직도 지배적인 것이다.

사상과 이념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징후가 보인다. 그동안 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해 왔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그 정책과 사상에 있어서 현실성을 잃어 가고 있다. 세계인은 계급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류의 공동선이 현실적이고 중요하다는 새로운 공동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19세기 자유방임의 환상에 실망한 나머지 지식인들은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열중했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수렴화(收斂化)에 기대를 걸고 있다. 자본주의 여러 나라는 고전자본주의의 틀을 넘어서 사회정책과 복지 개념에 관심을 돌리고 있고 한편 최근 소련과 동구의 일부 나라들은 개방과 자율화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인류와 세계가 문명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때 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돌아다보면 우리 민족의 근세사는 외압에 대한 줄기찬 항전의 발자취였다. 우리 민족은 근대적 민족으로서의 자각이 움트기 전에 안으로부터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서구 제국주의가 동점(東漸)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 밖으로부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 억압과 야만적 수탈 속에서 민중은 그 생존기반을 빼앗기고 그 민족적 본성을 박탈당한 채 신음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 식민지 지배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해 왔다. 저항과 투쟁이 그렇게 치열했고 독립과 해방을 향한 민족의 마음이 그렇게 열렬했음에도 우리 민족은 끝내 독립을 자주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해방은 민족의 자주적 투쟁의 결과라기보다는 일본을 대신한 또 다른 외세(外勢), 즉 미국과 소련에 의해 타율적으로 주어진 것에 불과했다.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소위 미·소 냉전체제는 세력균형이라는 명분 아래 민족 해방을 민족 분단이라는 아픔으로 뒤집어 놓았다. 민족의 분단은 결국 동족 간의 비극적 싸움으로 심화하여 갔다. 전쟁이 휴전체제로 바뀐 지 40년이 지나도록 남과 북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여전히 타율적 이데올로기와 체제하에 서로 적대하고 있다. 그동안 남과 북은 자본주의 이념과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그 나름대로 산업화를 이루어 놓고 있다. 그러나 남은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군사적 독재 권력 밑에 민중의 생존과 인권이 오랫동안 유린당하여 왔다. 북은 이른바 주체사상이라는 낡은 스탈린주의의 토착화에 열중하면서 인민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폐쇄된 전체주의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과 북의 집권 세력은 서로 정치·군사적으로 적대하고 있으면서 말로만 통일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기존의 체제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통일문제를 권력 획득과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현재 남쪽의 민중들 사이에 통일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지만 그들도 민족분단에 가로 놓여 있는 장애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상적 혼란에 빠져 있다.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인 우리 민족을 기계적 힘으로 분단시켜 적대토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 그대로의 한반도를 기하학적인 선으로 절단하여 그 생명의 기(氣)를 끊어 놓은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류와 세계를 분열시킨 억압적인 기계문명인 것이다.

진정한 통일운동은 무엇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진화를 가로막고 있는가를 정확히 인식하는 일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생명을 기계의 구조와 질서로써 억압하고 소외시키며 분열시키고 있는 오늘날 산업문명이 인류 진화 과정상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에서 통일의 문턱은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고 서로 적대케 하는 것은 낡은 기계문명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인류의 진화를 억제하는 소극적인 ‘되먹임고리(feedback)’인 것이다.

바야흐로 산업문명은 내부에서 격동하고 있고 그 동요는 낡은 구조와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너무나 격렬한 것이다. 그것은 곧 적극적인 ‘되먹임고리’를 통하여 더욱더 증폭되고 확대되면서 진화의 분기점을 돌파하는 혁명적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 진화의 창조적 초월은 바로 한반도에서 시작될 것이 틀림없다. 한반도는 산업문명의 비극적 운명이 집약적으로 연출되는 무대이며 우리 민족의 현존은 소외된 인간 실존의 응축된 상징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은 진화의 분기점에서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류를 대신하여 앞장서서 과감한 창조적 진화의 모험을 감행토록 하는 추진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생명의 씨앗을 전 인류, 전 세계에 퍼뜨리고 인류의 진화에 앞장서서 나선다면 우리 민족은 통일을 성취할 뿐만 아니라 인류 진화의 대약진의 여명을 알리게 될 것이다. 그때 한반도는 우주생명, 즉 한울님의 제단이 될 것이다. 진정한 통일운동은 우리 민족의 통일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 전 생태계, 전 우주생명과의 통일을 지향하는 생명운동이다. 생명의 이념과 활동인 한살림은 모든 개인, 모든 민족, 전 인류, 전 생태계가 한울님, 즉 우주생명의 태 속에서 태어나 한울의 젖을 빨고 자라는 한 형제, 한 동포라는 우주적, 생태적, 공동체적 각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한살림은 그 세계관에서는 물질, 생명, 정신이 역동적인 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우주생명에 통합되어 가고 있으며 인간, 자연, 우주 모두가 동요를 통해 새로운 질서로 자기를 조직하는 생명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있는 새로운 과학에서 그 이론적인 전거(典據)를 찾고 있다. 한편 한살림은 가치관에서는 한민족의 오랜 전통과 맥을 이어오고 있는 동학의 생명사상에서 그 사회적, 윤리적, 생태적 기초를 발견하고 있다. 동학은 물질과 사람이 다 같이 우주생명인 한울을 그 안에 모시고 있는 거룩한 생명임을 깨닫고 이들을 ‘님’으로 섬기면서(侍) 키우는(養) 사회적, 윤리적 실천을 수행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을 자기 안에 통일하면서 모든 생명과 공진화해 가는 한울을 이 세상에 체현시켜야 할 책임이 바로 시천과 양천의 주체인 인간에게 있음을 동학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첫째, 한살림은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覺醒)이다.

모든 생명은 전체의 일부분인 동시에 부분들의 통합된 전체라는 전일적(全一的) 구조를 갖고 있으며 전체로서의 독립성과 개체로서의 의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 모든 생물, 심지어 무기물까지도 하나의 우주적 그물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협동하여 공진화하는 생명인 것이다. 모든 생명은 한울 가득히 가지를 뻗고 있는 우주라는 큰 나무에 연결된 가지, 줄기, 뿌리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우주생명이라는 나무에서 단절되면 그 생명을 잃고 만다. 우주생명인 한울은 모든 생명을 자기 안에 합일시키고 키워 나아간다. 인간은 무궁히 자라나는 우주라는 생명나무의 한 가지 끝에 맺힌 작은 열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우주생명에서 떨어져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우주생명이라는 큰 나무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생명이면서 동시에 보다 작은 생명들을 통합하고 있는 큰 생명이다. 이것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제자리며 참모습이다. 그런데 열매 속에는 나무의 씨앗이 있고 그 씨앗 속에는 우주의 생명나무가 포태되어 있다. 진화하는 우주생명은 살아서 진화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잠재해 있고 진화하는 인류의 문화는 우주의 전 시공간을 포괄하고 있다. 전체로서의 우주가 개체로서의 인간 안에 살아 숨 쉬 있어 동학은 이를 일컬어 시천(侍天)이라 하였다. 즉 사람은 누구나 그 안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한울을 자기 안에 모시고 있음을 스스로 망각함으로써 그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탐욕스럽고 잔인하게 그 형제이자 동포인 자연을 지배하여 착취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탐욕스러운 욕망을 버리고 인간이 다시 자기 안에 모신 한울을 섬긴다면, 즉 소외되어 있던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생명이 될 것이다.

둘째, 한살림은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이다.

생태계는 자율적으로 자기를 조직하는 체계이며 동시에 자기 안에 인간, 생물, 무기물 들을 하나의 생명으로 포괄하고 있는 인간보다 큰 생명이다. 생태계로서 지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이며 가이아(Gaia)로서의 지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대기와 바다와 흙과 더불어 인간과 다른 생물을 하나의 생명으로 통합하고 있는 지구는 엄청난 화학적, 열역학적 비평형의 동요에서도 자기를 유지해 왔고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생태적 질서를 창조해 왔다고 한다. 만일 지구가 단순한 무생물체의 고체덩어리라면 어떻게 인체가 체온을 조절하듯이 지표(地表)의 온도를 조절할 수 있고 모든 지질학적, 기상학적인 요동을 겪어 내면서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의 새로운 과학은 분자 수준의 물질에도 생명과 정신현상이 있다는 놀라운 혁명적 물질관을 제시하고 있다. 물건 안에도 성스러운 한울이 계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해월은 땅 울리는 소리가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고백하였다.

생명의 진화는 우리 인간에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하고 있다. 지구 상 최초의 생명의 형태인 원시세포(prokaryote)는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만들어 내어 지구의 대기권에 현 수준의 산소가 함유되도록 함으로써 산소를 호흡하고 살아가는 유핵세포(eukaryote)와 그밖의 고등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생태적 질서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원시세포들은 생태계에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식물과 동물의 세포 속에서 그들과 공생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생물의 산소호흡을 조절하고 무기물로부터 영양을 합성함으로써 ‘전 생태계의 에너지 살림’을 도맡고 있으며 생물의 폐기된 유기물 쓰레기를 분해하여 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전 생태계의 ‘생산자’와 ‘주부’로서 또는 ‘청소부’로서의 원시세포가 수행하는 ‘에너지의 순환운동’과 ‘자정(自淨)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주생명의 나무의 일원으로서 가지, 잎, 뿌리와 더불어 공생하고 공진화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인간에게 자신의 자유함과 동시에 생태계에 대한 성숙한 책임감이 전 지구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지구의 요구는 인간의 요구이며 인간의 권리도 지구의 권리인 것이다.”

셋째, 한살림은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듯이 사회를 떠나서 살 수가 없다. 인간은 본래 공동체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 인간은 자연과의 생태적 균형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참다운 공동체를 상실하고 있다. 인간은 군중 속에 원자화된 고독한 개인으로 이웃과 단절되어 있다. 사회는 공동체적 성격을 상실하고 지배와 통제의 기능만 강화하고 있다. 인간은 핵가족과 개인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중앙집권화한 권력에 의해 일괄적으로 관리되고 통제되고 있다. 사회의 가치를 결정하고 배분하는 권력이 더욱더 중앙집권화되고 전문화되고 독점화되면서 인간을 더욱더 소외시켜가고 있다. 사회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들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투쟁의 장이 되어 버렸다. 그 속에서 인간은 이기적으로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욕망 충족(欲望充足)의 고리에서 쳇바퀴 돌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삶에서 결핍된 것은 물질적 안락이 아니라 공동체적 협동과 자연과의 조화이다.

사회는 살아 있는 인간의 사회이며 그 본래의 모습은 진화하는 생명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물질과 에너지, 정보와 지식, 정서와 정신이 끊임없이 순환적으로 교류되고 있다. 그리하여 사회는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集合)이 아니라 부분으로서의 개인과 전체로서의 사회가 전일적으로 통합된 공동체이어야 하며 인간은 공동체에서 이웃과 협동함으로써 공생하지만 결코 그 자율성(自律性)을 상실하지 않고 오히려 참다운 자기실현의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자연과 생태적 균형을 이루어 나가면서 환경의 변화와 진화에 유연성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이다. 해월은 사람이 사람을 한울로서 대접하면 세상을 기화(氣化)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 사회가 공동체적 삶을 통해서 진보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사회가 용시(用時), 용활(用活)하지 못하면, 즉 시대의 진화에 응하지 못하면 죽은 물건이나 다름없다고 설파하고 있다. 인간은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낭비보다는 검약, 경쟁보다는 협력, 물질적 성장보다는 정신적 성숙, 이기(利己)보다는 공생, 자기주장보다는 사회정의, 분열보다는 통일을 지향하는 참다운 공동체적 각성이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다.

넷째, 한살림은 새로운 인식, 가치, 양식을 지향하는 ‘생활문화활동’이다.

산업문명은 자연의 생태적 균형과 인간의 공동체를 파괴함으로써 엄청난 분열과 충돌과 동요를 유발하고 있다. 격동하는 문명의 동요는 더욱더 증폭되어 생존이냐 파멸이냐, 붕괴냐 창조적 진화냐하는 분기점에 이르렀다.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는 전적으로 인류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오늘날 인간은 매우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생명인 것같이 보이나 그 본성에 있어서 지혜롭고 성스러움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계문명은 인간이 그 본성으로부터 떠나 소외된 모습으로 살도록 억압해 왔다. 오늘날 인간은 자기 안에 모시고 있는 우주생명을 망각함으로써 생명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드디어 세계는 인간의 소외뿐만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의 소외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류의 파멸과 생태계의 파괴로 발전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이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외된 본성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모셔진 우주적 생명을 깨닫는 일이다. 즉, 인간이 자신 안에서 우주생명과 합일됨을 깨닫는 일이다. 이러한 각성된 깨달음이 있을 때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릴 것이고 참된 인간 회복과 인간해방의 길이 열릴 것이다. 우주생명과의 합일됨을 깨달은 각성한 인간은 인간과 자연이 다 같은 생명으로서 우주와 합일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각성한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이웃과 협동하면서 공생하고 생태계와 균형 있고 조화로운 생활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제 삶의 인식, 가치, 양식에 대한 전면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 인간, 사회를 기계 모형으로 보는 산업문명을 생명의 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초하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여 사회에 널리 보급해야 하겠다.

다섯째, 한살림은 생명의 질서를 실현하는 ‘사회실천활동’이다.

생명의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기존의 질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의 충격과 동요를 증폭시키면서 이를 새로운 질서와 환경으로 창조하는 생명의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산업문명은 그 내부적 동요와 외부적 충격으로 진화의 문턱에 와 있다. 와해하여 가는 기계문명으로부터 인류가 창조적 진화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각성한 인간들의 창조적 활동이 필요하다. 그 활동은 낡은 기존의 사회, 경제, 정치를 혁파하고 생명의 질서를 지향하는 실천적 사회 활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산업문명의 정치는 그 권력을 소수 기술관료들에게 집중시키면서 대다수 국민을 억압하여 소외시키고 사회의 분열과 경제의 불균형을 조장하고 있고 관료들의 부조리, 부패, 무능을 양산해 내고 있다. 대기업에 의해 장악된 경제는 자본과 기술을 더욱더 집중함으로써 실업과 주기적 불황을 유발하고 있고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함으로 생태적 균형을 파괴하고 있으며 부(富)를 독점함으로써 사회의 불균형과 분열을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기존의 정치 질서와 경제구조는 기계의 질서로써 인간을 억압하여 소외시키고 자연을 파괴하는 죽임의 질서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의 큰 생명을 자각한 창조적인 인간은 반생태적, 반공동체적인 정치권력, 기술관료, 대기업 들에 대한 생명의 투쟁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민족과 인류가 다 같이 살자는 이 싸움은 사랑의 투쟁이며 평화의 투쟁이고 생명의 투쟁이다. 생명의 투쟁은 인위적 폭력으로 기존의 사회질서를 해체하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투쟁은 인류 진화의 도정에서 새롭게 도래할 문명을 준비하는 창조적 활동을 말하고 후천개벽을 의미한다.

여섯째, 한살림은 자기실현을 위한 ‘생활수양활동’이다.

생명의 세계관, 가치관을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 활동은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모든 생명이 모두 우주생명에 합일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해월은 일찍이 한울을 키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누구나 자기 안에 우주생명을 포태하고 모시고 있다. 수운은 한울님을 모시는 일은 자기의 마음을 닦고 몸의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천(侍天)은 안으로 심화(心化)하고 밖으로 기화(氣化)하는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닦는 일이다. 그리하여 수운은 사람이 성실, 공경, 믿음을 다하여 한울을 섬기고 수심정기(守心正氣)하면 누구나 무극대도(無極大道)에 이르게 된다 하였다.
만약 사람이 한울님을 자기 안에 모신 거룩한 생명이라면 마땅히 자기 안에 계시는 한울을 키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안에 계신 한울뿐 아니라 이웃 사람과 자연 안에 계시는 한울도 키워야 할 윤리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양천은 인간이 자기와 이웃과 자연 안에 내재한는 우주생명을 키움으로써 ‘자기’와 ‘공동체’와 ‘생태계’의 공진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월은 한울을 기를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한울을 모실 줄 안다고 하였다. 시천(侍天)이라는 우주적 각성과 자기 마음을 닦는 수양(修養)은 생명을 기르고 키우는 현실적 생활(生活)에서 이루어진다. 생활이란 문자 그대로 살아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은 인간이 살아 활동하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뭇 생명에게 ‘밥’이라는 생명 에너지를 먹여 키우는 일이다. 우주생명과 하나임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와 이웃과 자연이 모두 하나의 생명임을 자각하고 그들의 생명도 자신의 땀으로 빚은 ‘밥’을 먹여 키운다. 그리하여 각성된 사람은 시천과 양천(養天)이 하나로 통일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 자신 안에 ‘한울생명’을 모신 성스러운 생명이기에 성실함과 경건함 그리고 믿음을 갖고 자기와 이웃과 자연의 생명을 자신의 땀과 피로써 키워 살려야 하는 윤리적 책무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도덕적 각성은 곧 진정한 ‘자기실현’을 위한 수련의 길일뿐만 아니라 자기와 이웃이 협동하는 ‘공동체의 삶’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사회정의’, ‘생태균형’을 실현코자 하는 사회 실천 활동의 출발점이 된다.

일곱째, 한살림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생명의 통일활동’이다.

민족통일은 우리에게 민족적 지상과제이다. 하나의 통합된 생명인 한민족이 물리적 힘과 기하학적인 선으로 잘릴 수는 없다. 이것은 자연의 결을 거스르는 일이며 생명의 진화를 역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아직도 분단의 고통 가운데 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쓰라림을 이겨 내면서 한 알의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 내는 진주조개의 창조적인 고통일 것이다. 진정한 통일운동은 인류역사의 진화 속에서 우리 민족이 수행해야 할 역할을 인식하는 데서 그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할은 고난과 시련의 역사를 새로운 역사 창조의 원동력으로 전환해 인류 진화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산업문명이 기초하는 기계의 사회문화 모형은 모든 것을 분할, 구속, 고립시키고 모든 것을 예속, 소외, 오염시키고 있는 죽임의 틀이다. 그런데 기계문명도 본래 생명인 인간 정신의 산물이다. 그것이 생명의 모태를 떠나 생명의 탯줄을 끊고 나서부터 오히려 그 어머니인 생명과 인간을 억압하고 핍박해 왔다. 그러나 탕자와 같은 기계문명은 더는 생명을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생명의 탯줄로부터 단절되어 그 생명력을 잃고 엔트로피의 노예가 되어 죽음을 선고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기계는 그 생명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인간과 화합함으로써 본래의 생명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한살림은 기계의 힘과 논리가 분할하고 단절하고 폐쇄한 모든 것을 다시 통일하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통일을 성취하고자 한다. 한살림은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감성과 이성을, 인간의 자기의식 속에서는 분석적 지식과 직관적 지혜를, 인간의 생명에서는 육체와 정신을, 인간 사회에서는 개인과 공동체를, 생태계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다시 통일시키면서 이 모든 것을 ‘한울생명’에 통일시키는 생명의 대통일운동을 전개해 나아가려 한다. 한살림은 전 우주, 전 생태계, 전 인류를 생각하면서 민족 통일을 위한 실천 활동을 수행하고 민족의 통일을 생각하면서 생태적 균형, 사회정의, 자기실현의 길을 모색하려 한다.
수운은 우리에게 통일의 대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니 시천사상(侍天思想)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거룩한 우주생명이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각성함으로써 진화하는 우주의 창조적 대통일사업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우주적 사업은 생명을 억압하고 소외시키고 분열시키면서 죽임을 강요하는 낡은 선천세계를 개벽하는 창조적 진화라 하겠다. 개벽은 한울과 인간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인간 누구나에 내재한 우주생명은 바로 인간의 옮길 수 없는 본성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망각된 채 소외된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여 제자리에 놓는 일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간해방의 길이다. 시천의 각성이 내 마음, 우리 민족의 정신 아니 전 인류의 영혼에서 일어날 때,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 개인과 사회, 민족과 인류가 하나의 우주생명으로 동귀일체(同歸一體)되는 생명의 궁극적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 바야흐로 후천개벽이 다가온다. 생명의 새로 지평이 우리 앞에 열리기 시작한다.
인류의 위대한 추축시대(樞軸時代)에 예수와 붓다가 점화한 ‘사랑’과 ‘자비’의 등불은 2000년 이상 인류를 어둠에서 인도해 왔다. 그러나 산업문명시대에 들어와서는 그 빛이 희미해졌다. 죽임의 어둠이 더욱 깊어지고 있는 오늘날 사랑과 자비가 생명의 등잔 위에 더욱 큰 불꽃으로 다시 점화되어야 할 것이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인간해방을 선포하면서 혁명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어 온 세계의 억압받고 소외된 계급과 민족의 길잡이가 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혁명의 깃발은 그 빛깔이 바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질의 생산, 분배, 소유를 혁명적으로 재편함으로써 인간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빵만 아니라 생명인 빵의 의미와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는 시천의 각성이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준비하고 있는 각성하고 해방된 인간의 정신은 ‘자기 안에 있는 우주 안에 자기가 있음’을 깨닫고 있다. 진화의 분기점에 방황하고 있는 이 시대는 ‘우주 속의 인간’, ‘인간 안의 우주’라는 자기 이미지를 지닌 새로운 이념이 나와야 할 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이념과 활동인 한살림을 펼친다.

“무궁한 그 이치를 무궁히 살펴 내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수운)

*이 선언문은 한살림 운동의 이념과 실천방향을 확립하기 위해 가진 공부모임과 토론회에서 합의된 내용을 장일순 선생, 박재일, 최혜성, 김지하가 정리하고 최혜성이 대표집필하여 1989년 10월 29일 한살림모임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것이다.